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임사선(臨死船) / 다니카와 슌타로

샌. 2022. 3. 24. 10:51

모르는 사이에 저승행 연락선을 타고 있었다

제법 붐비고 있다

늙은이가 많지만 젊은 사람도 있다

놀랍게도 아기의 모습도 드문드문 보인다

혼자 있는 사람이 대부분이지만 겁에 질린 것처럼 서로 붙어 있는 남녀도 있다

 

저승에 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고 들었는데

이대로 이 배 위에서 흔들리고 있기만 하면 된다면 너무 편하다

하고 생각했으나 왠지 허전하다

정말 그렇게 생각했는지 잘 모른다

죽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마음이란 원래 그런 것이었는지

 

문득 위를 올려다봤더니 여기에도 하늘이 있었다

해가 지기 시작한 초가을의 늦은 오후의 빛이다

바랜 청색을 아련한 주황색이 베일처럼 덮어 있다

깰 것 같으면서도 깨지 않는 꿈 같다

배는 낮고 고풍스러운 기관음을 내고 달린다

저승이 아직 멀었나

 

옆에서 노인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이게 저승과의 사이에 있는 강인가요?

생각보다 훨씬 크네요. 바다 같군"

하긴 건너편 강기슭이 안 보인다

그런데 수평선도 안 보이는 것은

하늘과 물이 한 장의 천처럼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어, 어디선지 목소리가 들린다

"여보, 여보!" 한다

울고 있는 모양이다

귀에 익은 소리다 생각했더니 마누라 목소리였다

이상하게 요염해서

안고 싶어졌다 몸은 이제 없을 텐데

 

두리번거려서 마누라를 찾았다

바로 옆에 있었지만 모습은 귀신처럼 희미하다

손을 잡아봐도 아무런 느낌이 없다

대신 그녀의 마음은 손바닥을 보듯이 훤히 알 수 있다

진심으로 슬퍼하는 것은 좋은데

생명보험이라는 타산이 작용하는 게 마음에 걸린다

 

마누라 울음소리를 들어도 죽었다는 실감이 없고

살아 있었을 때의 연장 같다

하긴 생전에도

살아 있다는 느낌이 별로 없었다

그때부터 벌써 죽어가고 있었던 걸까?

뚜 하고 멍청한 소리로 기적이 울렸다

 

새 떼가 배 위에서 원형을 이루며 춤춘다

그들은 아직 고이 잠들지 못하는 영혼들이다

옛날에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

새가 되어버리면

먼저 죽은 친척이나 친구들과 이야기를 못하잖아

아니면 여기서 사람의 말은 쓸모가 없나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한 마리가 하늘 위에서 나를 불렀다

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마음이 울려든다

내 동갑으로 다섯 살 때 죽은 이웃집 여자아이다

"엄마 아직 안 와

여기 꽃들은 전혀 안 죽어"

 

이것저것 물어보고 싶은데

상대방이 다섯 살 때 그대로라 곤란하다

이 배는 어디고 가?라고 해도

만날 뭐 해? 하고 해도

밤에는 별이 보여?라고 해도

'몰라'라는 마음이 어렴풋이 전해질 뿐

 

뒤늦게 공연히 슬퍼지기 시작했다

몸부림치는 슬픔이 아니다

좋아하는 사람이나 물건과 헤어졌을 텐데

죽기 전까지는 괴롭고 힘겹던 단단한 응어리가

지금 차차 풀리고 있다

이게 끝인지 시작인지

 

향기 좋다 잊을 수 없는 향기가

마음속에 곧장 들어온다

예전에 바이올리니스트인 애인이 있었다

끝난 후에 눈앞에서 연주해 주었다 알몸으로

가늘게 구부러지는 바이올린 소리와 그녀의 향기가

뒤범벅이 되어 피부에 스며들었다

 

까닭도 모르게 그때

나에게 몸만이 아니라 영혼도 있음을 느꼈다

돌연 스쿠루가 역전하는 소리와 함께 배가 멈추었다

어디선가 사람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다 먼지투성이의 야전복 차림이다

아직 수류탄을 손에 든 놈까지 있다

 

한 놈이 느닷없이 웃으며 묻는다

우리 죽은 겁니까?

왠지 바람이 몸속을 부는 것처럼 시원해요

그러면서 동료들과 농담을 주고받는데

그 웃음소리를 어머니 자궁 속에서 들은 것 같다

짙은 안개가 소용돌이치고 배는 다시 덜거덕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상하게도 그 배가 내려다보이고

영화의 한 장면처럼 오버랩해서 얼굴이 되었다

창백하고 다박수염이 난 내 얼굴이다

거울로 눈에 익은 얼굴인데 아무래도 남 같다

보고 있는 나도 진짜 나인지 분명치 않다

웃어넘기려고 하면 얼굴이 굳어진다

 

내가 경험하는데도

남의 일 같은 이 느낌, 확실히 그전에도 있었다

고등학생 때 죽으려고 학교 옥상에 서 있었다

한 걸음만 앞으로 나가면 나를 지워버릴 수 있다

그러나 정말 지울 수 있을까?

내가 만화의 주인공처럼 느껴져서 계단을 내려왔다

 

술을 마시면서 그런 것을 토론한 적도 있었다

다들 젊어서 죽음은 아직 농담 같았다

몸이 없어진 다음에 남는 '나'란 뭐냐?

미와가 말하자 오쿠무라가 의식이라고 대답하고

쇼지가 뇌가 없어지면 의식도 없겠지,라고 말했고

데이가 어쨌든 죽으면 알 거라고 말했다

 

갑자기 무언가가 나를 갑판 위에서 빨아냈다

그러자 가슴이 죄어드는 것처럼 아파졌다

강렬한 빛에 눈이 아찔했다 병원의 하얀 침대 위다

"여보, 여보!" 또 마누라다

내버려 둬,라고 말하고 싶은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그래도 싸구려 향수 냄새는 무척 반갑다

 

내가 숨을 쉬고 있음을 알았다

조금 전까지 아프지도 괴롭지도 않았는데

염라대왕에게 시달리는 것처럼

온몸이 비명을 지른다

다시 몸속으로 돌아와버렸나

기쁜지 괴로운지 모르겠다

 

멀리서 희미한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산맥 능선 따라 느릿하게 흐르고

누구한테서 온 소식처럼 여기까지 온다

심한 아픔 속에 음악이 물처럼 흘러온다

어릴 때 늘 들었던 것 같기도 하고

지금 처음 듣는 것 같기도 하다

 

아아 너무 미안했다

아무 맥락 없이 간절한 마음이 벼락처럼 생겼다

누구한테 무엇을 한 것이 기억이 난 게 아니지만

무턱대고 사과하고 싶었다

사과하지 않으면 죽지 못함을 알았다

어떡하면 되는지 그 방법을 생각해야겠다

 

선율이 보이지 않는 실처럼 꿰매어 잇는 게

이승일까 저승일까

여기가 어딘지 이제 모르겠다

어느덧 아픔이 가시고 외로움만이 남았다

여기서 어디로 갈 수 있는지 없는지

음악에 의지하면서 걸어갈 수밖에

 

- 임사선(臨死船) / 다니카와 슌타로

 

 

동서양을 막론하고 신화와 전설에는 이승과 저승을 연결하는 강이 등장한다. 망자는 이 강을 건너서 저 세상으로 넘어간다. 불교의 삼도천(三途川), 기독교의 요단강,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망각의 강인 레테 등이다. 인류 기억의 원형에는 강과 죽음이 같은 이미지로 연결되어 있는 것 같다. 흐르는 강물을 너무 오래 바라보면 괜히 우울해지는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이 시는 아마 시인이 직접 경험한 임사체험이 아닌가 싶다. 너무 사실적이어서 창작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병원에서 죽는 순간 시인은 저승행 연락선을 타고 있다. 임사선(臨死船)이라고 이름 붙인 게 재미있다. 배를 타고 가면서 죽은 자 역시 여러 경험을 한다. 다섯 살 때 죽은 이웃집 여자아이를 만나고, 젊었을 때 친구들과 죽음에 대해 한 토론도 떠올린다. 마누라의 울음소리도 듣는다. 고통이나 괴로움은 없지만 잔잔한 슬픔이 밀려온다. 그러다가 시인은 어느 순간 갑판에서 들려올려지고 의식이 깨어나 병원으로 돌아온다. 다시 비명을 지른다.

 

이렇듯 죽음에서 돌아온 사람을 보면 공통적인 임사체험이 있다. 유체이탈이 되어 시공을 자유롭게 넘나든다든지, 터널을 빠져나가거나 밝은 빛을 만나는 등의 체험이다. 이때 해방과 환희를 느낀다고 한다. 이승에서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 고통스럽지, 죽음 자체는 무섭지도 두렵지도 않다. 또한 임사체험을 하고 죽음에서 돌아온 사람들은 가치관이 변할 정도로 인생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다고 한다.

 

이승과 저승의 경계에서는 삶과 죽음의 구분이 흐릿해진다. 삶이 죽음이고, 죽음이 곧 삶인 그곳이 존재의 본질이 아닐까. 물리학에서 빛을 입자냐 파동이냐가 아니라, 입자면서 동시에 파동이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하다. 시인은 마지막에 선율, 음악이라는 표현을 썼다. 삶도 죽음도 사라진 자리에는 선율에 맞춰 흔들리는 가녀린 춤이 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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