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살이의꿈

혼자서도 잘 놀아요

샌. 2012. 4. 4. 10:47

중고등학교에 다닐 때 새 학년이 되면 담임 선생님께 가정환경조사서를 적어냈다. 그중에서 '취미', '특기', '장래 희망' 같은 걸 적을 때면 항상 고민했던 기억이 난다. 특별한 게 없었던 나로서는 그날 기분에 따라 적당한 말로 둘러댈 수밖에 없었다. '취미'를 적을 때 제일 많은 써먹은 것은 '독서'였다. 그러나 학생으로서 독서가 취미가 될 수 있느냐는 담임 선생님의 핀잔을 들은 뒤로는 그마저도 마음 놓고 적을 수 없었다. '특기'와 '장래 희망'은 더욱 난감했다. 언젠가는 '특기'도 독서로 써넣고는 실소하기도 했다.

지금 나에게 같은 질문을 한다면 이젠 분명히 답할 수 있다. 만약 특기를 묻는다면 '혼자서도 잘 놀기'라고 당당히 대답하겠다. 젊었을 때는 비사교적이고 내성적인 성격이 싫었는데 나이가 들고 은퇴를 하고 나니 지금은 장점이 된다. 언젠가 은둔형 외톨이에 대한 기사를 본 적이 있는데 내 성향과 닮은 데가 많았다. 집에 있는 게 편하고, 밖에 나가면 번잡하고 피곤하다. 사람들과 만나기보다는 혼자 있는 게 좋다. 간섭받기 싫고, 일보다는 쉬는 걸 즐긴다. 이런 은둔파의 특질은 많은 부분이 나와 겹친다. 그렇다고 걱정할 단계까지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은퇴 뒤를 걱정하는데 나는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그냥 집에서 할 일 없이 노는 데는 자신이 있었다. 사람들은 뭔가를 해야 한다고 믿는다. 심지어는 일이 없으면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잃는 것 같아 상심에 빠진다. 성취 중심의 삶을 살아온 사람일수록 더하다. 그러나 나는 그와 반대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보내는 하루가 더 재미있다. 물론 집에 있어도 책이나 TV를 보고, 인터넷을 하고, 집안일도 돕는다. 그러나 대부분이 빈둥거리는 시간이다. 아무래도 나는 게으른 코알라과에 속하는 것 같다.

그저께 서울에 다녀온 게 피곤했는지 어제 낮에는 침대에 누워있다가 깜빡 잠이 들었다. 아내가 깨우는 소리에 눈을 떠보니 무려 세 시간이나 지나 있었다. 꿀맛 같은 잠이었다. 만약 아직도 직장에 나가고 있다면 이런 행복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다. 무엇에 의미를 두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나에게는 지금이 좋다.

은퇴를 앞두고 무슨 준비를 해야 하느냐고 S가 물었을 때, 아무 준비도 필요 없다고 대답했다. 너무 성의 없는 말로 들렸겠지만, 나로서는 솔직한 대답이었다. 거기서 더 보탠다면 혼자서도 잘 노는 능력을 키우라고 말했을 것이다. 내 경험으로 볼 때 혼자서 잘 노는 능력이야말로 퇴직 후에 갖춰야 할 제일의 미덕이다. 물론 쉼 없이 움직이고, 사람들과 어울리고, 적극적으로 취미 활동을 해야 만족하는 사람도 있다. 그 또한 살아가는 취향이겠지만 나에게는 너무 피곤해 보인다. 그런 사람은 아무 일 없는 시간을 무료해하고 못 견딘다. 그보다는 고독과 외로움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 더 상수가 아니겠는가.

나는 어울려 노는 기술은 빵점이지만, 혼자서 노는 기술은 뛰어나다고 자부한다.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성격 탓에 젊었을 때는 열등감에 시달렸는데 이젠 삶의 여백을 즐기는 장점이 되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따분하거나 우울해지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은 요즘 세상에서는 대단한 능력이 아닌가. 인생 후반부로 갈수록 나는 점점 실력을 발휘할 것이다. 지금은 당당하고 자신 있게 말한다. "나는 혼자서도 잘 놀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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