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블로그 20년

샌. 2023. 12. 31. 10:31

2003년 9월 12일에 블로그를 시작했으니 올해로 20년이 된다. 막상 해당 날짜에는 모르고 지나쳤다가 연말이 되어서야 20년이나 된 걸 알았다. 그때 알았다면 뭔가 기념이라도 했을 텐데.

 

20년 전 무렵은 내 인생의 변곡점이 된 시기였다. 밤골 생활이 벽에 부딪치면서 좌절과 무력감에 시달렸다. 밖으로 눈을 돌리면 차가운 질책뿐이었다. 혼자 있는 시간과 공간이 필요했다. 그때 절박한 심정으로 찾은 것이 블로그였다. 나를 진실로 위로할 사람은 나밖에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블로그는 타인와 소통하기 위해서 개설한 것이 아니었다. 내가 나한테 하는 대화며 독백이었다. 블로그를 하면서 뭔가를 쓴다는 것이 엄청난 위안이 된다는 걸 확인했다. 블로그가 아니었으면 우울증에 걸렸거나 자포자기했을지 모른다. 좀 과장되게 말하면 블로그는 내 생명줄 같은 것이었다. 20년이 된 지금까지 지속하고 있는 원동력이기도 하다.

 

일기를 쓰듯 하루에 한 포스트를 올리겠다고 한 약속도 지켜지고 있다. 사실 나 스스로에게 제일 대견한 바도 이같은 꾸준함이다. 20년을 한결같이 해 왔으니 이젠 충분한 관성이 붙었다 해도 될 것이다. 능력이 된다면 30년, 40년까지도 가 보고 싶다. 2033년이 되면 블로그를 시작한지 30년이 되고, 글 수도 1만 개를 넘을 것이다. 그때가 되면 좀 더 지혜로워져 있지 않을까, 라는 엉뚱한 바람도 가져본다.

 

블로그에 글을 쓰면서 나는 내가 누구인지를 희미하게나마 인지하게 된다. 또한 내가 나를 아끼면서 더 사랑할 수 있게 된다. 사람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는 나의 정체성과도 연관된 사항이다. 인간은 어디서 어떻게 살든지 이 근본 질문을 회피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블로그를 통해 나는 이 질문에 쉼없이 노출된다. 블로그가 주는 고마움 중 하나다.

 

오늘은 2023년의 마지막 날이다. 어제 내린 대설로 온 세상이 하얗다. 한 해를 보내고 맞이하는 절차를 70번 넘게 치르다 보니 해바뀜도 무덤덤하다. 내일이면 내 나이가 몇 살이 되는지 손가락을 짚으며 계산해 봐야 알아채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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