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행복 / 심재휘

샌. 2022. 3. 15. 08:58

집을 나서는 아들에게

보람찬 하루라고 말했지

 

창밖은 봄볕이 묽도록 맑고

그 속으로 피어오르는 3월처럼 흔들리며

가물거리며 멀어지는 스무 살 뒷모습에 대고

아니다 아니다 후회했지

 

매일이 보람차다면

힘겨워 살 수 있나

 

행복도 무거워질 때 있으니

 

맹물 마시듯

의미 없는 날도 있어야지

잘 살려고 애쓰지 않는 날도 있어야지

 

- 행복 / 심재휘

 

 

강릉에서 한 달 살기를 하는 지인이 있다. 하루가 멀다하고 새로운 도시에서 즐겁게 지내는 모습을 보내온다. 강릉에는 바다 전망이 좋은 카페가 참 많은 것 같다. 지인은 인생이란 모름지기 재미있고 행복해야 한다고 믿고 있다. 약간은 질투가 나서일까, 나는 이 시를 차용하여 속으로 중얼거린다. "매일이 보람 있고 행복하다면 그 역시 힘겹지 않겠나. 무미건조하고 지루한 날도 있어야지."

 

내가 만약 낯선 땅에 가서 한 달 살기를 한다면 일부러라도 한껏 지루해 보고 싶다. 내 집에서는 지루할 겨를이 없다. 할 일의 여부를 떠나 도무지 지루해질 마음의 준비가 안 되어 있다. 집을 떠나면 혹 지루할 기회가 생길까. 밤낮으로 들려오는 지루한 파도소리에 귀를 맡기고, 늘 비슷한 구름이 오가는 하늘을 지루하게 바라본다면 마음은 그만큼 가벼워질까. '보람'이나 '의미'라는 짐을 훌훌 벗어던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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