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동안 여권 없이 지내다가 이번에 다시 신청했다. 겨울에 손주와 앙코르와트에 갈 계획을 세웠기 때문이다. 아내도 여권을 새로 만들어야 했기에 같이 사진관에 들렀다. 처음에는 집에서 사진을 찍어 인터넷으로 신청해 봤으나 두 번이나 반려를 당했다. 내 실력으로는 여권 사진 기준에 맞추기가 어려워서 헛심만 쓰다가 포기했다.
사진을 찍은 뒤 젊은 사장이 컴퓨터 앞에서 클릭 몇 번을 하니 금방 깔끔한 사진이 나왔다. 옛날에는 필름 현상과 인화 과정을 거친 뒤 사진을 찾자면 며칠이 걸렸다. 사진을 다루는 데는 정교한 기술이 필요했다. 디지털 처리를 하는 지금은 모든 것을 프로그램이 처리해 준다. 5분 만에 보정까지 마친 따끈따끈한 사진을 받아볼 수 있다. 좋은(?) 세상이 되었다.
사진에 만족한 아내는 뜬금없이 영정사진으로 써도 좋겠다고 말했다. 나는 별 대꾸를 못하고 피식 웃기만 했다. "요즘은 영정사진이란 말은 안 쓰고 대신 장수사진이라고 합니다. 영정이라는 말이 좀 그렇잖아요." 젊은 사장이 돌아보며 말했다. "그럴 수도 있겠네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마음 한 편이 불편했다. 사회 분위기가 너무 죽음을 회피하면서 아예 몰아내려 하기 때문이었다. 죽음이 연상된다는 이유로 영정이라는 말도 쓰기를 꺼려하는 것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든다. 오로지 장수만이 바람직한 지는 의문이다.
과거에는 자식이 부모 생전에 수의를 해 주는 게 효도 중 하나였다. 요사이 이런 말을 하면 재수 없는 소리 말라면서 핀잔을 받을 것이다. 저놈들이 내가 빨리 죽도록 바라는 게 아니냐, 라고 부모도 서운해할지 모른다. 옛날에는 죽음이 늘 일상에 있었다. 평균수명이 짧은 사회에서는 노인만 아니라 어린아이도 죽음에서 예외가 아니었다. 내 어린 시절을 돌아봐도 잦은 상여 행렬과 마을 입구에 있어서 매일 지나치던 곳집이 떠오른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죽음에 노출되어 살았다. 하지만 현대는 죽음을 추방했다. 현대인은 의식적으로 죽음을 외면한다. 누구나 자신만은 천년만년 끄떡없을 듯이 살아간다. 어느 쪽이 옳을까. 과거의 삶이 훨씬 더 인간 실존 상황에 가깝지 않을까.
영정(影幀)은 제사나 장례를 지낼 때 위패 대신 쓰는, 얼굴을 그린 족자다. 사진술이 발명되고 나서는 그림 대신 사진으로 대체되어 사용되어 왔다. 지금은 비디오 시대이니만큼 영상으로 바뀐들 이상할 것 같지 않다. 누군가 실험적으로 사용해 보면 어떨까. 영정사진이 있는 자리에 모니터가 놓이고 고인의 생전 모습이 동영상으로 나온다. 엄숙한 표정의 사진보다는 고인이 더 친근하게 느껴지지 않을까. 비디오 아트의 선구자인 백남준처럼 영정영상을 최초로 시도해 보는 것도 의미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여권을 만들기 위해 사진을 찍는 과정에서 든 두 가지 단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