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바둑과 인생

샌. 2012. 4. 3. 10:57

한 달에 한두 번은 바둑을 두러 종로에 있는 기원에 나간다. 회원이 다섯 명인데 오전에 한 판을 두고, 점심 먹고, 오후에 세 판을 둔다. 그리고 저녁을 먹고 헤어진다. 그날은 하루 종일 바둑만 둔다. 방내기라고 해서 지는 사람은 집 차이에 따라 돈을 내야 한다. 최하 3천 원에서 1만2천 원까지 나온다. 3만 원 정도면 두 끼 식사를 포함해서 하루를 잘 놀 수 있다.

다섯 명 중에서는 내 실력이 제일 처진다. 2승2패만 해도 준수한 성적이다. 오기가 생겨서 요즈음은 바둑 TV를 보며 공부를 하지만 진보는 거의 없다. 묘한 건 욕심을 부릴수록 바둑은 더 엉망이 된다는 점이다. 지난 번에는 과하게 공격하다가 도리어 내 돌이 잡히며 만방으로 지기도 했다. 위기십결(圍棋十訣)의 첫번째가 부득탐승(不得貪勝)인데 너무 이기는데만 집착하면 오히려 바둑을 망친다는 경고다.

바둑과 인생은 닮았다고 한다. 정말 그런 것 같다. 한 판의 바둑은 사람의 인생살이와 비슷하다. 인간의 희로애락이 바둑판에서도 펼쳐진다. 잔잔하게 흘러가다 폭풍우가 몰아치기도 하고, 과욕을 부리다가 대마가 몰사한다. 아니면 상대의 실수로 의외의 수확을 얻을 때도 있다. 악수가 변하여 행운의 수가 되기도 하고, 한 번의 선택 잘못으로 대세를 그르치기도 한다. 그러나 어떤 때는 전부를 걸고 모험을 해야 할 때도 있다. 무엇보다 마음을 비우고 순리에 맞는 수를 둬야 한다. 그렇게 되면 결과를 떠나 만족한 한 판의 바둑이 된다. 지고도 흐뭇할 수가 있다. 바둑을 즐기기로 했다면 꼭 이겨야만 하는 건 아니다. 인생도 그와 같지 않을까.

기성(棋聖) 오청원(吳淸源) 선생은 바둑은 '조화(調和)'라고 말했다. 생각할수록 깊은 뜻이 느껴진다. 바둑과 인생과 우주를 관통하는 원리가 '조화'가 아닌가 싶다. 음(陰)과 양(陽)의 조화가 무너지면 세상은 카오스가 된다. 선생은 바둑을 통해 중용의 지혜를 터득하신게 아닐까. 그러나 그런 경지를 느끼기에 나는 아직 너무 하수다. 지금 나에게 바둑이 무어냐고 묻는다면 '바둑은 선택이다.'라고 대답하겠다. 한 수 한 수 둘 때마다 선택의 갈림길에 선다. 어디에 착점하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한 판의 바둑이 나온다.

인생도 선택의 연속이다. 일상의 자질구레한 선택에서부터 인생의 흐름을 좌우할 결정적인 선택도 있다. 여러 가능성 중에서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인생의 길을 걷게 된다. 지나고 나서 복기를 해보면 고비마다 아쉬움이 느껴지는 건 바둑이나 인생이나 마찬가지다. 바둑은 새롭게 다시 둘 수 있지만 인생은 단 한 번밖에 살 수 없는 점이 다르다.

또한 바둑이나 인생이나 미래를 예측하기 어렵다. 우리는 가장 최선으로 보이는 수를 선택할 뿐이다. 그러나 정답이 뭔지는 아무도 모른다. 정석대로 둔다고 바둑의 고수가 되는 것도 아니다. 어떤 때는 요행수가 통하기도 하고, 인생사처럼 전화위복도 다반사다. 물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인생의 여러 갈래 길 중에서 나는 하나를 선택했고 그 길을 걸어간다. 다만 그것뿐이다. 악수인 줄 알면서 돌을 놓는 사람은 없다. 어떤 착점도 그 당시에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이전에 놓았던 돌들이 모여서 지금의 형세를 이루고 있고, 이제 놓는 돌이 미래의 판세를 결정한다. 두고 있는 바둑판을 바라보면 두 사람의 생각의 무늬가 흑백의 돌로 그려져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바둑을 승부로만 본다면 이기고 지는 게 스트레스지만, 즐기면서 바둑을 두면 유쾌한 오락이 될 수 있다. 승부를 초월함이 진정한 고수의 경지다. 인생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무슨 일을 하건 그 일을 즐기는 사람을 당하지는 못한다. 결과보다 과정을 즐기는 사람이 인생의 달인이다. 이래도 한 판의 인생, 저래도 한 판의 인생이라면 선택의 순간에 너무 무거워질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어차피 인생은 내 뜻대로 굴러가지 않는다. 어제 나비스코 골프 대회에서는 마지막 18번 홀에서 30cm 퍼팅을 놓쳐 우승을 상대에게 헌납한 선수가 있었다. 아마추어도 쉽게 넣을 수 있는 걸 돈과 명예 앞에서 너무 어깨에 힘이 들어간 탓이었을 게다. 바둑 한 판에서도 과욕으로 무너지는 게 부지기수인데 하물며 인생에서는 어떠하리. 마음 비우며 산다는 게 말처럼 쉽다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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