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849

이해한다

고등학교 동기 친구가 있다. 편의상 G라고 부르겠다. 우리는 시골에서 같은 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있는 같은 고등학교로 진학했으니 인연이 남다르다. 네 명이 올라왔는데, 둘은 일찍 세상을 뜨고 G와 나만 남았다. 그러니 각별한 사이가 아닐 수 없다. G는 나를 대부로 삼고 가톨릭 영세를 받았으니 종교적 끈으로도 연결되어 있다. 그런데 자주 만나지는 못한다. 소원한 이유는 서로의 가치관이나 정치적 견해가 많이 다르기 때문이다. G는 경상도 출신을 벗어나지 못하는 전형적인 보수이고, 나는 반대편이다. 정치 얘기가 나올 때마다 티격태격한다. 상대를 잘 아니까 조심하기 하지만 얘기를 하다 보면 정치가 화제에 오르지 않을 수가 없다. G는 문재인 대통령을 너무 싫어한다. 몇 년 전에 G의 집에 가서 하룻밤 자..

길위의단상 2022.03.11

한 장의 사진(30)

3월은 새 학년이 시작하는 때다. 학생이나 선생 모두 새로운 만남 앞에서 설렘과 긴장이 공존하는 시기다. 학년이 바뀌면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어려워하는 아이들을 본다. 선생 역시 마찬가지다. 선생 생활을 하면서 일 년 중 제일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시기가 나에게는 3월이었다. 아이들은 봄 방학을 마치고 3월에 개학을 하면 새 반이 편성되고 담임을 배정받는다. 아이들에게는 누가 담임이 될지 제일 관심사일 것이다. 지금 손주를 봐도 어떤 선생님이 담임이 되면 좋겠다고 재잘대는 걸 본다. 요사이는 어떤지 모르지만 옛날에는 3월 첫날 전체 조회가 열린 자리에서 교장선생님이 담임을 발표했다. 이 사진은 40여 년 전인 1979년 - 아니면 1980년일지도 - Y여중에 근무할 때 운동장에 전체 학생이 모인 가운..

길위의단상 2022.03.06

한 장의 사진(29)

돌이켜 보면 내가 예수에 미친(?) 때가 두 번 있었다. 한 번은 20대 때, 또 한 번은 50대 때였다. 50대 때는 예수의 삶을 따르겠다고 서울 아파트를 처분해서 밤골 빈 터에 집을 짓고 세상과 격리되고자 했다. 그 여파로 예기치 못한 격랑에 휩쓸리면서 오랫동안 힘든 시기를 겪었다. 지금의 나 또한 그 사건의 결과물이다. 20대 때는 사범대를 졸업하고 돌연 신학대학원에 입학한 일이었다. 예수를 알고자 하는 열망이 그만큼 강했다. 내가 대학에 다니던 1970년대 초반은 우리나라에서 기독교가 엄청나게 성장하던 때였다. 캠퍼스에서도 뜨거운 성령을 강조하는 열정적인 신앙 분위기가 지배했다. 물리 전공인 우리 과 30명 중에서도 목사가 3명이나 나올 정도였다. 나는 2학년 때 친구의 권유로 교회에 나가기 시작..

길위의단상 2022.02.21

누구를 탓하랴

어제 보도된 사진 한 장에 깜짝 놀랐다. 국민의힘 윤석열 대선 후보가 열차를 타고 이동하며 구두를 신은 채로 앞 좌석에 두 발을 올려놓고 있는 모습이다. 옆에는 선대위 관계자들이 앉아 있다. 다른 사람이 앉는 자리에 구두를 신은 발을 그대로 올려놓을 수 있을까. 내 상식으로는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납득이 안 된다. 구두를 벗고 발을 올려놓아도 옆 사람이 있다면 민망할 터인데 이 무슨 꼴불견이란 말인가. 윤석열 후보는 평생 피의자를 다루는 검사로 살았고, 최고 직위인 검찰총장까지 오르며 영화와 권위를 누렸다. 그런 특권 의식이 부지불식간에 드러난 모습이 아닌가 싶다. 인간에 대한 예의나 존중은 찾아볼 수 없으며, 국민을 피의자 대하듯 오만불손하다. 그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공중도덕이 ..

길위의단상 2022.02.14

한 장의 사진(28)

귀향(歸鄕)은 '고향으로 돌아가거나 돌아옴'이고, 귀성(歸省)은 '부모를 뵙기 위하여 객지에서 고향으로 돌아가거나 돌아옴'이다. 귀성에는 '살필 성(省)'이 들어 있듯이 물리적인 거리 이동만 아니라 부모를 뵙는다는 뜻이 있다. 사람들이 설날이나 추석에 고향을 찾는 행동에는 귀성의 의미가 담겨 있을 것이다. 오늘이 설날인데 귀성을 하지 않은 것은 처음이다. 성인이 된 뒤로 50년이 흘렀는데 설 명절은 그동안 한 번도 빠지지 않았다. 추석은 몇 차례 못 내려간 적이 있지만, 설날 당일에 부모님께 세배를 드리는 일은 철칙처럼 지켰다. 그런데 올해부터 달라졌다. 이젠 교통 정체를 견디며 이동하기도 힘들고, 형제가 명절에 모인다 한들 서먹하니 따스한 귀성의 의미가 별로 없다. 얼마 전에 고향에 갔을 때 어머니께 ..

길위의단상 2022.02.01

정치와 술

당구 모임은 코로나에도 불구하고 줄기차게 만난다. 매주 한 번이지만 나는 거리도 있고 해서 출석률이 좋지 않은 편이다. 나가면 네댓 시간 당구치고 반주를 겸해 저녁을 먹는다. 술을 즐기는 사람은 대체로 각 소주 1병씩 마신다. 어제는 술자리가 길어지면서 생각지도 않게 과음을 했다. 정치 얘기가 나오는 바람에 열을 받은 게 첫째 이유였다. 진보와 보수로 나눌 때 나는 왼쪽이다. 당연히 정치적 견해에서는 우리 또래에서 외톨이다. 반대하는 진영의 대통령이나 후보를 욕하는 게 얼마나 맛있는 술안주인가. 노털들이 서로 박자를 맞추며 비난하는 소리에 종내 참을 수가 없었다. 나도 목소리가 높아졌고 애꿎은 소주병만 늘어갔다. 술자리는 2차로 이어졌다. 다행히 대통령 선거와 후보에 대한 얘기는 적당한 선에서 마무리 되..

길위의단상 2022.01.28

사회의 기둥이라는 자들

'사회의 기둥이라는 자들'은 독일 화가 게오르게 그로스(George Grosz, 1893~1959)가 1926년에 그린 작품으로, 당시 독일 사회를 이끌던 지도층을 조롱하면서 신랄하게 비판한 풍자화다. 그때는 부패한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로 나치가 집권하기 7년 전이었다. 그림에는 다섯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칼을 들고 넥타이에 나치 문양을 새긴 맨 앞의 남자는 나치당원으로 보인다. 머릿속은 온통 전쟁 생각뿐이다. 얼굴의 귀는 봉해져 있는데 세상의 소리를 듣지 않겠다는 뜻으로 보인다. 배타적 민족주의로 기우는 독일을 화가는 이미 예견하고 있었던 것 같다. 머리에 요강을 뒤집어쓰고 신문지를 안고 있는 사람은 언론인을 상징한다. 양손에는 펜과 종려나무 잎을 들고 있다. 그러나 평화를 상징하는 종려나무 잎에는 ..

길위의단상 2022.01.26

멸공

나는 1970년대에 군 복무를 했다. 그때 우리 부대의 구호는 '필승'이었다. 3년 동안 얼마나 '필승'을 외쳤던지 지금도 머리에 손이 올라가면 자동으로 튀어나올 정도다. 그럼에도 '멸공'은 익숙하지 않다. 휴전선이 가까운 전방 부대에 갔을 때 '멸공'이라는 구호를 듣고 긴장했던 기억이 난다. 철책선이 지척이라 살벌한 기운이 후방과는 달랐다. 멸공(滅共)은 공산주의나 공산주의자를 박멸한다는 뜻이다. 반공(反共)과는 어감이 다르다.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것과 없애야 하는 것은 차이가 크다. 멸공에는 진한 화약 냄새가 풍긴다. 50년 전 군대에 있을 때도 어색했던 '멸공'인데, 최근에 생뚱맞게 되살아났다. 신세계 그룹 부회장인 정용진이 SNS에 '멸공'을 올리니, 대선 후보인 윤석열이 다음날 이마트에서 가서 ..

길위의단상 2022.01.11

스킨을 바꾸다

스킨은 블로그가 입는 옷이다. 블로그를 운영하는 포털에서 기본으로 제공하는 스킨이 있지만, HTML이나 CSS에 능숙한 사람은 자신이 스킨을 만들어 개성을 뽐내기도 한다. 나처럼 컴맹인 사람은 기본 스킨조차 제대로 쓸 줄 모르니 스킨에 손을 댈 수가 없다. 오랫동안 한 옷만 걸치고 사는 꼴이다. 지금 내가 쓰는 스킨이 오래되었으니 새로운 스킨으로 바꾸라는 통지가 티스토리 홈페이지에 떴다. 10년 전에 티스토리로 강제 이주하고 나서 받은 스킨을 지금까지 계속 써 왔다. 그런데 옛 스킨은 블로그 서비스에 제한이 있으니 새로운 반응형 스킨으로 바꾸라는 것이다. 현재 티스토리에서 제공하는 스킨은 열 종류가 있다. 어제는 이 열 종류를 돌아다니며 어느 것이 나한테 맞는지 체크하느라 하루를 헤맸다. 마치 옷가게에서..

길위의단상 2022.01.05

그 겨울의 선물

청량리역에서 출발한 열차는 통로에 서 있는 사람이 빽빽할 정도로 승객이 많았다. 다행히 나는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내 맞은편에는 한 아가씨가 책에다 시선을 묻고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나는 마주보기를 애써 피하며 창 밖만 내다봤다. 대학 1학년 생활을 마치고 고향에 내려가는 중이었다. 대학이라는 낯선 환경에서 1년은 어영부영 지나갔다. 공부와는 아예 담을 쌓고 지내서 낙제한 과목은 방학 때 보충수업을 들어야 했다. 2학기를 마쳤을 때 세 개 과목인가가 성적 미달이 되어 윈터 스쿨을 듣고 늦게서야 고향으로 가는 길이었다. 기차는 원주역을 지나면서 한산해졌다. 셋씩 비좁게 앉았던 자리도 두 사람으로 줄어들며 여유로워졌다. 그제서야 앞에 앉은 아가씨와 말문을 트게 되었다. 누가 먼저였는지는 모르지만 계란 같..

길위의단상 2021.12.19

교육 개혁이 필요하다

올해 수능인 생명과학(2)의 한 문제에서 오류가 발생하여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법원은 가처분신청을 받아들여 수험생들에게는 생명과학 점수가 빠진 성적표가 발부되었다. 며칠 전에는 외국 과학계에서도 관심을 보였고, "터무니없이 어렵고 푸는 것이 불가능한 문제"라는 견해를 밝혔다. 우리나라 수능은 어렵기로 소문이 나 있다. 일부 영어 문제는 대학을 졸업한 미국 사람도 못 푼다고 고개를 흔들 정도다. 수능이 오로지 학생들을 성적순으로 줄세우기 위한 목적이기 때문이다. 소위 말하는 변별력을 높이기 위해 문제를 꽈배기처럼 배배 꼬아서 출제한다. 아마 이번의 생명과학 문제도 그런 유형에 들어갈 것이다. 수능 문제는 실생활은 차치하고 대학 공부를 할 자질 측정으로부터도 동떨어져 있다. 고등학생들은 오직 대학에 들어가..

길위의단상 2021.12.13

100명산 중간 점검

10년 전에 퇴직을 한 뒤 우리나라의 100명산을 오르겠다고 목표를 세웠다. 그때까지 오른 산을 제외하니 남은 산은 68개였다. 한 해에 예닐곱 산을 오른다면 일흔 살이 될 때까지는 가능해 보였다. 그런데 막상 도전해 보니 일 년에 서너 개 산이 고작이었다. 그것마저 발이 고장나는 바람에 몇 년을 쉬게 되었다. 이제 일흔이 되어 점검해 보니 그동안 13 산을 더한 게 고작이었다. 남은 산은 55인데 이미 날은 저물고 있다. 목표를 달성하기는 글렀다. 수도권 15[완료 15] O - 감악산, 관악산, 도봉산, 마니산, 명성산, 명지산, 백운산, 북한산, 소요산, 용문산, 운악산, 유명산, 천마산, 축령산, 화악산 강원권 22[완료 11] O - 가리산, 두타산, 백덕산, 백운산, 설악산, 오대산, 오봉산,..

길위의단상 2021.11.28

바깥 잠과 수면제

어제저녁에는 9시 30분에 잠자리에 들었는데, 오늘 아침에 일어난 시간은 8시였다. 10시간 정도 잠을 잔 것이다. 어제는 특별한 날이 아니다. 보통 저녁 10시에 자서 아침 7시에 일어난다. 나는 하루에 아홉 시간 정도 잠자는 '롱 슬리퍼(long sleeper)'다. 나이가 들면 잠이 줄어든다는데 나는 아직 큰 변화가 없다. 아홉 시간 동안 내내 자지만, 어쩌다 오줌이 마려워 한 번쯤 깰 정도다. 이만하면 잠 복은 타고난 것 같다. 넌 심간이 편해서 그런가 보다, 라고 하지만 나라고 세상 살아가는 염려나 스트레스가 덜한 건 아니다. 타고난 체질일 뿐이다. 그런데 전과 달라진 점이 하나 있다. 밖에 나가서 잘 때는 쉽게 잠들지 못한다. 달라진 잠자리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는 것이다. 우선 베개 높이가 달..

길위의단상 2021.11.17

독고다이 기질

독고다이 : 스스로 결정하여 홀로 일을 처리하거나 그런 사람을 속되게 이르는 말. '고려대 한국어대사전'에 실려 있는 독고다이의 뜻이다. 일본말이지만 엄연히 우리말 사전에 실려 있다. '특공대(特攻隊)'의 일본 발음이 독고다이다. 조직적인 집단에 속하지 않으면서 홀로 임무를 수행하는 단독자가 독고다이다. 군대나 건달 세계를 떠나 범위를 넓히면 사회의 아웃사이더도 독고다이의 기질과 통한다고 하겠다. 어느 분의 글에서 독고다이를 재해석한 걸 보았다. 그분은 독고다이를 한자로 '獨固多異'라 옮겼다. '혼자만을 고집하면서 많은 이와는 다르다' 라는 뜻이다. 독고다이의 원뜻을 살린 재미있는 조어다. 아니면 독고를 '獨孤'라 써도 좋을 것 같다. 독고다이라는 어감에는 사회의 일반적인 관습이나 상식과 다르게 자기만의..

길위의단상 2021.10.28

30%

당구 모임이 있는 날 저녁에는 편의점 야외 탁자에서 캔맥주로 입가심을 한다. 술집보다 경제적이기도 하거니와 지금 같은 코로나 시대에는 밀폐된 실내보다 안전해서 좋다. 출입구 옆이라 옹색하긴 하나 적당히 취기가 오르면 유럽의 야외 카페가 부럽지 않다. 그렇게 동기들끼리 만나면 옛날 학창 시절의 추억담이나 앞으로 살아갈 노년의 삶 따위에 대해 잡담을 나눈다. 건강 문제도 빠질 수 없다. 우리 나이 정도가 되면 등산 모임이 하나둘씩 없어진다. 등산 공고를 하면 전에는 북적댔는데 이제는 서넛밖에 나오지 않으니 산 대신 둘레길 같은 수월한 걷기로 대체된다. 흐르는 세월을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어제는 한 친구가 착잡한 어조로 말했다. 인구 통계로 볼 때 남자 80세가 되면 생존율이 30% 정도라는 것이다. 이미..

길위의단상 2021.10.16

은퇴자가 노는 법

단톡방에서 심심치 않게 보는 글이다. 잊을 만하면 누군가 올리는 걸 보면 다들 공감하는 부분이 많은가 보다. 내용은 이렇다. 보편적 대한민국 노인 백수의 노는 법은, 1. 주야장천 배낭에 막걸리 한 병 넣고 청계산에서 북한산으로 휴대폰에 미스트롯 뽕짝 백 곡 깔아 볼륨 맥스로 틀어 놓고 무릎 연골 남아 있을 때까지 심마니 흉내 내며 살아가기. 1. 손주가 좋아 죽겠다고 카톡 프로필까지 손주 사진으로 도배해 놓고 할아버지가 외계인으로 보이기 시작하는 7살이 될 때까지 보육원장 놀이하기. 1. 허리가 온전한 그날까지 선블록 떡칠하여 전국 골프장 순회하며 나이스 샷에 중독되어 닐니리야 하다가 죽을 때도 호주머니에 티 넣고 화장터 가기. 1. 30만 원 들여 방통대 중국어과에 등록하여 뭔가 좀 남달리 학구적으로..

길위의단상 2021.09.26

국민 약 올리기

말 많은 5차 코로나 재난지원금이 일인당 25만 원씩 소득 기준 하위 88%에게 지급되고 있다. 그런데 소득을 가르는 기준이 납부하는 건강보험료 액수다. 문제는 건강보험료가 소득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나는 재난지원금 대상이 아니다. 그런데 한 친구는 나보다 소득이 많은데도 재난지원금을 받는다. 둘 다 연금 생활자면서 경기도에 있는 아파트에 살고 있으니 처지는 비슷하다. 다른 점은 친구는 직장에 다닌다는 사실밖에 없다. 친구는 퇴직 후 노는 게 심심하다면서 용케 물류회사에 일자리를 구했다. 그러니 건강보험이 직장가입자 자격이 되어 보험료 납부액이 지역가입자인 나보다 1/3밖에 안 된다. 월 수입은 내 두 배 가까이 되면서 건강보험료는 적게 내고 재난지원금도 탄다. 이런 아이러니가 없다. 주..

길위의단상 2021.09.15

귓꺼풀도 있었으면

하느님이 인체를 기가 막히게 잘 만드셨지만 하나 아쉬운 게 있다. 눈꺼풀을 만드실 때 귓꺼풀은 왜 안 만드셨을까? 눈과 귀는 인간의 대표적인 감각 기관이다. 전방의 경계 초소와 같다. 둘 중 하나만 없었어도 약육강식의 험한 자연환경에서 인류가 생존할 수 있었을지 의문이다. 그런데 경계병도 쉬어야 할 때가 있다. 하느님은 눈을 위해 눈꺼풀을 만드셨지만, 귀는 소홀히 하셨다. 몸은 잠들어도 귀는 잠들 수 없다. 현대 문명 속에서 살아가는 도시인은 피곤하다. 그중에서도 주범은 소음 공해가 아닐까. 도시인은 24시간 소음에 노출되어 있다. 일터에서도 집에서도 자유롭지 못하다. 과도한 소음에 노출되면 정서적으로 불안정해진다. 일에 집중할 수 없다. 하느님은 선견지명이 그리 없으셨나. 이럴 때 귓꺼풀이 있어서 마치..

길위의단상 2021.08.24

손과 코

일전에 고향에 내려가서 어머니가 고추 따는 일을 도와드렸다. 고작 두 시간 정도 되었을까, 고추밭에서 나오니 손톱에는 온통 풀물이 들어 있고, 양손의 엄지손가락이 얼얼했다. 고추를 따느라 엄지가 눌려서 압박을 받은 탓이었다. 나중에는 건드리기만 해도 아팠고, 그날 밤은 잠을 설쳤다. 사흘이 지난 아직까지 통증이 가시지 않고 있다. 손은 내 몸에서 콤플렉스 중 하나다. 내 손은 유난히 조그맣다. 여자 손보다 더 여자 같다는 얘기를 듣는다. 언제부턴가 나는 악수하기가 싫어졌다. 다른 사람의 크고 투박한 손에 잡히면 나는 이미 한 수 접히고 들어간다. 더구나 기를 죽이려는 듯 한 마디를 보태는 사람도 있다. "야, 남자 손이 뭐 이 모양이냐?" 아무리 감추려 해도 손을 통해 백면서생이라는 게 들통나 버린다. ..

길위의단상 2021.08.16

간절함이 통(通)하다

코로나 때문에 개최할 수 있느니 마느니 하던 도쿄올림픽이 1년 연기되어 열리고 있다. 경기장에는 관중이 없고, 시상식 때 메달도 본인이 직접 목에 거는, 코로나 시대의 특이한 올림픽이다. 손주가 찾아온 그저께 저녁에는 구기 종목인 축구와 야구, 여자 배구가 같은 시간대에 경기가 벌어졌다. 나는 축구와 야구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어서 처음부터 여자 배구만 봤다. 특히 여자 배구는 한일전이라 더 흥미로웠다. 참가 16개국 중 객관적 실력으로 우리나라는 하위권이다. 세계 랭킹이 우리나라가 14위, 일본이 5위다. 승리할 가능성이 낮으니 지상파 TV에서 중계를 안 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한일전은 드러난 실력만으로 판가름이 나지 않는다. 이번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4세트까지 서로 주고받고 하면서 마지막 5세트에 들..

길위의단상 2021.08.02

한 장의 사진(27)

40년 전쯤 여름방학 때 반 아이들을 데리고 도담삼봉으로 캠핑을 갔을 때의 사진이다. 당시는 전두환 정권 시절로 학교에도 교복 자율화 등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었다. 군사 정권은 교과목 외에 학생들의 야외 활동을 장려했다. 그때 내가 근무했던 중학교의 G 교장 선생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분은 내가 만난 교장 중 가장 특이하고 개성이 있었다. 고시 출신으로 문교부에서 행정 관료로 지내다가 중학교 교장으로 발령받았는데, 상관과 의견 충돌로 좌천되어 내려왔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만큼 고집 세고 자기 소신이 강했다. 학교 점검차 장학사가 학교를 방문하는 일이 있다. 학교에서는 대청소를 하며 손님맞이 준비를 하는 게 보통이다. 수업 참관도 하기 때문에 학생이나 교사나 귀찮고 긴장이 된다. 맨손 수업..

길위의단상 2021.07.21

민망하다

얼마 전에 뒷산길을 걸을 때였다. 굽은 길을 돌아나가다가 화들짝 놀랐다. 길 옆에서 한 여자가 달덩이 같은 엉덩이를 드러내고 볼일을 보고 있었다. 거리는 5m 정도로 무척 가까웠다. 뒤로 비스듬히 돌아앉은 여자는 외간남자가 가까이 다가온 것도 모르고 있었다. 이 황당 시추에이션을 어떡 하지? 나는 알아채지 못하게 돌아서서 고양이 걸음으로 살금살금 도망쳤다. 다행히 서너 걸음만 걸으면 보이지 않게 길은 굽어 있었다. 그리고는 휴,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인기척이라도 내서 여자가 알아챘더라면 얼마나 당황했을 것인가. 내가 민망한 정도와는 비교할 수 없을 것이었다. 방심은 가끔 이렇게 황당한 일을 생기게 한다. 사전에 여자는 주변에 사람이 없음을 확인했을 테지만 때로 투명인간이 있음을 잊은 것 같다. 4..

길위의단상 2021.07.13

아침이슬

양희은이 부른 '아침이슬'이 1971년에 나왔으니 올해로 50년이 된다. '아침이슬'은 긴 세월 동안 국민들로부터 꾸준히 사랑받는 대표곡 중 하나다. 반정부 집회에서 많이 불려진 탓인지 70년대 중반에는 금지곡이 되기도 했다. 오히려 그래서 더 인기를 끌지 않았나 싶다. 개인적으로는 이 노래를 만든 김민기가 부르는 '아침이슬'이 좋다. '아침이슬' 하면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두 번째 학교에 근무할 때 만난 후배 P 여선생이다. P는 출근하는 첫날부터 남달랐다. 다른 신임교사들은 일찍 나와 교무회의에서 인사를 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그때까지 P만 보이지 않았다. 교감이 신임교사 소개를 하려는 찰나 교무실 문이 꽈당 열리며 등산복에 배낭을 멘 젊은 여자가 헐레벌떡 들어왔다. P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

길위의단상 2021.06.25

늙어서 그래요

대상포진을 맞이한 지 50일이 지났다. 이제야 종착역이 가까워 보이지만 아직 끝은 아니다. 얼굴에 난 포진은 3주 정도 지나니 아물었지만 가려움증의 여진은 계속이다. 개미 한 마리가 멋대로 내 얼굴을 기어 다니고 있다. 대상포진은 뒤끝이 사나운 질병이다. 만만히 볼 게 아니다. 병원에 올 필요가 없다고 의사가 말했지만 끈질긴 개미 한 마리 때문에 내 발로 다시 찾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왜 이렇게 낫지 않느냐는 질문에 의사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늙어서 그래요." (젊은 의사는 "노화 탓입니다"라고 말했지만 내 귀에는 이렇게 들렸다. "늙어서 그래요. 시간이 약이니 그냥 느긋이 기다리세요.") 서운했으나 의사 말이 틀리지 않다. 늙었으니 늙었다고 말하는 것도 당연하다. 노년이 되니 이상이 생긴 뒤의..

길위의단상 2021.06.05

답답하면 바둑을 둬요

한 달 넘게 대상포진으로 시달리다 보니 심신이 지칩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멀리 있는 사람한테서 스트레스까지 받으니 위마저 말썽을 부리고 있네요. 이래저래 힘든 5월입니다. 바깥 외출이 자유롭지 못하니 답답한 처지를 잊기 위해서는 바둑이 제일입니다. 바둑을 두면 저절로 몰입이 되고 그동안은 만사를 잊습니다. 내 바둑 상대는 컴퓨터 안에 있는 인공지능 프로그램입니다. 사람 대국자는 피곤해서 사람과의 온라인 대국은 기피하지요. 얼굴이 안 보인다고 그러는지 바둑 예절이 없는 사람이 의외로 많아요. 또한 너무 승부에 집착하게 되는 것도 싫고요. 여러 AI 바둑 프로그램 중에서 요사이 내 파트너는 인간 기보로 학습한 릴라제로입니다. 다른 프로그램보다 수준은 떨어지지만 그래도 내가 두세 점은 깔아야 해요. 바둑..

길위의단상 2021.05.24

50년 전

* SNS의 고등학교 동창방에 대학 원서 쓰던 때의 얘기가 여럿 올라오고 있다. 나도 거기에 한 마디를 보탠다. 대학 원서 마감 사흘 전에 담임 선생님과의 면담을 통해 지원 대학을 결정했다. 나는 마지막까지 둘 사이에서 고민했다. 하나는 서강대 공대였고, 다른 하나는 서울대 사대였다. 당시에 이과생들에게 제일 인기 있던 학과는 공대 전자공학과였다. 나는 서울대 공대 갈 실력은 안 되고 차선책으로 서강대를 생각하고 있었다. 내 실력으로 서강대 공대 전자공학과는 넉넉히 들어갈 수 있었다. 반면에 아버지는 내가 국민학생일 때부터 교사가 되기를 바랐다. 생활기록부의 학부모 희망사항란에는 초, 중, 고 모두 초지일관 '교사'라고 적혀 있다. 나 역시 교직을 그닥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싫은 것도 아니었다. ..

길위의단상 2021.05.08

+5kg

보름 동안에 몸무게가 5kg이 늘었다. 대상포진이 준 선물이다. 이번 대상포진은 특이한 게 엄청나게 허기가 지고 엄청나게 잠이 왔다. 걸신들린 듯 먹었고, 낮밤 없이 잠을 잤다. 그 결과 몸무게가 최고치를 찍었다. 대상포진 전에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소식(小食)이었다. 아침에 누룽지죽, 점심은 밥 반 공기 정도, 저녁은 야채주스 한 잔이 고작이었다. 그게 속이 편하고 좋았다. 육체 활동이 많지 않으니 그 정도 음식이면 넉넉하다고 믿었다. 몸도 가뿐하고 좋았다. 그런데 영양 공급에는 문제가 있었던 것 같다. 크게 피곤한 일도 없었는데 대상포진에 걸리고 면역력이 약해진 것은 평소 식사량과 관련이 있지 않나 추측한다. 아내를 비롯해 주변에서도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많다. 대상포진에 걸리니 몸이 마구 음식을 ..

길위의단상 2021.05.06

대상포진 경과

여섯째 날 일어나니 얼굴이 퉁퉁 부어 있다. 특히 눈두덩과 입술 부분이 심하다. 물집은 계속 생겼다 터졌다를 반복한다. 다행히 통증은 약해서 견딜만하다. 진료는 내일이지만 주사라도 미리 맞으려고 병원을 찾았다가 휴원일이라 헛걸음하다. 대상포진 이놈 만만찮다. 일곱째 날 어제저녁 8시에 침대에 들어가서 오늘 아침 8시에 일어났으니 무려 12시간을 잔 셈이다. 얼굴 부기는 여전하고 두통이 다시 나타난다. 두통은 어젯밤에 너무 길게 누워 있던 탓이 아닌가 싶다. 두 번째 병원 진료받다. 얼굴과 엉덩이에 주사를 맞고 약을 받아오다. 의사는 대상포진 증세가 이제 정점을 지나고 있다고 한다. 여덟째 날 대상포진에 걸린 이후로 식욕이 엄청 왕성하다. 평상시의 너댓 배는 먹는 것 같다. 아내는 먹을거리를 계속 사 온다..

길위의단상 2021.04.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