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849

대상포진이어서 다행이다

첫째 날 아침에 일어나니 머리가 띵했다. 어제 밖에서 마신 술 탓이라 여겼다. 당구를 치고 기분이 좋아 친구들과 소주 한 병을 마셨다. 약간의 취기가 있었을 뿐 과하지는 않았다. 제일 먼저 코로나가 걱정되었다. 집에 손주도 와 있었다. 만약 코로나라면 민폐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코로나 검사를 받으러 가야 하나 고민이 되었다. 다행히 열은 없었다. 타이레놀 한 알을 먹었다. 둘째 날 머리 띵한 정도는 더 심해졌다. 얼굴 왼쪽 부분에 느껴지는 감각이 이상했다. 얼굴로 자꾸 손이 갔다. 흔한 감기 몸살과는 달랐다. 이번에는 중풍의 전조증상이 아닌가, 의심이 들었다. 중풍이 오면 몸의 반쪽이 마비된다고 들었기 때문이었다. 책을 보지만 집중이 잘 안 됐다. 다행히 손주는 오전에 떠났다. 다시 타이레놀과 쌍화탕을..

길위의단상 2021.04.21

시인의 사랑

어제부터 머리가 아프기 시작하더니 이틀째 이어진다. 미열도 있다. 그저께 비 내리는 궂은 날씨에 서울에 다녀온 후유증이 아닌가 싶다. 소주 한 병이 좀 과했던 게 아닌가도 여겨진다. 때가 때인지라 혹 코로나가 아닌가 은근슬쩍 걱정도 된다. 침대에 누워 라디오를 듣고 있는데 슈만의 연가곡인 '시인의 사랑'이 흘러나온다. 문득 50여 년 전의 고등학생 시절로 되돌아간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음악 선생님은 성악가였는데 특이한 면이 있었다. 외모는 레슬러처럼 우락부락했고, 성격이 시원시원하면서도 괴팍한 면이 있었다. 좋게 보면 예술가적 기질이 다분했다. 목소리가 엄청 컸는데 한 번 화를 내면 천둥 백 개가 몰아치는 듯 했다. 이 음악 선생님이 음반을 냈는데 타이틀이 바로 '시인의 사랑'이었다. 슈만은 어렵게 클..

길위의단상 2021.04.19

진공묘유(眞空妙有)

30대 후반에 붓글씨를 배운 적이 있다. 동네 서예학원에 다니다가 좀 더 이름 있는 선생한테 배운다고 모 신문사 문화센터에 들어갔다. 가르치던 선생은 국전 특선 등 다양한 경력을 자랑하는 분이었다. 이 분은 서예 외에도 역사적 사건에 얽힌 배경을 설명하고 수강생의 관상을 봐주는 등 강의를 재미있게 진행했다. 날 보고는 젊을 때는 그늘에 가려져 있지만 50이 넘으면 빛을 본다고 잔뜩 희망 섞인 덕담을 했다. 결과적으로 빛 본 것 하나 없지만 들을 때는 기분 좋은 말이었다. 하여튼 이 분은 언행을 통해 자신이 뭔가 있어 보이게 만드는 특출한 재주가 있었다. 수강생들에게 꽤 인기가 있었던 강의였다. 몇 달 다니지 않아서였다. 서예 전시회를 한다고 하나씩 작품을 만들라고 했다. 초보인데 벌써 무슨 작품이냐고 손..

길위의단상 2021.04.14

랑탕 랜선 트레킹(8)

역시 고소는 고소다. 잠자는 중에도 숨이 차서 수없이 눈이 떠진다. 마치 누가 목을 조르는 것 같다. 그럴 때는 호흡을 급하게 해야 진정이 된다. 옆에 산소통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밤을 보내고 아침에 일어나니 몸이 천근만근이다. 계란후라이와 누룽지로 아침 식사를 하고 키모슝리(4,620m)로 출발한다. 고개를 젖혀야 꼭대기가 보이는 산을 오전 중에 다녀와야 한다. 어제와 달리 오늘은 몸이 무거워 걷기가 힘들다. 앞서 나가는 사람과의 간격이 점차 벌어지더니 아예 시야에서 사라져 버린다. 어제는 날았는데 오늘은 긴다. 후미 그룹도 흩어지고 맨 뒤에는 벗님과 여연, 나 이렇게 셋이다. 얼마 안 가 벗님은 도저히 못 가겠다며 포기한다. 여연과 둘뿐인데 곧 답답한지 여연마저 앞서 나간다. 결국 나와 포터만 남아..

길위의단상 2021.04.04

랑탕 렌선 트레킹(7)

오늘은 이번 트레킹의 하이라이트인 랑시샤카르카를 다녀오는 날이다. 랑시샤카르카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고 깨끗한 계곡으로 알려져 있다. 랑시샤카르카의 고도는 4,160m로 우리가 묵고 있는 캰진곰파와 비슷해서 오르내림이 없는 평지를 걷지만 왕복 24km로 길다. 평지라도 고도 4천 미터급에서 하루에 24km를 걷는다는 것은 만만치 않다. 다행히 새벽에 눈을 뜨니 몸이 개운하다. 어제 오후에 꿀맛 같은 휴식을 했기 때문이다. 오늘은 다른 롯지로 이동이 없으니 포터는 짐에서 해방이다. 포터의 휴식일인 줄 알았더니 우리 배낭을 메고 우리와 1:1로 동행한다. 귀족 트레킹을 하는 기분이다. 배낭도 없이 걸으니 몸이 날아갈 듯 가뿐하다. 처음으로 선두에 서서 신나게 걷는다. 앞선 사람, 뒤처진 사람으로 긴 행렬이 ..

길위의단상 2021.04.03

랑탕 랜선 트레킹(6)

5시에 기상하여 헤드랜턴 빛에 의지해서 짐을 싼다. 이젠 침낭을 거두는 데도 숨이 차고, 등산화 끈을 매는 데도 호흡을 가다듬어야 한다. 폐가 산소를 더 달라고 아우성친다. 여기 산소 농도는 해수면의 60%다. 새벽바람이 거세고 차갑다. 옷을 두껍게 껴입고 식당에 가서 계란후라이와 누룽지로 아침 식사를 한다. 뜨끈한 누룽지 끓인 물이 들어가니 해장을 한 듯 속이 풀어진다. 아침 해가 떠오르면 상황이 일변하고 공기는 금방 데워진다. 대기의 방해를 덜 받고 내리쬐는 햇살이 눈이 부시도록 따갑다. 하늘은 푸르다 못해 검은색이다. 공기가 희박해서 공기 분자의 산란이 그만큼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오늘은 랑탕 계곡의 끝 마을인 캰진곰파까지 간다. 캰진곰파는 랑탕 트레킹에서 베이스캠프 역할을 하는 마을로 이곳에서 랑..

길위의단상 2021.04.02

랑탕 랜선 트레킹(5)

새벽 5시 기상, 6시 아침 식사, 7시 출발이 우리의 규칙적인 일과다. 오늘은 고도 3,000m를 지난다. 개인차가 있지만 고산병이 나타나는 높이다. 고산병 예방에 도움이 된다고 해서 다이아막스를 먹다. 원래는 이뇨제인데 고산증세에도 효과가 있다고 소문이 난 약이다. 어제와 달리 선두 그룹과의 거리가 점점 멀어진다. 우리 후미 그룹도 서로의 간격이 벌어지면서 각자 따로따로 걸어간다. 단체로 왔지만 길에서는 서로 떨어져서 걷는 것도 괜찮다. 오히려 권장할 만하다. 외길이라 길을 잃을 염려도 없다. 여기서는 혼자라고 해서 불안하지 않다. 도리어 아늑하고 편안하다. 히말라야가 사랑 가득한 품으로 안아주는 것 같다. 일행과는 만났다 떨어졌다 하며 앞으로 나간다. 길은 경사가 급하지 않아 어려움이 없다. 걸어가..

길위의단상 2021.04.01

랑탕 랜선 트레킹(4)

오늘부터 본격적인 랑탕 트레킹의 시작이다. 랑탕 계곡의 존재는 1940년대에 처음으로 외부에 알려졌고, 1971년에는 네팔 최초의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랑탕(Langtang)은 ‘야크를 따라간다’는 뜻으로 어느 스님이 도망가는 야크를 따라가다가 이 아름다운 계곡을 발견했다는 데서 유래한다. 아메리카 원주민의 명명법을 닮은 이름이다. 붓다 롯지에서 6시에 일어나 물휴지로 얼굴을 훔치는 간편 세수를 한다. 히말라야에서는 물이 부족할뿐더러 찬물 세수를 하면 고산병에 걸릴 위험이 크기 때문이다. 히말라야는 게으른 사람을 좋아하는 것 같다. 7시에 아침 식사를 마치고 출발한다. 우리의 장도를 축복하는 듯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파랗다. 무거운 짐은 카고백에 담아 포터에게 넘기고, 배낭에는 물 두 통, ..

길위의단상 2021.03.31

랑탕 랜선 트레킹(3)

랑탕 트레킹의 출발점인 샤브루벤시까지 가는 날이다. 거리는 140km지만 길이 험해서 9시간이 걸린다. 새벽 5시에 기상하여 캄캄한 호텔방에서 헤드렌턴에 의지해 세수를 하고 짐을 꾸린다. 함께 떠나는 일행은 우리 팀원 12명에 현지인 가이드 2명과 포터 12명, 총 26명이다. 전세 낸 중형 버스를 타고 아침도 먹지 못한 채 출발한다. 조금만 늦으면 카트만두 시내를 빠져나가는 데 애를 먹는다고 한다. 서울이나 카트만두나 도시는 어디나 교통 체증이 문제다. 팀원 12명이 묘하게 남자 6명, 여자 6명이다. 떠나오기 전에 아내는 미심쩍은 듯 말했다. “가는 사람들이 남녀 동수라고? 설마 일부러 짝을 맞춘 건 아니지?” 마치 우리가 히말라야로 쌍쌍파티라도 떠나는 듯 아내의 말투에는 가시가 돋아 있었다. 여자의..

길위의단상 2021.03.30

랑탕 랜선 트레킹(2)

이런저런 근심이 비행기에 오르니 눈 녹듯이 사라진다. 그래 ‘케세라 세라’, 될 대로 되라지 뭐. 여행을 떠나는 맛이 본래 이런 것이다. 집을 떠날 때의 돌연한 기분 전환 즉, 익숙한 곳을 벗어나 새로운 세계로 향해 가는 기대와 설렘이다. 비행기 안에서 화장실에 가는데 낯익은 얼굴이 눈에 띈다. 중학교 동기 친구다. “야, 이게 누구로? 니 어데 가노?” 동향 사람을 만나면 사투리가 나도 모르게 터진다. 사투리는 정서적 친밀감을 주지만 과잉 수용하면 독이 되는 걸 조심해야 한다. “우리가 남이가!”로까지 나가면 곤란하다(이 친구 SNS에 들어갔다가 광화문광장에서 태극기를 흔드는 모습을 봤다. 뒷날 일이지만). 얘기를 들어보니 포카라에 열흘 정도 쉬러 간단다. 옆에는 부인이 앉아 있다. 이 친구는 안나푸르..

길위의단상 2021.03.29

랑탕 랜선 트레킹(1)

다시 히말라야 랑탕을 걷는다. 코로나 시대라 몸이 직접 가는 게 아닌 랜선 트레킹이다. 인간의 뇌는 상상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한다고 한다. 현실 같은 상상은 실제 경험과 다르지 않다는 얘기다. 이보다 경제적인 여행법이 없다. 12년 전 12명의 트레커와 걸은 코스를 함께 다시 걷기로 한다. 수업을 마치고 나오는데 복도에서 장 대장이 물었다. “안 선생, 히말라야 갈 생각 있어?” 내 대답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튀어나왔다. “좋아!” 나는 이리 굴리고 저리 따져보는 햄릿형이지만 이때는 아니었다. 오랫동안 히말라야가 내 버킷 리스트 1순위였기 때문이다. 때맞은 줄탁동시(啐啄同時)였다. 전부터 장 대장에게 히말라야에는 꼭 가고 싶다고 말해두었던 터였다. 딱히 이유는 모르지만 히말라야는 나에게 이상향이었다...

길위의단상 2021.03.28

제발

제발 국민 좀 들먹거리지 말아 다오. 국민이 너희들의 호구가 아니다. 상식과 정의를 내세우는 건 이해한다. 그건 너희들의 기득권과 조직을 위한 상식과 정의란 걸 다 안다. 어깨들이 '차카게 살자'라고 한들 분노하지는 않는다. 비웃어주면 된다. 너희들의 상식과 정의도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너희들은 뻑 하면 국민을 내세운다. 국민을 위해서 분골쇄신하겠다고 큰소리친다. 국민과 나라를 위한다는 그 의무감 좀 벗어줄 수 없겠니? 검찰총장이 짧은 성명을 내고 사표를 냈다. 그 중에 '국민'이 두 번이나 나온다. 제발 애꿎은 국민팔이는 하지 말아다오. 여든 야든, 어떤 이익집단이든 마찬가지다. 걸핏하면 국민을 위한다는 명분을 내세운다. 흑심은 숨긴 채. 국민이 너희들의 들러리는 아니다. 국민은 너희들이 앞장서지 않..

길위의단상 2021.03.07

3월 2일

등교하는 아이들을 오랜만에 본다. 오늘이 새 학기가 시작하는 날이다. 마스크를 쓴 채 느릿느릿 학교로 가는 발걸음이 무거워 보인다. 코로나 때문에 작년에는 주로 재가 학습을 했으니 교실에서 친구들과 같이 공부하는 일이 낯설지 모른다. 3월 2일이 스트레스인 건 교사였던 나도 마찬가지였다. 설레임보다 또 어떻게 일 년을 티격태격하며 보낼까, 하는 걱정이 더 컸다. 새로운 아이들을 만나는 것도 부담이었다. 나의 3월 2일은 늘 그렇게 납덩이처럼 무거운 심정으로 시작했다. "그래, 다섯 달만 버티면 방학이야." 이 말을 주문처럼 외우면서 출근했던 기억이 난다. 30년 넘게 교직에 있었지만 내 체질에는 맞지 않았다. 가르치는 일이 늘 사람과 접촉해야 해서 나 같이 사람과 부딪치는 게 서툰 입장에서는 가혹한 직업..

길위의단상 2021.03.02

설날과 세배

코로나로 이번 설은 형제들과 따로따로 지내기로 했다. 설날에 어머니가 계신 고향에 내려가지 않은 것은 처음이다. 아침에 첫째가 찾아와서 셋이 오붓하게 보내는 설날 아침이다. 오가는 고속도로의 정체 걱정도 없고, 다른 신경 쓸 일도 없다. 사람들과 접촉 없이 지내는 조용한 명절이 좋긴 하나 마음 한편이 허전한 건 어쩔 수 없다. 어릴 때 설날은 아이들의 잔칫날이었다. 설날 준비로 며칠 전부터 집안은 부산했고, 섣달 그믐날 저녁은 왁자지껄한 명절의 전야제였다. 잠을 안 자려고 버텼지만 한 번도 이긴 적은 없었다. 설날에 일어나면 먼저 차례를 지냈다. 좁은 방에서 열 명 남짓이 차례상 앞에 모이면 바싹 붙어있어야 했다. 절을 하면 아버지 엉덩이가 바로 얼굴에 닿을 정도였다. 그게 우스워 킥킥거리다가 항상 주의..

길위의단상 2021.02.12

우주정거장에서 본 지구

국제우주정거장 ISS(International Space Station)는 16개국이 참여하는 하늘에 떠 있는 다국적 우주 기지다. 크기는 축구 경기장만 하며 지상 400km 높이에서 하루에 지구를 15바퀴 정도 돈다. 400km라면 대략 서울에서 부산까지의 거리다. 지구를 사과 정도 크기로 축소하면 우주정거장은 사과 껍질에서 2m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것과 같다. 그래서 맨눈으로도 쉽게 보이고, 성능 좋은 망원경이면 형체까지 뚜렷이 볼 수 있다. 승무원은 여섯 명인데 평균 6개월 정도 체류한다. NASA 홈페이지에 들어갔다가 우주정거장에서 찍은 지구 사진을 봤다. 우리는 중력에 의해 지구 표면에 갇혀 있다. 지구 전체를 조망하는 넓은 시각을 갖고 있지 못하다. 숲을 보자면 숲 밖으로 나가야 한다. ..

길위의단상 2021.01.25

넉 달만에 이발하다

오랜만에 이발을 했다. 지난해 추석 전에 이발한 뒤로 처음이니 넉 달만이다. 코로나 바이러스를 피하기 위해 외부인과 접촉을 마다하다 보니 이발소도 발을 끊었다. 넉 달이 지나니 머리칼은 귀를 전부 가릴 정도다. 보기에는 거칠어도 바깥출입해서 타인을 만날 일이 없으니 앞으로 몇 달은 더 버틸 수가 있다. 그런데 이번 주말에 조카 결혼식이 있어서 어쩔 수 없이 머리를 깎으러 이발소를 가야 했다. 그동안 이발소보다는 미용실을 자주 이용했다. 이발소는 면도해 주는 게 영 불편했다. 나는 내 몸을 누가 만지는 게 아주 싫다. 이발소에서는 머리를 깎고나면 여자 면도사가 꼭 면도를 해 준다. 정성껏 털을 밀어준다고 볼을 잡아당기고 입술을 비틀기도 한다. 신경이 쓰여도 꾹 참을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는 "저는 면도를 ..

길위의단상 2021.01.13

내 어릴 적 겨울에는

우리 아파트 단지에는 젊은 부부가 많이 산다. 같은 층에 사는 네 가구만 봐도 노인은 우리뿐이고 다른 세 집은 3, 40대 부부 가정이다. 유치원생부터 중학생까지 아이들도 여섯 명이나 된다. 그런데 아파트 단지 안에서 아이들 보기는 힘들다. 등교할 때 잠깐 북적이지만 다른 시간에는 조용하다. 다들 어디로 숨었는지 모르겠다. 코로나 이전에도 다르지 않았다. 제일 넓은 공터인 초등학교 운동장에서도 운동하기 위해 나온 어른들이 많지 아이들은 보이지 않는다. 아이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손주를 봐도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기보다는 집에서 엄마와 둘이 지내는 시간이 많다. 친구와 노는 시간은 태권도학원에 나가서다. 요사이 아이들은 제멋대로 뛰어노는 게 아니라 프로그램화된 틀에 따라 움직인다. 그걸 보면 붕어..

길위의단상 2021.01.03

음치는 서러워

전 직장 동료 다섯이 모이는 작은 모임이 있다. 올해는 코로나 때문에 봄에 한 번 만난 뒤로는 대면 모임을 갖지 못했다. 대신 단톡방에서 살아가는 얘기를 나눈다. 며칠 전에 A가 55년 전 중학생 때 일화를 하나 올렸다. 그때 기말고사 음악 시험은 실기평가로 한 사람씩 선생님 앞에 나가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지정곡은 홍난파의 '고향 생각'이었다. 반 전체의 평가를 마친 후 음악 선생님이 이렇게 말했다. "내가 여러분에게 음악 점수 '양'을 줄 수는 없다. 70점이 안 되는 학생은 다시 한번 노래할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 그러면서 재시험 볼 학생 이름을 불렀는데 일고여덟 명 속에 A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만큼 노래에는 자신이 없었다. A는 다시 노래를 불렀고 가까스로 음악 점수 '미'를 받았다는 얘기..

길위의단상 2020.12.26

어떤 실수

겨울이 되면 피부가 건조해진다. 특히 다리 부위가 간지럽고 꺼칠하다. 보름 전쯤 아내에게 피부 보습제를 부탁했더니 병 하나를 가져다주었다. 발라보니 전과 달리 끈적끈적한 게 느낌이 이상했다. 그렇지만 아내가 좋은 거라고 말했으니 의심 않고 두 주 정도 열심히 사용했다. 그런데 가려움증이 없어지지 않고 도리어 더 자주 긁게 되었다. 다리를 살펴보니 붉은 반점이 쫙 깔려 있는 게 아닌가. 수상쩍어서 병을 봤더니 이런, 이건 보습제가 아니라 바디와셔였다. 샤워하고 비누기를 없앤 다음에 다시 비누를 잔뜩 바른 셈이었다. 피부 트러블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나마 몸 전체에 바르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병을 보니 착각하게도 생겼다. 상표 이름만 영어로 크게 적혀 있고, 내용물에 대한 한글 설명은 깨알 같은 ..

길위의단상 2020.12.15

2020 천체사진

영국 그리니치천문대에서는 매년 천체사진을 공모한다. 전 세계에서 출품한 우수한 사진을 많이 볼 수 있기에 개인적으로 관심이 많다. 올해 수상작 중에서 눈에 띄는 몇 작품을 골라 보았다. 1. 오로라 부문 - Lone Tree under a Scandinavian Aurora(Nikon D850, 15mm, ISO 1000, 13s) - Hamnoy Lights(Nikon Z7, 17mm, ISO 800, 10s) 요사이 사진에 푹 빠진 친구가 아이슬란드로 오로라 사진을 찍으로 간다고 한다. 원래는 올 겨울이었는데 코로라 때문에 내년으로 미루어질 것 같다. 나도 그 팀에 끼워달라고 부탁해 놓았다. 2. 태양 부문 - Total Solar Eclipse, Venus and the Red Giant Betel..

길위의단상 2020.12.06

승리의 키스

1945년 8월 14일, 일본이 항복하고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뉴욕 메디슨 스퀘어 광장에는 축하하는 사람들이 몰려나왔다. 서로 환호하고 키스하며 기쁨을 나눌 때 한 커플의 열정적인 키스가 사진기자인 에이젠슈테트(A. Eisenstaedt)의 렌즈에 담겼다. 에 실려서 유명하게 된 '승리의 키스'다. 해군 복장을 한 군인과 그의 연인이 재회하며 뜨겁게 키스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실상은 다르다는 걸 최근에 알았다. 둘은 전혀 모르는 사이였다. 애인과 술을 마신 뒤 거리로 나온 남자는 무조건 지나가는 여자를 붙들고 키스를 했다. 이 모습이 기자의 눈에 포착되었고, 마침내 하얀 복장을 한 간호사와 키스하는 장면을 찍을 수 있었다. 피사체의 옷 색깔도 중요한 고려 사항이었다고 한다. 만약 여자의 복장이 어두..

길위의단상 2020.11.25

두 에피소드

아침을 먹은 뒤 커피를 마시며 TV를 보는데 출연자들이 얼굴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그중 한 사람이 자신이 젊을 때는 동안(童顔)이라는 소리를 늘 들었는데, 나이가 드니까 반대로 다른 사람보다 빨리 노안(老顔)이 되는 것 같다고 한다. 나도 공감이 가는 얘기였다. 언뜻 그에 얽힌 두 에피소드가 떠오른다. # 1 대학을 졸업하고 교직에 나선 게 스물 세 살이었다. 만으로는 스물둘에 선생을 시작했다. 또래보다 한 해 먼저 초등학교에 입학했고, 군대도 가기 전이었기 때문이다. 그때만 해도 나 역시 동안이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 그해 겨울에 예비고사 감독관을 나가게 되었다. 시험 전날에 수험생 예비 소집을 했는데, 고사장 운동장에서 출석 확인을 하는 게 감독관의 임무였다. 마이크로 전체 주의사항을 전달하는 동안..

길위의단상 2020.11.16

한 장의 사진(26)

학교에 행사가 있던 날이었다. 남은 술과 안주를 미리 숙직실에 챙겨 두었다. 내가 숙직하는 날이었고, 술꾼들은 자연스레 숙직실로 모였다. 그때는 남교사가 돌아가며 학교를 지키는 숙직을 했다. 여교사가 많은 학교에서는 한 달에 두세 번 정도씩 차례가 돌아왔다. 하는 일은 별로 없었다. 야간 순찰은 학교에서 고용한 아저씨가 돌기 때문에 전화나 받고 자리만 지키는 정도였다. 결혼한 사람은 불편하게 여겼지만, 총각은 오히려 숙직을 좋아했다. 집에 갔다 왔다 하는 것보다 학교에서 자는 게 편했기 때문이다. 숙직을 하면 술판이 벌어지는 경우가 흔했다. 밖에서 한잔 걸치고는 술을 사 가지고 숙직실로 쳐들어가기도 했다. 취해서 흥이 나면 교무실에 들어가 앰프함을 열고 회의할 때 사용하는 마이크로 노래자랑도 했다. 원조..

길위의단상 2020.11.10

상처 입은 천사

핀란드 화가인 휴고 게르하르트 심베리(H. G. Simberg, 1873~1917)가 그린 '상처 입은 천사(Wounded Angel)'라는 작품이다. 이 그림을 처음 본 것은 20년 전쯤 현직에 있을 때 전교조에서 펴낸 소책자에서였다. 당시는 청소년 자살이 사회문제로 대두했고,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라는 말이 유행하던 때였다. 이 그림은 우리 교육 현실을 고발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져, 지금도 무척 인상적으로 남아 있다. 그림의 분위기는 어둡고 황량하다. 땅에는 나무 한 그루와 꽃 몇 송이가 피어 있을 뿐 황무지와 비슷하다. 먼 산이나 호수도 회색이다. 무엇에 다쳤는지 상처 입은 천사가 들것에 실려 간다. 천사의 눈은 가려져 있다. 천사를 나르는 둘 중 뒤에 있는 아이의 얼굴에는 ..

길위의단상 2020.11.07

학교가 가르치지 않는 것

교육 현장에 있을 때 자괴감이 컸다. 내가 생각하는 교육의 이상과 현실 사이에 엄청난 벽이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담임을 안 맡거나 보충수업을 거부하는 등 나는 고작 소극적 저항만 할 수 있었다. 고백하건대 아이들을 신나게 가르쳐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제도권 교육에 실망한 일부 학부모는 대안학교를 택하기도 한다. 우리 교육의 문제점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대부분은 눈을 감고 실상을 외면한다. 아웃사이더가 되기로 결심하지 않는 한 현실을 수용하고 체념한다. 잘못된 길이란 걸 알면서도 따라갈 수밖에 없는 사실은 비극이다. 세계에는 우리와 다른 식으로 교육이 이루어지는 나라도 많다. 유럽의 교육 제도, 그중에서도 독일의 교육을 본받을 필요가 있다. 더 이상 청소년 우울증과 자살률 1위의 지옥 나라가 ..

길위의단상 2020.10.28

마음대로 안 된다

어쩌다 보니 모임 세 개가 한 날에 겹쳤다. 그동안 코로나 핑계를 대고 모임에는 거의 안 나갔는데, 슬슬 움직여 보려니까 한꺼번에 몰리는 행운인지 불상사인지 모를 일이 일어났다. 고민하다가 결국은 설악산에 단풍 보러 가는 모임을 점 찍었다. 단풍은 때가 있는지라 이번에 안 가면 일 년을 기다려야 하므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더구나 십이선녀탕 단풍은 처음이기에 기대가 컸다. 그런데 호사다마일까, 에너지를 보충할 겸 전날 저녁에 고기를 구워 포식하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는데 속이 부글거리기 시작했다. 소화를 시키지도 않은 채 누운 게 화근이 된 것 같았다. 계속 화장실을 들락거리느라 거의 잠을 자지 못했다. 아침이 되니 속은 비었는데도 밥 한술 뜰 수 없었다. 설악산이고 뭐고 만사가 귀찮아졌다. 둘째에게..

길위의단상 2020.10.16

블루 라이트 요코하마

M 중학교에 근무할 때였으니 1980년대 초반이었다. 일과가 끝나고 퇴근하는 길에는 그냥 집으로 가는 날이 드물었다. 학교 앞에 있는 동그랑땡 집에서 소주를 적당히 마신 뒤, 대개 입가심으로 한 잔 더 하자면서 호프집으로 가는 게 정해진 코스였다. 호프집 안주는 보통 노가리와 마른안주였다. 그날은 교감이 동행했고 역시 순서대로 이차 호프집에 자리를 잡았다. 교감은 일본에 있는 한국문화원에서 근무하다가 귀국해서 M 중학교에 부임해 왔다. 교감과 함께 있으면 술자리의 화제는 자연히 일본 얘기가 많았다. 교감은 일본으로부터는 배울 게 많다는 걸 늘 강조하는 지일파였고, 일본에 대단히 우호적이었다. 그날은 일본 문화 얘기를 하다가 흥이 났는지 일본 노래를 불렀다. 당신이 일제 강점기 때 학교에서 배웠던 노래로 ..

길위의단상 2020.09.18

금란교회의 추억

금란교회 하면 개신교 신자든 비신자든 한 번은 이름을 들어봤을 것이다. 등록된 교인 수가 14만 명이 되는 감리교회 중에서는 세계 최대의 교회다. 또, 워낙 유명세를 탄 김홍도 목사가 시무한 교회로 보수 반공 이념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지난 2일에 김홍도 목사가 별세했는데, 전광훈을 길러낸 스승이었다는 보도가 지면에 실렸다. 나도 금란교회와 김홍도 목사와의 짧은 인연이 있으므로, 그분의 부고에 잠시 숙연해지며 거의 50년 전 옛일이 손에 잡힐 듯 다가온다. 나는 1970년대 초중반에 금란교회 신자였다. 1972년, 대학교 2학년생일 때 금란교회에 처음 나갔다. 같은 과 친구가 소개해 주면서 담임목사의 영적 능력이 굉장하다고 말했다. 그때는 김홍도 목사가 금란교회에 막 부임했을 때였다. 처음 교회를 나가..

길위의단상 2020.09.06

친일과 대한민국

친구가 카톡으로 긴 글을 보내 주었다. 글쓴이는 서강대학교 철학과 명예교수인 최진석 선생이다. 전에 EBS를 통해 선생의 노자 강의를 감명 깊게 들었던 적이 있다. 작금의 우리 사회는 이념 갈등으로 진통을 겪고 있다. 해방 직후의 좌우 대립 상황을 보는 것 같다. 성숙한 대한민국으로 가기 위해서는 어차피 한 번은 견뎌내야 할 통과의례인지 모른다. 청산하지 못한 역사는 언젠가는 발목을 잡는다. 친일과 반일에 관련된 논란도 그중 하나다.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는 독단만큼 위험한 것은 없다. 나와 생각이 다른 부분이 많지만 선생의 견해 역시 경청할 만하다고 생각한다. 가을호에 실린 따끈따끈한 글이다. 친일과 대한민국 / 최진석 조국과 민족의 번영을 꿈꾸는 나는 작년 7월에 발표한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글을 ..

길위의단상 2020.09.01

시무7조 상소와 하교문

청와대 국민 청원 게시판에 올라온 '시무(時務)7조 상소문'이 화제다. 글쓴이는 진인(塵人) 조은산이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상당한 필력을 갖춘 분이 아닌가 싶다. 이분 논리에는 동의하지 않으나 글재주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분 글을 옮겨 적다 보니 우리 사회의 공동체 정신이 무척 아쉽다는 걸 느낀다. 보수의 첫째 가치는 공동체라고 나는 알고 있다. 그런데 지금은 민족을 경시하고 사리 추구와 외세 의존이 보수의 아이콘이 되어가고 있다. 일부 극우의 사상이 점점 확산하고 있는 느낌을 받는다. 이분 글의 오독인 줄 모르지만, 내 가진 것을 앗기기 싫다는 혜택받은 자의 억지투정으로 읽힌다. 사악하다고까지는 차마 말하지 않겠다. 우리 사회의 문제점이 많지만 그중에서 가장 큰 문제점이 양극화라고 나는 생각한다..

길위의단상 2020.08.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