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가족 / 진은영

샌. 2010. 11. 3. 12:38

밖에서

그토록 빛나고 아름다운 것

집에만 가져가면

꽃들이

화분이


다 죽었다


- 가족 / 진은영

독신으로 사는 사람이 부러울 때가 있다. 혼자라면 가족으로부터 아무 구속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살 수 있기 때문이다. 혼자 사는 사람이 들으면 배부른 소리라고 할지 모르지만 결혼한 사람 입장에서는 좋아하는 일을 하고 싶어도 가족 때문에 포기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결혼은 의무와 책임을 동반한다. 죽을 때까지 그 굴레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가정이 따스한 보금자리만은 아니다. 가족이기 때문에 말 못하고 견뎌야 하는 아픔이 있다. 그래서 서로 주고받는 상처는 더 쓰리고 아프다. 유아기 때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로 인해 평생을 힘들어하는 사람들도 많다. 부모자식 사이에 또는 형제 사이에 갈등과 다툼이 끊이지 않는다. 가족만큼 애증이 교차하는 관계도 없다. 오죽하면 가정을 제 2의 수도원이라고 하겠는가. 그만큼 참고 인내해야 하는 고행의 장소라는 말이다.


시는 짧지만 시인이 말하려는 내용은 굉장히 중요하다. 가족은 가정이라는 한 울타리 안에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서로 관계가 맺어져 있지만 과연 그러한가? 거실에 걸린 가족사진처럼 밝고 환하기만 한 걸까? 밖에서 싱싱하게 자라는 화초를 집안에 들여놓는 순간 시들해진다. 사랑한다고 물을 너무 많이 주기도 하고, 잘 자라지 않는다고 자꾸 들쑤시기 때문이다. 예쁜 꽃을 보려는 욕심에 꽃은 시들고 죽는다.


밖에서는 능력 있는 남편인데 집에서는 고개 숙인 남자다. 애교 있다는 칭찬을 듣는 아내지만 집에서는 잔소리꾼이다. 밖에서는 제 할 일 다 하는 자식인데 집에서는 철딱서니 없다고 구박이다. 왜 다들 집에서는 시든 꽃이 될까? 너무 잘 알아서 탈일까? 잘 아는 것 같지만 실은 서로를 너무 모르는 것이 가족이다. 가족이 서로를 보는 시야는 의외로 좁다. 그것이 가족이 가지는 미시적 한계다.


시인은 ‘다 죽었다’고 선언한다. 밖에서 그토록 빛나고 아름다운 것이 집에만 가져가면 다 죽었다고 한다. 설마 그렇기야 하겠는가. 갈등과 아픔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가족만이 모든 걸 용서하고 눈물로 껴안아줄 수 있다. 아파서 힘든 밤에 뜬눈으로 옆을 지키는 사람도 가족이다. 세상의 험한 비바람을 막아주는 가정의 따스한 온기가 없다면 사람은 더 쉽게 절망에 떨어질 것이다. 혼자가 되어본 사람이라면 가족의 소중함을 절절이 느낄 것이다. 늘 옆에 있으니 그 귀함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지 모른다.


사람들은 티격태격 싸우면서도 작은 집 안에서 알콩달콩 잘 살아간다. 가정은 작은 용광로다. 미움, 시기, 질투, 사랑, 연민, 우애 등이 하나로 녹아서 반짝이는 정금이 나오기도 한다. 젊은이들은 이성의 눈길을 끌려는 영원하고도 매혹적인 춤을 추고 있다. 선사시대부터 지금까지 변하지 않는 모습이다. 그러나 결혼과 가정의 어두운 속내를 알아차리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을 것이다. 가정의 숨은 의미를, 그 빛과 그림자를, 이 시를 통해 이모저모 생각하게 된다.


비슷한 시 한 편이 있다.


벤자민과 소철과 관음죽

송사리와 금붕어와 올챙이와 개미와 방아깨비와 잠자리

장미와 안개꽃과 튤립과 국화

우리 집에 와서 다 죽었다


죽음에 대한 관찰일기를 쓰며

죽음을 신기해하는 아이는 꼬박꼬박 키가 자랐고

죽음의 처참함을 바라보며 커피를 마시고

음악을 듣는 아내는 화장술이 늘어가는 삼십대가 되었다


바람도 태양도 푸른 박테리아도

희망도 절망도 욕망도 끈질긴 유혹도

우리 집에 와서 다 죽었다


어머니한테서 전화가 왔다

별일 없냐

별일 없어요


행복이란 이런 것

죽음 곁에서

능청스러운 것

죽음을 집 안으로 가득 끌어들이는 것


어머니도 예수님도

귀머거리 시인도

우리 집에 와서 다 죽었다


- 우리 집에 와서 다 죽었다 / 유홍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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