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

샌. 2012. 11. 14. 10:07

나는 만 여섯 살에 초등학교에 들어갔다. 당시는 일곱 살이 입학연령이었고, 그것마저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아 오히려 한 해 늦은 여덟 살에 가는 경우가 많았다. 내 경우는 면사무소에 근무하시던 선친이 미리 가서 한글이라도 익히라도 임시로 한 해 먼저 보낸 것이었다. 말하자면 편법 입학생이었다. 그런데 학교도 그럭저럭 다니고 공부도 뒤처지지 않으니까 담임이 그대로 진급시키라고 해서 졸지에 정식 학생이 되어 버렸다. 본의 아니게 동기들보다 한 살 아니면 두 살이 어린 처지가 된 것이다. 마을의 같은 또래는 자동으로 내 후배가 되었다.

 

키도 작고 마음도 여린 아이가 한두 해 먼저 자란 아이들 사이에서 지내는 게 만만치 않았다. 놀이에서는 늘 뒤쳐졌고, 정신 나이도 한두 레벨은 아래였다. 산과 들로 뛰어다니며 무리를 지어 노는 게 시골 아이들의 일상인데 나는 대개 뒤꽁무니를 따라다녔다. 딱지치기나 구슬치기, 자치기 같은 내기에서 이긴다는 건 드문 일이었다. 몸을 부딪치며 하는 게임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덩치 큰 아이들의 짓궂은 장난에는 아예 끼지도 못했다. 그러니 성격은 더욱 소극적이고 움츠러들었다. 내 성격이라면 차라리 한 해 늦게 들어가야 맞거늘 그 반대였으니 스트레스와 열등감이 컸다. 매사에 자신감이 부족한 아이가 되어 갔다.

 

내가 잘할 수 있는 건 공부밖에 없었다. 가난해서 배우지 못한 게 한이 되신 아버지는 장남인 아들에게 모든 기대를 거셨다. 아버지는 자식이 공부하는 모습을 제일 좋아하셨다. 큰소리로 책을 읽으면 흐뭇하게 바라보시곤 했다. 아버지가 퇴근할 시간이 되면 밖에서 놀다가도 집으로 돌아와 공부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게 가정의 평화를 위하는 길이었다. 동구 밖에 자전거를 타고 돌아오시는 아버지 모습이 보이면 내 목소리는 더욱 커졌다. 그러면 대문을 들어서시는 아버지 얼굴에 환한 웃음꽃이 피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집안일을 거들어야 하는 아이들에 비해 나는 공부만 하면 되었다. 부모님은 다른 것은 아꼈지만 공부하는데 드는 돈은 빚을 내서라도 당장 해결해 주셨다. 여건이 안 되는 아이에 비해 나는 월등히 나은 환경이었다. 이래도 성적을 못 올릴 순 없을 것이었다. 소심하고 유약한 아이가 그나마 왕따나 괴롭힘을 당하지 않고 지낼 수 있었던 건 아버지의 후광에 따른 공부 탓이었다. 방학이면 마을별로 아이들이 모여 공부하는 모임이 있었는데 나는 거기서 선생 역할을 하며 회초리를 휘둘렀다. 선생님의 명령이었기에 순진한 아이들은 나에게 거역할 수 없었다. 유일하게 큰소리칠 수 있었던 때였다. 학창 시절의 열등감을 만회하기 위해서는 공부를 잘하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그런 점에서 공부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고 다행히 공부가 제일 쉬웠다. 다른 건 아무리 해도 내 능력 밖이었다.

 

중학교에 다닐 때까지는 선생님의 귀여움을 받았다. 공부도 그런대로 하고 말도 잘 듣는 얌전한 학생을 싫어할 선생님은 없을 것이다. 그때는 키 순서대로 출석번호를 정했는데 초중고 12년 동안 한 번도 5번 밖으로 벗어나질 못했다. 칠판 맨 앞줄이 늘 내 자리였다. 그러니 '귀엽다'는 나를 트레이드 마크처럼 따라붙었다. 선생님만 아니고 교실 뒷자리에 앉은 아이들에게서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는 선생을 하던 50대였을 때도 제자들로부터 종종 그런 말을 들었다. "선생님, 너무 귀여워요!" 그럴 때면 내가 무슨 팔자를 타고 나서 이럴까, 하고 속으로 실소를 했다.

 

남자가 귀엽다는 소리를 계속 듣는 것도 마냥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고등학생이 되고 사춘기가 찾아오면서는 더욱 예민해졌다. 키 작고 어린 열등감에 더해 경상도 사투리 때문에 생긴 놀림도 견디기 어려웠다. 서울로 유학 오면서는 말이 더욱 없어졌다. 개콘에 '네 가지'라는 코너가 있는데 거기에 나오는 인기 없는 남자, 촌티 나는 남자, 키 작은 남자를 한데 합친 것이 그때의 나 같았다는 생각이 든다. 언젠가 사람들에게 학생 시절의 열등의식을 얘기했더니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다 무언가의 고민이 있겠지만 나 역시 곱고 귀엽게만 자란 건 아니었다. 겉은 문제없어 보였을지라도 속에는 어두운 그늘이 있었다.

 

결혼을 마음먹고 처가에 인사를 드리러 갔을 때였다. 나를 처음 본 장모님이 내 얼굴에 깃든 어두운 구석을 걱정했다는 말을 나중에 들었다. "다 괜찮은데 얼굴의 그늘이 마음에 걸린다." 40대를 넘어서면서부터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이런 소리를 듣지 않게 되었다. 지금은 내 표정에서 그늘은 거의 탈색되었다.

 

공부를 못 한 사람에게는 공부가 얼마나 한(恨)이 되는 물건인지를 잘 안다. 그런 사람에게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라는 말은 조롱으로 들릴 수도 있다. 우리 시절만 해도 공부를 하고 싶어도 가정 형편으로 포기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점에서 공부만큼은 원 없이 해 본 나는 행운아다. 운 좋게 좋은 환경을 타고났을 뿐이었음을 잘 안다. 그러나 멍청하게도 대학에 들어가서는 정작 공부에서 떠나버렸으니 애쓴 노력의 결과물을 챙기지는 못했다. 연습은 열심히 해 놓고 본 게임은 포기한 꼴이다.

 

대학생 때 외도가 차라리 지금의 나를 만든 바탕이 되었다. 과에서 꼴찌가 되도록 전공 공부를 내팽개친 건 너무 착실했었던 중고등 시절의 반작용이었는지 모른다. 그때는 과 연구실에 모여 앉은 책벌레들이 한심하게 보였다. 바로 몇 년 전까지의 내 모습도 그랬을 것이다. 180도 반대 입장이 되었다. 그런데 헛걸음을 걸은 것 같았던 그 시절이 나에게는 귀한 경험의 때였음을 늦게서야 알았다. 방황은 계측할 수 없는 가치를 가지고 있다. 세상이 말하는 정도(正道)보다는 차라리 사도(邪道)에 보배가 숨겨져 있는지 모른다.

 

학생이었을 때에는 인생의 전부인 것 같던 공부가 지나고 보니 별것 아님을 알아가고 있다. 공부하고 책 보는 외에는 잘하는 게 없는 나를 돌아보니 더욱 그렇다. 성적 때문에 주눅이 들었던 동기들이 지금은 누구보다 훨씬 더 사람 노릇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공부가 책 속에만 있는 게 아니다. 반쪽 짜리 인간이 되지 않으려면 책 공부 외에 다양한 인생 경험을 쌓아야 한다. 공부가 제일 쉬웠다고 말했지만 그건 결핍과 아쉬움이 묻어 있는 고백이다. 책이 채워줄 수 없는 부분이 있다는 게 나이가 들수록 더욱 분명히 드러난다.


 

'길위의단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주 올레길 420km  (0) 2012.11.27
화를 내라, 그러나 잘 내라  (0) 2012.11.22
Daughter of Dictator  (0) 2012.11.02
결혼하는 아들에게 주는 당부  (0) 2012.10.30
오면 반갑고, 가면 더 반갑고  (0) 2012.1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