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849

힘들고 지쳐도 웃어요

손주가 오면 집안에 하하 호호 웃음꽃이 핀다. 보통 때는 웃을 일이 거의 없다. 한 번도 웃지 않고 지내는 날이 거의 대부분일 것이다. 파안대소를 해 본 적이 언제였는지 기억에 없다. 늙어갈수록 웃음이 사라지고 얼굴 표정은 굳어진다. 어른과 어린이의 가장 큰 차이점이다. 아이들은 사소한 일에도 깔깔거리며 재미있어한다. 호기심이 가득하니 뭐든지 재미있는 거리를 만들어낸다. 노인이 되면 매사에 심드렁해진다. 마치 딱딱하게 말라가는 고목 등걸 같다. 그래도 자주 웃어야 할 필요를 느낀다. 거실에서 TV를 보며 아내는 깔깔거리며 소리 내어 웃는다. 예능 프로인 것 같은데 뭐 그런 걸 보느냐고 나는 고개를 돌려버린다. 아내는 웃을 일이 없는데 이런 거라도 보면서 웃어야 정신 건강에 좋다고 말한다. 맨날 책을 본들..

길위의단상 2023.03.11

금주 200일

술을 끊거나 줄이는 뜻을 가진 낱말에 단주, 금주, 절주가 있다. 사전에는 단주나 금주 모두 술을 끊는 것으로 나와 있으나 내가 볼 때 둘 사이에는 느낌상의 차이가 있는 것 같다. 단주(斷酒)는 불가피한 사정으로 또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맞닥뜨려 술을 끊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몸에 병이 생겨 절대로 술을 마시면 안 되는 경우다. 본인의 생각과 관계없이 무조건 술을 끊어야 한다. 금주(禁酒)는 외부적인 압력보다 본인의 의지로 술을 끊는 경우다. 어감상 단주보다 부드럽다. 마음먹기에 따라 다시 마시게 될 수도 있다. 절주(節酒)는 술을 절제한다는 뜻이다. 절주만 된다면 굳이 술을 원수 보듯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술을 끊은지 200일이 되었다. 나에게는 단주와 금주 중 금주라는 명칭이 적당할 것..

길위의단상 2023.02.18

7000

블로그의 글 수가 7,000개를 기록했다. 블로그를 처음 개설한 날이 2003년 9월 12일이니 어느새 20년 가까이 되었다. 날수로는 정확히 7,090일째다. 남에게는 하찮게 보일지 몰라도 나에게는 천 단위의 소중한 기념일이다. 20년 전에 나는 매우 어려운 처지에 있었다. 모든 것을 쏟아부은 밤골 생활이 여의치 못해서 방황하고 있을 때였다. 세상은 등을 돌린 채 나를 외면했고, 진심을 터놓고 고민을 나눌 사람이 없었다. 그때 절박한 심정으로 시작한 게 블로그였다. 온라인 공간에다 글을 쓰면서 나는 나를 위로해 나갔다. 누구에게 드러내거나 보여주려는 목적이 아니었다. 글을 쓰면서 나를 더 알아가고 싶었다. 결과적으로 블로그는 상상한 이상으로 나에게 큰 힘이 되어 주었고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아 주었다. ..

길위의단상 2023.02.08

새로운 세상이 다가온다

ChatGPT가 화제다. ChatGPT는 Open AI라서 회사에서 두 달 전에 공개한 인공지능 대화형 챗봇이다. 단순한 검색 기능을 넘어서서 인간과 수준 높은 대화가 가능한 인공지능이다. 놀라운 점은 ChatGPT가 시나 에세이, 논문까지 쓸 수 있다는 점이다. 나도 ChatGPT에 연결하여 이런저런 테스트를 해 보았다. 인간의 언어 모델을 기반으로 방대한 데이터에서 문장을 만들어내는 능력이 뛰어남을 볼 수 있었다. 가끔 부정확한 자료가 뜨기도 한다. 그러나 금방 나온 초기 버전임을 감안하면 앞으로 어떻게 발전해 나갈지 가늠하기 어렵다. 인공지능의 시대가 성큼 다가선 느낌이다. ChatGPT에게 시를 하나 쓰게 해 보았다. 요청은 이렇게 했다. "일몰을 소재로 시를 하나 쓰고 싶어. 석양, 바다, 구름..

길위의단상 2023.02.06

술이 고픈 날

답답하고 짜증이 이는 날이 있다. 이런 때는 밖에 나가 걸음을 하는 것이 특효약이다. 걷는다는 단조로운 몸의 움직임이 얽힌 마음을 풀어준다. 어제도 그랬다. 방에 가만있다가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화에 잡아먹힐 것 같았다. 미세먼지가 빨간색으로 경고를 했지만 밖으로 나섰다. 걸으면서 서로 다른 내면의 목소리를 듣는다. 하나는 말한다. 뭐 그런 칠칠치 못한 놈들이 있냐구. 넌 참 운도 없구나. 네가 화낼만하다니까. 다른 하나는 말한다. 잘 봐, 그런 게 아니잖아. 화가 어디에서 온 거니. 원인을 밖에서 찾으면 답이 없다고. 둘이서 실컷 싸우게 놔둔다. 얼마 지나면 자연스레 한 목소리가 사그라든다. 또한 내 안의 어린아이도 보인다. 내 의식의 심층부에는 아직 미성숙한 어린아이가 있어 내 사고와 행동을 지배한다..

길위의단상 2023.01.09

인공지능 치팅

요사이 바둑계가 인공지능 치팅으로 시끌시끌하다. 발단은 지난 21일 춘란배 세계바둑대회 4강전에서 중국의 리쉬안하오 8단이 세계 1위인 우리나라의 신진서 9단을 압도적으로 이기자 중국의 양딩신 9단이 인공지능 치팅을 했다고 주장하면서였다. 양딩신도 8강전에서 리쉬안하오에게 완패를 했다. 양딩신은 SNS를 통해 리쉬안하오의 인공지능 치팅 의혹을 제기하며 "리쉬안하오와 20번기를 하고 싶다. 모든 신호가 차단된 대국장에서 화장실을 가지도 말고 대국을 하고 기보로 평가를 받자. 만약 내가 리쉬안하오에게 누명을 씌운 것이라면 바둑계에서 은퇴하겠다"라고 썼다. 중세 식의 결투 신청이다. 그러나 리쉬안하오가 어떤 방법으로 치팅을 했는지는 밝히지 않았다. 리쉬안하오는 전부터 의심을 받고 있었던 것 같다. 리쉬안하오는..

길위의단상 2022.12.26

독일의 과거 청산

지난 20일에 독일 법원이 2차 세계대전 때 나치 만행에 협력한 97세 할머니에게 유죄 선고를 내렸다. 이름가르트 푸르히너(Irmgard Fruchner)라는 할머니는 79년 전인 18세였을 때 나치 강제수용소 지휘관의 비서 겸 타자수로 일하면서 유대인 학살을 방관하고 조력한 혐의를 받았다. 당국의 끈질긴 추적 끝에 푸르히너는 작년에 체포되었고 이번에 유죄 판결이 내려졌다. 푸르히너는 처음에는 자신에게 적용된 죄를 인정하지 않았으나, 이번 재판에서는 과거 수용소에서 일어났던 일을 사과하고 그 시절을 후회한다며 참회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렇듯 독일은 나치에 소극적으로 협력한 이들에게도 엄격한 잣대로 죄를 묻고 있다. 그때로부터 80년이 넘게 지났지만 여전히 전범을 추적하며 죄상을 밝히고 있다. 푸르히너의 ..

길위의단상 2022.12.25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인생의 말년은 조용히 책을 보며 지내고 싶은 게 내 소망이다. 책을 읽을 때가 제일 행복하기 때문이다. 지금의 책읽기가 죽을 때까지 이어질 수 있다면 좋겠다. 그러자면 몸과 정신의 기능이 온전히 유지되어야 한다. 책을 가까이하고 싶어도 작은 활자는 눈이 아파서 힘들다는 지인들 얘기를 자주 듣는다. 돋보기를 쓰기는 하지만 다행히 나는 아직까지 책을 읽는 데 불편함은 없다. 공자는 자평하기를 자신이 뛰어난 점은 없지만 호학(好學)만은 다른 누구보다도 앞선다고 했다. 호학은 공자에게 의무가 아니라 의미며 즐거움이었다. 나는 독서에서만은 - 질이 아닌 양에서 - 어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한다. 한 해에 보통 70권 내외를 읽는다. 한창 많이 읽었을 때는 100권을 넘었다. 독서량에서는 3, 40대일 ..

길위의단상 2022.12.19

소음과민증후군

나는 소리에 예민하다. 주변이 소란한 걸 견디지 못한다. 시끌벅적한 자리에는 아예 나가질 않는다. 데시벨이 높지 않더라도 신경이 쓰이는 특정 소리에 사로잡히면 안절부절못한다. 가장 괴로운 것이 한밤중의 층간소음이다. 윗집에는 야행성 가족이 산다. 밤 11시에서 2시까지가 제일 분주하다. 문을 쾅 닫는 소리부터 달그락거리는 소리까지 다양한 생활 소음이 들린다. 잠이 깨인 날이면 작은 소리에도 신경이 쓰여서 올빼미 가족이 잠잠해질 때까지 애를 태워야 한다. 같은 환경에 노출되어 있지만 아내는 덤덤한 편이다. "오늘은 좀 심하네"라고 반응하는 정도다. 내가 유별나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으니 윗집 탓만 할 수도 없다. 희한한 것은 아내는 아날로그시계에서 생기는 초침 소리에 힘들어한다. 고향에 내려가서 잠을 ..

길위의단상 2022.12.11

트레커에서 나오다

14년간 함께 했던 모임인 트레커에서 나왔다. 요 몇 년 동안 참여하는 횟수가 적다 보니 뜸하게 만나게 되고 마음도 멀어지게 되었다. 끝이 다가왔음을 작년부터 감지하고 있었다. 해외 트레킹에서 연이어 배제되는 걸 보면서 굳이 회원으로 있을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하지만 긴 시간 함께 했던 인연을 쉽게 놓지 못했다. 즐거웠던 추억거리가 많은 트레커였다. 히말라야 랑탕 트레킹을 계기로 트레커 모임에 가입했다. 2008년 가을이었으니 14년이 넘었다. 그동안 국내 산행과 여행의 대부분을 트레커와 함께 했다. 특히 해외 트레킹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2009년 랑탕, 2015년 야쿠시마, 2016년 뉴질랜드는 내 인생에서 잊을 수 없는 트레킹이었다. 트레커가 아니었다면 맛보지 못했을 값진 경험이었다. 그 사실 ..

길위의단상 2022.11.26

빈곤 포르노

'빈곤 포르노'라는 말이 요사이 화제가 되고 있다. 대통령 부부가 캄보디아를 방문했는데 김건희 여사가 독자 일정으로 병원을 방문해서 심장질환을 앓고 있는 한 소년을 안고 있는 사진이 공개되면서부터다. 야당의 한 국회의원이 이것을 빈곤 포르노 화보 촬영이라고 비판하니까, 여당에서는 여성 혐오와 아동 비하라고 발끈했다. '빈곤 포르노(Poverty Pornography)'는 모금 유도를 위해 가난을 자극적으로 묘사하여 동정심을 불러일으키는 모든 영상을 말하는 용어다. 서구에서는 오래전부터 동정심이나 죄책감을 유발하는 이런 행위를 '빈곤 포르노'라는 개념으로 비판적으로 사용해 온 것으로 알고 있다. 미국에서는 한국의 먹방을 'Korean Food Porno'로 부른다고 한다. '포르노'가 우리가 상상하는 외설..

길위의단상 2022.11.17

금주 100일

금주 100일이 되었다. 그날을 떠올리면 지금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게 된다. 그 참담했던 감정이 100일을 버틴 힘이 되었다. 또한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버팀목이 되어줄 것이다. 술을 끊은 뒤 생활에 큰 변화는 없다. 금단 증상이 나타날 정도로 알코올에 의존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리라. 다만 정신적으로 짜증과 우울이 늘었다. 전에는 술 몇 잔으로 기분을 업 시킬 수 있었으나 이젠 견뎌내야 한다. 금주는 확실히 정신 건강 측면에서는 마이너스다. 밖에 나가서 지인을 만나 술을 하고 돌아오는 밤은 포근하고 아름다웠다. 맨정신일 때는 투덜대고 원망하던 것들도 너그럽게 받아들일 정도로 마음도 넓어졌다. 누군가 이런 말을 했다. "당신이 술에 취하면, 이 세상은 여전히 여기 있지만 아주 잠시 동안은 세상이 당신의 멱..

길위의단상 2022.11.14

글쓰기 테스트

지난 15일 오후에 판교 데이터센터에서 화재가 발생해 카카오 서비스가 중단되었다. 제일 많은 사람이 이용하는 카톡은 다음날 일부 기능이 돌아왔지만, 티스토리는 50여 시간이 지난 아직까지도 온전치 못하다. 블로그의 틀이라 할 수 있는 스킨은 원래대로 복구되지 못하고 있다. PC 화면에서 모바일 버전으로만 보이고 있는 상태다. 지하층의 기계실 화재로 전체 서버가 먹통이 되고 복구조차 지지부진한 것은 거대 IT 기업 답지 않다. 사고에 대비해 데이터를 여러 곳에 분산 운영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별 쓸모가 없었다. 사고 이후의 고객에 대한 조치도 실망이다. 티스토리의 경우 원상복구하는 진행 상황이 어떻게 된다는 안내 멘트 하나 없다. 티스토리 홈 화면은 이럴 때 활용해야 할 것이 아닌가. 이러니 돈벌이에만 급..

길위의단상 2022.10.17

할아버지는 왜 화를 내요?

"할아버지는 왜 자꾸 화를 내요?" 어느 날 손주한테서 느닷없이 받은 질문이다. 뜨끔했다. 아내에게서였다면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겠지만 손주는 달랐다. 뭐라고 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 ".........." 손주가 반문했다. "답답해서 그래요?" 맞았다. 조금 전 상황이 그랬기 때문이다. 질문이 이어졌다. "할아버지는 화가 날 때 참을 수 없나요?" 나는 겨우 답했다. "열에 아홉은 참고 한 번 화를 내는 거야." 옆에 있던 아내가 "거짓말!"이라고 하는 것과 동시에 손주가 말했다. "내가 볼 때 열이면 두 번만 참고 여덟 번은 화내는 것 같아요." 옆에서 아내는 손뼉을 쳤다. 손주한테서까지 이런 말을 듣는 게 너무 창피했다.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내가 잘못된 것이다. 아이들 앞에서는 말과 행동을 조심해야겠..

길위의단상 2022.10.07

제임스 웹이 찍은 수레바퀴은하

우주의 풍경 앞에서는 가슴이 뛴다. 요사이는 별이 빛나는 밤하늘조차 잊은 처지지만, 우주망원경이 보내오는 사진이 있어 허전함을 달래준다. 작년에 하늘로 올려진 제임스 웹은 허블보다 더 선명한 이미지를 선물하고 있다. 얼마 전에 제임스 웹이 찍은 수레바퀴은하가 공개되었다. 아름다운 은하나 성운이 많지만 수레바퀴은하는 그중에서도 독보적이다. 원 이름은 'ESO 350-40'인데 생긴 모양에서 통상 '수레바퀴은하(Cartwheel Galaxy)'라 불린다. 수레바퀴은하는 우리은하에서 5억 광년 떨어져 있고, 지름은 15만 광년이다. 원래는 나선은하였는데 다른 은하와 충돌하면서 생긴 충격파가 바깥으로 퍼져 나가는 고리 모양을 만들었다. 적절한 비유일지 모르지만 호수에 돌이 떨어질 때 생기는 파문과 비슷하다. 충..

길위의단상 2022.09.14

좌파와 우파

경제 양극화가 심해지면서 정치적 이념의 양극화도 덩달아 심각해지는 것 같다. 전에는 진보와 보수로 두리뭉실하게 나누었지만, 그중 상당수가 극단으로 쏠려서 '좌빨'이나 '수꼴'이라는 네이밍이 이젠 자연스럽게 들린다. 동기들 단톡방은 이런 극단적 목소리로 차고 넘친다.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를 구분하는 경계는 모호하다. 예를 들면, 현재 민주당이 진보 정당인가? 나는 국민의힘과 별로 다르지 않은 보수 정당이라고 판단한다. 지난 선거에서 내건 공약을 보면 두 당의 차이가 거의 없다. 민주당이 개혁 보수라면, 국민의힘은 수구 보수다. 둘 다 자기들의 기득권을 지키려는 정당이다. 진정한 진보라면 자신이 가진 것을 내려놓을 줄 알아야 한다. 이런 민주당을 어떤 사람은 좌파 정당이라고까지 부른다. 좌파에 진보가 ..

길위의단상 2022.09.05

한 장의 사진(34)

'洛山寺記念 / 67. 7. 23' 올해가 2022년이니 55년 전 여름에 찍은 사진이다. 장소는 낙산해수욕장의 의상대 앞이다. 앞줄 맨 왼쪽의 교복을 입고 있는 학생이 나다. 그해 여름 아버지가 근무하시던 면사무소 직원들과 이장분들이 피서 여행을 동해안으로 갔는데 아버지는 나를 동행시켰다. 나는 그때 중3이었고 막 여름방학에 들어간 참이었다. 고등학교 입시 준비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때였지만 머리를 식힐 겸 바닷바람을 쐬고 오자고 아버지가 권했고, 나는 군말 없이 따라나섰다. 이 사진을 볼 때마다 실소가 일면서 고개를 갸웃하게 된다. 어떻게 어른들 가는 여행에 낄 생각을 했을까. 동료들 여행에 자식을 데리고 간 아버지도 그렇지만 졸래졸래 따라간 나도 이해가 안 된다. 중3이면 가족끼리 여행을 하..

길위의단상 2022.08.24

코로나 격리의 지루함을 달래준 두 영상

어떤 사람은 코로나로 격리되어 있을 때 그간 시간 여유가 없어 못 본 영화와 드라마를 실컷 봤다고 한다. 증상이 경미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그러질 못했다. 머리가 띵 하고 의욕이 없으니 정신 집중이 필요한 독서나 영화 감상 따위에는 관심이 생기지 않았다. 대신에 유튜브로 가볍게 볼 수 있는 영상을 봤다. 'Just for Laughs Gags'라는 캐나다 TV 프로그램인데 길거리에서 의외의 상황을 만들어서 놀라는 시민들의 반응을 보고 즐기는 내용이다. 캐나다식 몰래카메라인 셈이다. 길이가 3분 정도로 짧고 스피디하게 전개되어 보는 데 지루할 틈이 없다. 마지막에 몰래카메라를 알게 된 사람들의 반응이 특히 재미있다. 덕분에 많이 웃을 수 있었다. 이 프로그램으로 캐나다 사회의 단면을 볼 수 있는 점도 ..

길위의단상 2022.08.20

코로나에 걸리다

코로나에 걸린 누적 확진자가 2천만 명이 넘었다. 통계에 잡히지 않은 숫자까지 더하면 국민의 반 이상이 코로나에 걸린 셈이다. 주변을 봐도 코로나에 걸린 사람 비율이 반이 넘는다. 코로나 바이러스와는 누구에게나 어쩔 수 없는 만남이 되어 가고 있다. 나도 이번에 코로나에 걸렸다. 지나칠 정도로 몸을 사리며 지냈지만 한 순간의 방심에 무너졌다. 지난주 목요일에 서울에 가서 대낮부터 술을 퍼마시고 개차반이 되었다. 온갖 추태를 부리다 집에 들어왔으니 코로나가 가만 뒀을 리 없었다. 다다음날부터 기침이 나면서 증상이 나타났다. 나의 '코로나 일기'다. - 첫째 날(8/6) 오후부터 몸이 나른하고 목이 칼칼하면서 잔기침이 나다. 에어컨 바람 탓인 줄 알고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다. 딸과 손녀들이 찾아왔지만 혹시나..

길위의단상 2022.08.12

제임스 웹이 보는 우주

제임스 웹 우주망원경[JWST, James Webb Space Telescope]이 드디어 활동을 시작해서 첫 사진이 공개되었다. JWST는 지구에서 150만 km 떨어진 지점(지구와 달 사이의 약 4배 거리)에 떠서 우주를 관측하는 망원경이다. 허블보다 100배 정도 성능이 향상되었다고 한다. '제임스 웹'은 나사의 2대 국장을 지낸 분의 이름이다. 허블은 가시광선 영역을 촬영했지만 제임스 웹은 근적외선 영역이어서 심우주를 관측하는데 더 유리하다. 팽창하는 우주에서는 먼 천체일수록 더 빨리 멀어지는데 적색편이 현상 때문에 빛은 파장이 긴 적외선으로 변한다. 먼 우주의 천체를 관측하자면 적외선 파장이 필요하다. 이번에 처음 공개한 사진은 지구에서 46억 광년 떨어진 SMACS 0723 은하단이다. 은하들..

길위의단상 2022.07.17

이젠 칠십인 걸

언제부턴가 집안에 파리랑 벌이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작은 날벌레도 들어왔다. 파리채를 열심히 휘두르지만 감당하기 어려웠다. 텃밭을 하니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그러려니 했는데 어느 날 우연히 베란다의 방충망이 열려 있는 게 눈에 띄었다. 헐~, 그동안 한여름에 방충망 없이 산 것이었다. 둘 중 누군가가 방충망을 열고 난 뒤 닫지 않았음이 분명했다. 그런데 아무리 더듬어봐도 방충망을 연 기억이 안 났다. 나는 아니라고 서로 부정하면서 상대를 의심하는 티격태격이 이어졌다. 그러다가 결론은 늘 같았다. "우리 나이가 얼마지?" "이젠 칠십인 걸!" 나이 70이 넘고 보니 삶의 패턴이 달라지고 있다. 심리적으로도 노인이라는 사실에 위축이 된다. 공식적인 노인의 기준은 65세지만 장수시대라서인지 그 나이에 노인은..

길위의단상 2022.07.06

달무지개

자연/기상 현상에 관심이 많아서 다른 사람에 비해서는 자주 관찰하고 사진으로 찍고 했지만 '달무지개(moonbow)' 현상은 이번에 처음 들었다. 달무지개는 달무리와는 다른 현상이다. 일반적인 무지개는 아침이나 저녁에 비스듬히 기운 햇빛에 의해 생긴다. 대기 중에 떠 있는 물방울에 햇빛이 굴절하면서 분산되어 무지개 호가 나타난다. 여러 조건이 일치해야 하므로 흔히 보기는 어렵다. 달무지개는 말 그대로 달빛에 의해 생기는 무지개다. 달빛은 약하기 때문에 무지개가 생기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폭포 주변 같이 물보라가 생기는 곳에서는 달빛으로도 무지개를 만들 여건이 되는 모양이다. 다만 달빛이 강한 맑은 날의 보름달이어야 하고 폭포에서 날리는 물보라가 많아야 한다. 그래도 사람 눈에는 흐릿한 회색의 ..

길위의단상 2022.06.24

사람 사는 곳인데

위층은 내 전화번호부에 '올빼미'로 명명되어 있다. 밤늦게서야 바빠지기 때문이다. 사업을 하는 가장이 늦게 퇴근하는 것인지 밤 11시부터 새벽 2시까지 분주하다. 문제는 이 시간대가 내 잠자는 시간과 겹친다는 데 있다. 주로 문이 쾅하고 닫히는 소리에 깨어나면 조용해질 때까지 몇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층간 소음 스트레스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라 이 아파트에 입주한 10여 년 전부터 시작되었다. 그동안 다양한 방법으로 불편함을 전달하고 직접 만나서 호소도 했다. 그러나 생활 패턴이 쉽게 바뀔 수 없는 일이었다. 완벽한 해결책은 이사를 가야 했지만 그 또한 쉬운 일이 아니었다. 최근에 상태가 심해졌다. 어젯밤에는 참고 참다가 밤 12시가 넘어 문자를 넣었다. 작년인가 직접 만났을 때 전화번호를 알으켜주면..

길위의단상 2022.06.04

남들처럼

"은주야, 이제 너 좋아하는 배구장 가서 공놀이도 실컷 하고, 바다로 산으로 가서 맑은 공기 시원하게 마셔. 다음 생애엔 언니랑 남들처럼 4500원짜리 커피 마시면서 산책도 하고, 길거리에서 떡볶이랑 튀김도 사 먹자. 남들처럼 손 잡고 여행도 떠나고, 너 좋아하는 노래방도 가자. 남들처럼, 남들처럼." 지난 3일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였던 안은주씨가 사망했을 때 언니가 오열하며 한 말이다. 안은주씨는 2011년에 발병하여 12년간 투병하다가 결국 생을 마감했다. 배구 선수 출신이었던 안은주씨는 누구보다 건강했다고 한다. 안은주씨는 가습기 살균제에 의한 1774번째 사망자였다. 우리 사회를 뒤흔들었던 가습기 살균제 참사는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일부 기업의 처벌이 이루어졌지만 다른 가해자들은 1심에서 무죄를..

길위의단상 2022.05.30

조심과 방심 사이

발바닥에 이상이 느껴진 게 3년 전이었다. 많이 걸으면 따끔거리며 아팠다. 병원에 갔더니 염증이 생긴 것 같다고, 심하지는 않으니 우선 걷는 걸 자제하라고 의사가 말했다. 긴 거리의 트레킹이나 등산을 쉬게 되었고, 집에서는 쿠션이 넉넉한 슬리퍼를 신었다. 조신하고 몇 달을 보냈더니 증상이 사라졌다. 작년까지 집 부근에 있는 낮은 산에만 드문드문 다녔지 무리한 산행은 하지 않았다. 제일 높이 올랐던 게 600m급의 파주에 있는 감악산이었다. 그 정도면 거뜬해서 발은 다 나았다고 판단하고 몇 달 전부터 등산을 재개했다. 아직 높은 산은 아니지만 - 발보다도 이제는 체력이 뒷받침이 안 되어 - 일주일에 한 번 정도로 올랐다. 산에 드는 재미를 다시 느끼기 시작했다. 며칠 전에는 북한산 숨은벽에 다녀왔는데 다시..

길위의단상 2022.05.13

어제 꾼 꿈

어젯밤에는 평상시와 다른 꿈을 꿨다.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푸틴이 핵전쟁을 위협해서인지 꿈에 핵전쟁이 벌어지고 세상의 종말이 오는 광경이 보였다. 우리나라에서도 방송과 통신이 끊어지고 어떤 일이 벌이지고 있는지도 모른 채 아파트에 갇혀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었다. 하늘에서는 전략폭격기들이 거대한 몸집을 끌고 동쪽으로 날아갔다. 근방에서는 핵폭탄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방사능에 오염된 공기가 몰려온다는 소문에 창문을 꼭 닫는 방법 외에는 대처할 수가 없었다. 공포 속에서 다가오는 죽음을 기다리다가 꿈이 끝났다. 이어서 꾼 꿈은 앞의 것과 반대였다. 화창한 봄날 온갖 꽃이 만발한 어느 전원 가운데였다. 탐조를 온 외국인 몇 명이 있었다. 그들은 나에게 필드스코프를 건네며 산 꼭대기에 있는 새들을 보라고 했다. 둥..

길위의단상 2022.05.05

한 장의 사진(33)

대학생 때 사진이 별로 없다. 앨범에서 스캔해 둔 파일이 열 장이 채 안 된다. 그마저 앨범은 없어지고 해상도 낮은 파일로만 남아 있다. 이 사진은 대학생 때 내 모습을 보여주는 사진 중 하나다. 저 때는 1972년, 대학 2학년 때가 아닌가 싶다. 서 있는 친구와는 대학 4년 동안 거의 붙어 있다 할 정도로 가까이 지냈다. 둘은 서로의 집을 번갈아 왔다갔다 했지만 친구가 우리집에 찾아오는 빈도가 더 높았다. 입은 옷을 봤을 때 늦겨울쯤 될까, 장소는 면목동 우리집이다. 내가 대학교에 들어가고 동생들이 모두 서울로 올라오면서 아버지는 면목동에 단독주택을 하나 마련했다. 주택 사업을 하던 아버지 친구분이 지은 집이었다. 우리 다섯 형제는 저 집에서 외할머니와 함께 10년 넘게 살았다. 내 20대와 함께 한..

길위의단상 2022.04.24

한 장의 사진(32)

살다 보면 누구나 삶의 분기점을 통과한다. 짧은 인생이지만 몇 번의 고비가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험난한 봉우리를 넘어야 한다. 그것이 어떤 봉우리인지는 넘을 때는 잘 알지 못한다. 세월이 흐르고 지나온 길을 멀리서 조망하게 될 때 삶의 매듭이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긴 능선길을 걷고 나서 뒤를 돌아볼 때 지나온 산봉우리들의 모양과 높이를 알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나에게도 몇 차례 파고가 밀려왔는데 그중 하나가 30대 중반에 경험했던 디스크 수술이었다. 아마 1986년이었을 것이다. 지금은 디스크 수술이 간단하지만 - 수술이 아니라 시술이라 불릴 만큼 - 그 시절에는 신중하게 접근해야 했다. 허리를 절개하고 칼로 디스크를 잘라내는 재래식 방법밖에 없던 때였다. 수술 후 재발하는 경우도..

길위의단상 2022.04.18

한 장의 사진(31)

내가 형님으로 부르는 박용도 선생님은 면목중학교에서 만났다. 그때 면목중학교는 막 개설된 학교였는데 형님은 개설요원으로 미리 발령받아 새 학교가 문을 여는 준비를 맡았고, 나는 3월의 정규 발령으로 갔다. 개설 학교의 첫 해는 학생이 1학년밖에 없으니 선생이라야 30명 남짓이어서 가족 같은 분위기다. 그래서 개설 학교에서 맺은 인연은 오래가는 편이다. 40년이 지났지만 그때의 동료들은 아직까지도 만나고 있다. 지금은 다들 70대의 할아버지가 되어 있다. 면목중학교는 첫해에 신입생이 입학했지만 교사(校舍)가 완성되지 않아 청량중학교에서 더부살이를 했다. 가을이 되어서 장안동의 새 건물로 이사를 갔다. 면목동에 없는 면목중학교여서 면목이 없다고 우리는 농담을 했다. 형님은 체육을 전공했고 학교 업무에서도 중..

길위의단상 2022.04.06

그 시절의 상춘

서울에서 6, 70년대 상춘(賞春) 장소는 창경원이 유일했다. 해마다 벚꽃 철이 되면 창경원 앞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밑의 사진 같은 모습은 그나마 질서가 잘 잡힌 것이다. 나는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서울에 올라왔고, 그래서 60년대 후반의 창경원의 봄을 기억한다. 그때 살던 곳이 돈암동이어서 걸어서 창경원까지 갔다. 어느 해 봄에는 시골에 계시는 어머니가 올라오셔서 도시락을 싸가지고 함께 창경원 벚꽃놀이에 간 기억이 난다. 얼마나 상춘객이 많았는지 꽃구경이 아니라 사람 구경이었다. 당시 창경원 안에는 동물원과 놀이기구가 있는 유원지도 있었다. 지금으로 치면 종합 놀이공원이었던 셈이다. 당시 사진을 보면서 옛 추억에 잠겨본다. 청춘남녀들에게는 창경원 밤 벚꽃놀이가 더 인기였다. 아마 나이 지긋하신 분들..

길위의단상 2022.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