길위의단상

한 장의 사진(23)

샌. 2017. 8. 15. 11:14

최근에 어느 육군 대장의 공관병에 대한 갑질이 여론의 질타를 받고 있다. 정권이 바뀌면서 사회가 제자리를 찾아가는 긍정적인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군대에 있을 때 나도 1년 가까이 공관병 생활을 했다. 공관병이나 당번병은 점잖은 공식 용어이고, 군대에서는 '따까리'라고 불렀다. 자신을 하찮게 정의해 버리면 오히려 마음이 편해지기 때문에 자조적인 표현도 마다하지 않았던 것 같다.

 

전방에서 근무하는 장교는 가족과 함께 생활하지 못하고 군 관사에서 출퇴근했다. 아이들 교육 문제 때문에 부인은 도시에 따로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영관급이 되면 사병이 나가서 뒷바라지를 한다. 우리 사무실은 장교 둘, 하사관 둘, 사병 세 명으로 구성되어 단출했다. 사병 중 한 명이 따까리로 나가면 남은 두 사람에게 업무가 과중되는 문제가 있었다. 그래서 따까리는 낮에는 사무실 일을 보고 오후 늦게 관사로 나가서 참모의 저녁 준비를 해야 했다.

 

따까리가 좋은 점도 있었다. 따까리로 나가면 귀찮은 저녁 점호도 없고, 야간 보초도 안 서도 되었다. 저녁 이후에는 자유로운 신분이 되는 것이다. 관사에서는 사복으로 갈아입고 참모 외에는 누구의 간섭을 받지 않아도 되었다. 잠도 관사에서 자니 내무반 막사에 비하면 호텔과 마찬가지였다. 참모의 저녁과 아침을 차리고, 설거지를 한 뒤 참모와 같이 통근 버스로 부대에 나갔다.

 

졸병은 따까리로 나갈 수가 없었다. 영내에서 할 일이 워낙 많기 때문이다. 고참이 되면 따까리로 나가려 하지 않았다. 전역을 앞둔 고참은 부대에 있는 게 훨씬 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병쯤 되면 따까리로 나갈 순서가 되었다. 약 1년 정도씩 교대로 역할을 맡는 것이다. 나도 군대 생활을 중간쯤 했을 때 따까리 생활을 했다.

 

따까리는 우선 참모를 잘 만나야 한다. 인간성이 나쁜 사람을 만나면 그보다 더한 고생이 없다. 더러워서 못 해 먹겠다는 불평을 다른 동료한테서는 자주 들었다. 내가 따까리를 할 때 우리 참모는 성격이 무척 걸걸한 분이었다. 비위 맞추기가 까다롭긴 했으나 특별한 결점이 있지는 않았다. 동작이 느려서 혼난 적이 여러 번 있었지만, 그런대로 무난하게 지낼 수 있었다.

 

참모가 회식으로 늦게 들어오면 새벽 한두 시까지 기다리기도 하고, 갑자기 밤중에 비상이 걸리면 부리나케 시중을 들어야 했지만 그런 경우가 자주 있지는 않았다. 저녁을 먹고 설거지까지 하고 나면 완전한 내 자유시간이었다. 그 주체하지 못하는 남는 시간에 책을 많이 읽었다. 책 한 권을 온전히 필사하기도 했다. 내 일생에서 책을 가장 열심히 읽은 시기가 그때였다. 다른 전우와 비교하면 편하게 군대 생활을 한 셈이다.

 

어쩌면 따까리가 내 체질에 맞았다. 타율적인 분위기에는 알레르기성 체질이라 규율에 따라 움직이는 내무반을 벗어난다는 자체가 좋았다. 한 사람의 비위 맞추는 일은 능히 감내할 수 있었다. 몇 시간일 망정이지만 자유 시간이 주어진다. 나에게 따까리 생활의 자유는 답답한 군대 생활에서 한 줄기 산소와 같았다. 나는 그렇게 못 살겠다고, 따까리를 기피하는 사병도 다른 부서에는 많았다.

 

사모님은 격주 정도로 주말에 들렀다. 성격이 조용하고 말이 없는 분이었다. 올 때마다 밑반찬을 하나 가득 싸 왔다. 나는 반찬 만들 일은 별로 없었다. 밥하고 청소 잘 하는 게 제일 큰일이었다. 가끔 시장에서 콩나물을 사와 국을 끓이고 된장찌개 정도는 만들었다. 따가리 시절에 사모님을 도와 김치를 처음 담가봤다. 몇 포기였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김장 김치를 관사에서 했다. 그 당시는 참모나 사모님이 한참 어른 같이 보였는데 그래봤자 30대 중후반 정도였을 것이다. 유치원 다닐 나이의 아이가 아빠를 만나러 따라오기도 했다.

 

엄마 따라 아이가 오는 날은 아이와 놀아주는 것도 내 일이었다. 두 사람은 관사에 두고 아이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관사에 이웃한 시골 마을은 군인을 상대로 하는 가게가 많았다. 군것질을 하며 아이와 노는 게 재미있었지만, 되도록 동료와는 만나고 싶지 않았다. 홍수환 선수가 카라스키야와 붙어 4전5기라는 기적의 승리를 한 경기를 아이와 함께 다방에서 TV 중계로 보았다. 일요일 오전이었다고 기억한다. 인터넷으로 찾아보니 그날이 1977년 11월 27일이었다. 그 아이의 나이도 지금은 40대 중반쯤 되었을 것이다.

 

 

사무실 앞에서 제대를 앞둔 선임과 찍은 사진이다. 아마 이때가 따까리 생활 막바지였을 것이다. 선임이 제대한 뒤에 바로 사무실로 복귀했다. 선임인 박 병장은 고향이 충북 영동이었다. 고향 자랑을 많이 했고, 멋을 아는 사람이었다. 윗사람에게는 예의 바르고, 아랫사람한테는 따스하게 대해줘서 인기가 많았다. 우리 사무실은 사단 본부에서도 제일 높은 곳, 명당자리에 있었다. 봄이면 송홧가루가 책상 위에 노랗게 내려앉았다.

 

이번에 드러난 공관병 갑질 사건은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공관병에게 부치던 전을 집어던지는 등 대장 부부가 같이 갑질을 한 행위는 내가 복무했던 70년대에도 보기 힘들었다. 전반적인 군대의 풍토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공관병 제도도 개선한다는 소식이다.

 

시대는 변하고 있다. 옛날에는 사병(士兵)을 장교의 사병(私兵)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었다. 온갖 잔심부름을 시켜도 됐다. 사병 입장에서는 장교의 개인 일을 도와주는 것이 부대 훈련보다 편했기 때문에 마땅하다는 여부를 떠나 당연히 받아들였다. 사역 지원자를 모집하면 늘 경쟁이 되었다.

 

사단에 와서 후반기 훈련을 받을 때 어느 장교의 집수리에 이틀 동안 동원된 적이 있었다. 잡부가 하는 일이니 힘만 쓸 줄 알면 되었다. 무슨 일을 하든 밖에 나와 민간인과 같이 있으면 우선 숨통이 트였다. 군대와 사회는 공기도 다르다고 농담을 했다. 그때 점심으로 먹었던 짜장면 맛은 아직도 잊지 못하겠다. 부정직한 노역이라는 생각이 들었을지 몰라도 그 맛 앞에서는 힘을 쓸 수 없었다.

 

졸병이었을 때는 테니스 볼보이로 나가는 게 그렇게 좋았다. 사단에서 근무하니까 높으신 분들이 가끔 테니스를 쳤다. 그런 날은 테니스병이 볼보이를 구하러 부대로 내려왔다. 테니스를 한 경험이 있는 내가 뽑힐 확률이 높았다. 졸병 일에 비하면 테니스장 볼보이는 거저먹는 놀이였다. 게임을 구경하면서 공만 잘 주워다 주면 됐다. 경기가 끝나면 높으신 분들이 먹다 남긴 간식도 우리한테 돌아왔다. 180도로 지위가 바뀐 내 처지가 서럽긴 했지만.

 

남자에게 군대 경험은 특별하다. 세월이 이만큼 흘렀으니 많은 부분이 감미롭게 추억되지만, 군대 3년이 남자들의 무의식에 새긴 상채기는 결코 작지 않다. 내 경우도 가위눌리는 군대 꿈에서 벗어난 게 얼마 되지 않는다. 비록 반쪽이긴 했지만 1년 가까이 되는 당번병 생활은 나에게는 특별한 경험이었다. 이런저런 인연으로 만났던 사람들도 역시 소중하다. 가장 혈기왕성했던 시절을 공유했던 그 사람들은 다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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