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고독의 매뉴얼

샌. 2022. 8. 30. 12:18

이 책의 절반 정도는 카페에서 읽었다. 카페에서 책 읽기는 색다른 경험이었다. 카페에서 업무를 보고 공부를 하는 젊은이들은 생활 소음이 일에 집중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한다. 나는 조용하지 않으면 몰두할 수 없다. 늘 조용한 데서 책을 보는 게 습관이 되었기 때문이다. 왔다갔다 하는 사람들이며 옆자리 손님들의 대화 소리까지 들리는 마당에 책에 온전히 집중할 수 없었다.

 

<고독의 매뉴얼>은 정신분석학자인 백상현 선생이 쓴 책이다. 부제가 '라깡, 바디우, 일상의 윤리학'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를 근본 문제를 다루고 있다.

 

지은이는 서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제 모두가 삶의 허망함에 관하여 알고 있으며, 그것을 잊기 위해 가족을, 연인을, 동지를, 술과 텔레비전을, 때로는 애꿎은 신을 욕망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이 모든 것을 알면서도 헛된 욕망을 멈추자 않는 이유는 삶이 전개될 수 있는 다른 길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또한 잘 알기 때문이다."

 

라깡이 '환상의 횡단'으로 표현한 것처럼 우리를 지배하는 세계의 환상에 사로잡히지 않으면서 그것을 가로지르며 나아가는 소멸에 대해 얘기한다. 우리의 앎에 의해 건설된 선명한 세계의 이미지로부터 어떻게 빠져나올 수 있을까.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는 고정관념의 목소리에 어떻게 저항할 수 있을까.

 

책을 읽으며 체크해 두었던 몇 부분을 옮긴다.

 

- 세계는 완고하며 사건에 저항한다. 그것은 사건을 금지한다. 존재는 존속을 목적으로 할 뿐 변화를, 스스로의 소멸을 목적으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바디우는 이것을 "존재는 사건을 금지한다"라고 표현한다. 존재의 질서는 쾌락-현실원칙의 질서이며, 우리 인간의 사유의 일반적인 경향은 이러한 존재 질서를 유지하도록 하는 '구성주의적 사유'에 길들여져 있다. 자신의 삶에서 주인이 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언제나 이미 존재하는 지식과 고정관념의 틀에 의존하는 경향을 따르고, 결국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한계에 갇힌다.

 

- 한편, 삶의 진정한 변화의 가능성을 가로막는 고정관념은 우리의 존재가 다양성의 파도 속으로 떠내려가지 않도록 지켜주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가 자신을 '나'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주입된 고정관념 덕분이다. 역설적이게도 우리의 존재는 우리 자신에 대한 이러한 편견으로 보호받는다. 편견, 미리 판단된 '나'에 대한 지식은 나의 자아가 개방되어 흩어지는 위험으로부터 나를 방어하고, 한계 짓는다. 고정관념과 편견은 이렇게 말한다. "자! 여기까지가 너다. 여기까지의 한계 안에서 살도록 해라."

 

- 우리 자신의 소소한 일상은 거창한 철학적 견해도, 매혹적인 문학의 은유도 끼어들 수 없게 빡빡하다. 소란스런 부대낌이 있고, 살가움이 있고, 짧은 환멸들도 있다. 그곳에서 우리는 혁명적 정치의 투사도, 예술가도, 낭만적 사랑의 연인도, 천재적 과학자도 아니다. 차라리 거창한 비극이었으면 좋았을 우리의 삶은, 잘게 갈린 스테이크처럼 맛을 알 수 없는 밋밋함으로 가득하다. 그러나 우리는 더 나아가야 하고 조금만 더 욕망해야 한다. 나의 자아를, 세계의 테두리이기도 한 그것을 초과하는 욕망, 일상의 소소함이 얼마나 큰 비극인지를 간파하도록 우리를 몰아붙이는 바로 그 욕망.

 

- 고독해져야 한다. 혼자가 되어야만 한다. 세계와 단절하지 않고서는 세계의 지배로부터, 고정관념의 함정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없다. 고독의 긴장만이 사건의 유령이 출현하는 것을 알아볼 수 있는 눈을 갖게 한다. 그것은 고정관념의 지식 체계가 우리의 시각적 쾌락을 위해 미끼로 던지는 이미지들을 보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고정관념의 스크린 너머를 보는 눈이며, 그곳에 숨겨진 텅 빈 공백을 응시하는 눈이다. 맹인들의 눈빛이 그에 가깝다. 그들의 응시는 누구도 볼 수 없는 '볼 수 없음'을 본다. 그들은 '무'를 보고 있으므로 고독하다. 고독의 절차는 이러한 응시의 고립을 창조적 사건의 시작으로 전환시키는 욕망에 의지한다. 물론 우리 스스로는 그러한 절차에서 무엇도 주도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단지 고독해지는 것이며, 우리를 매혹시킬 사건의 출현을 기다리는 것뿐이니까 말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주체란 없다. 스스로 무언가를 이룩할 수 있는 개인의 의지와 같은 신화는 없다. 그래서 고독을 선택하자는 것이다.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비-선택의 상태에 대한 선택, 이 역설적 (비)선택이 바로 고독이다.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음으로써 발생하는 의지의 공백에 대한 의지, 그것이 고독이다. 진리에 관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이면서도 동시에 최대한의 것은 마음의 문을 잠그는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마음의 문을 잠그지 않는다면 마음은 미래에로 열리지 않는다.

 

- 그렇다고 고독이 타인에 대한 배제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고독은 타인에 대한 사랑을 더욱 강하게 만들어준다. 고독은 타인의 현재 상태가 아닌 존재 또는 존재의 초과를, 공백인 그것을 욕망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고독은 고정관념이 부여하는 타인들에 대한 편견을 정지시킴으로써 주어진 그대로의 그들의 모습이 아니라 그들의 미래의 가능한 모습을 사랑할 수 있도록 만든다. 고독은 타인의 이미지로부터 물러나는 것을 통해 타인의 존재로, 순수한 가능성으로 다가서는 것이다. 따라서 고독한 자들의 공동체는 고독이라는 단어가 상상할 수 없었던 역설적 공동체를 구성할 것이다. 고독한 자들의 사회는 서로에 대한 가치판단으로 고정되는 사회가 아니라, 서로의 미래에 대해서, 그 가능성에 대해서 욕망하는 사회이다. 고독의 공동체는 인간에 대해서 규정된 모든 편견으로부터 마음을 닫는 공동체이며, 도래할 규정, 언제나 새롭게 창조되어야 할 인간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욕망하는 공동체이다.

 

-같은 이야기를 연인들의 사랑에 관해서도 말할 수 있다. 연인들 사이의 사랑은 오직 고독속에서만 완성된다고 말이다. 사랑은 그것 자체의 환영이 우리를 사로잡았기 때문에 시작되었지만, 그러한 환영으로부터 물러서는 것에서 완성된다. 사랑은 두 명의 존재가 하나가 될 수 있다는 환영 속에서 가장 충만한 쾌락을 선물하지만, 바로 그러한 사실로 인해서 환멸이 약속된 것이기도 하다. 사랑의 절차는 결코 둘을 하나로 만들 수 없다. 고독 속에서 사랑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불가능성에 대한 인식을 가능하게 만든다. 내 앞의 당신은 결코 내가 생각한 그녀가 아니며, 그러해서도 안 된다. 당신은 나의 욕망의 거울이기를 멈추어야 한다. 둘 사이에 존재하는 명백한 국경을 인정하는 것, 그리하여 울타리 이편의 고독을 받아들이는 것, 울타리 저편의 낯섦을 욕망하는 것, 그것이 사랑이다.

 

- 마지막으로 고독의 절차는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을 의미할 것이다. 자신의 주어진 조건들에 대한 사랑이 아닌, 알려지지 않은 가능성에 대한 사랑의 절차, 그것은 어떻게 나르시스적 자아의 한계가 역설적으로 돌파될 수 있는지를 알려주는 절차이다. 고독의 절차는 나의 자아라는 괴물을 숨 쉬게 하는 외부로부터의 공기 유입을 차단함으로써 존재를 진공의 상태로 만드는 기술이며, 이때 질식당한 자아는 텅 빈 자리를 남기고 소멸한다. 고독의 절차는 바로 그 텅 빈 자리를 유지하는 욕망의 기술이다. 텅 빈 자리에 어느덧 사건의 유령이 들어와 떠돌 수 있도록 소량의 환상만을 허용하는 기술, 그것은 소멸을 애도하는 기술인 동시에, 그러한 애도를 축제로 뒤집는 기술이다. 매번 새로 시작되어야 하는 세계를 위한 고독하지만 어쨌든 축제인 그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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