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앓던 이가 빠지다

샌. 2024. 2. 13. 16:53

열 달 전부터 앞니 하나가 시큼거렸다. 신경이 쓰였지만 그럭저럭 견딜 만한 정도여서 치과에 가지 않고 버티며 지냈다. 병원 신세를 지지 않고도 저절로 낫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었다. 한때는 잊어버릴 정도로 상태가 좋아지기도 했다.

 

이번 설날에 조상님 산소를 찾아 인사를 올리고 음복을 하는데 느낌이 이상했다. 말썽을 부리던 앞니가 끝을 맞은 것이다. 손가락으로 당기니 쑥 하고 빠져나왔다. 저절로 수명을 다하며 자연사한 셈이었다.

 

이 정도 되기까지 참고 견뎠으니 어지간히 미련하다는 핀잔을 들었다. 진즉에 병원에 갔다면 빠른 조치가 가능하고 고생도 덜 했을 것이라는 말이었다. 워낙 게으르고 병원에 가기 싫어하는 성격이라 자업자득이라 할 수 있다. 허나 병원에 간들 뽑는 것 외에 다른 방도가 없었을 테니 약간의 시차만 있을 뿐 결과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설 연휴가 끝나고 치과에 갔더니 주변 이를 포함해서 한 바탕 대공사를 해야 할 정도로 이빨이 망가져 있었다. 원장 선생님과 상의한 결과 빠진 이빨은 뼈이식을 해서 보강하고, 앞니 네 개는 브릿지, 어금니는 임플란트를 하는 것으로 합의를 봤다. 어디 이것으로 끝이겠는가. 수명을 다한 이빨이 앞으로도 차례차례 등장할 테니 얼마나 더 치과 신세를 지게 될지 모르겠다. 하물며 이빨은 몸의 극히 작은 일부분일 뿐이다.

 

오래 살게 되면 몸의 이곳저곳에서 고장이 난다. 평균수명이 짧았던 옛날에는 적당히 쓰다가 죽으면 되었지만, 장수시대가 된 지금은 쉼없이 보수공사를 해 줘야 하고 병마와 싸워야 한다. 오래 살게 된 업보다. 고향에 갔을 때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안 죽고 또 살아났구나'하고 한숨을 쉰다. 잠자다가 나도 모르게 갔으면 좋을 텐데." 결코 빈말이 아님을 잘 안다. 그나마 어머니는 연세에 비해 정정하신 편이다. 동네에는 병고에 시달리며 힘겹게 살아가는 분들이 여럿 계신다. 요양원이나 요양병원에는 얼마나 많은 노인들이 수용되어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지, 이 모두가 남의 일이 아닌 것이다. "우리도 우짤꼬", 치과에서 돌아와서 아내와 마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앓던 이가 빠지다'는 오래된 근심이나 걱정이 사라진다는 비유적 표현이기도 하다. 설날에 조상님 산소 앞에서 앓던 이가 빠졌으니 조상님의 음덕이라도 입을 수 있으려나, 라고 새해의 바람을 은밀히 가져본다. 그렇다고 '인생의 고(苦)'에서 벗어나리라는 헛된 망상을 품는 것은 아니다. 견디고 버티는 내공이 한 뼘이라고 더 성장하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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