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속일상

정몽주 묘

샌. 2014. 5. 1. 17:06

 

용인시 모현면 능원리에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1337~1392) 선생의 묘가 있다. 모현(慕賢)이나 능원(陵院)이라는 지명이 모두 이곳에 있는 정몽주 묘에서 유래된 것 같다.

 

원래 이성계, 정몽주, 정도전은 고려를 개혁하려는 한 뜻이 있었다. 특히 다섯 살 아래인 정도전과는 성균관에서 같이 근무하며 깊은 우정을 나누었다. 세상을 바꾸려는 의지는 같았지만 방법론에서 둘은 갈라졌고, 서로 다른 길을 갔다. 정몽주가 온건 개혁파라면 정도전은 급진 혁명주의자였다. 정몽주는 유학에 기반을 둔 명분에 집착했고, 정도전은 새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는 역성혁명마저 불사했다. 정몽주는 고려의 마지막을 지켰고, 정도전은 새로운 세상을 열었다.

 

정몽주와 정도전 중 어느 길이 옳은가를 가르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다만 좋은 세상을 만들려는 그분들의 진심만은 믿어주고 싶다. 불행하게도 권력욕의 화신인 이방원에 의해 두 사람 모두 죽임을 당했다. 시대가 요구하는 역할을 맡고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한 것이다. 정몽주는 충절의 대명사로 기려져 훗날 이방원에 의해서 문충공이란 시호를 받고 복권된다. 권력자에겐 정몽주의 임금과 나라에 대한 충성이 절대로 필요했을 것이다.

 

반면에 정도전은 조선을 세운 으뜸가는 개국공신이었지만 비참한 최후를 맞고 역신(逆臣)으로 몰려 무덤조차 남아 있지 않다. 정도전의 혁명 정신은 지배층이 보기에 위험하고 불온한 사상이었을 것이다. 중고등학교 때 역사 시간을 돌아봐도 정도전에 대해서는 별로 들어본 적이 없다. 체제 파괴자를 기리고 싶은 지배층은 없을 것이다. 말 잘 듣는 백성이 필요할 뿐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정도전의 틀에 매이지 않은 자유정신이 아닌가 싶다.

 

"움직이지 마세요!"라는 어처구니없는 지시를 그대로 따르다가 300명이 넘는 사람이 죽었다. 배가 뒤집히고 있는데도 반복되는 이 지시는 분명 잘못된 것이었다. 이런 비상사태에서 메시지가 위험하다는 걸 깨닫고 탈출을 했다면 일부 혼란은 있었을지라도 많은 생명이 살았을 것이다. 그런데 아이들이 녹화한 영상을 보면 최후의 순간까지도 방송으로 나오는 말을 천진난만하게 믿었던 걸 볼 수 있다. 배가 기울기 시작해 가라앉는 두 시간 동안 선실에서 가만히 기다리다가 죽는다는 게 말이 되는가. 이게 너무 억울하고 속상하다.

 

강요된 질서는 사람을 죽인다. 신뢰라고 다 좋은 게 아니다. 어른과 세상에 대한 무비판적인 믿음은 도리어 독이 된다. 우리가 하는 교육이 아이들을 지나치게 순종적으로 만들지는 않는지 반성해 본다. 정몽주는 이성계와 정도전의 체제 전복 계획에 결코 찬동할 수 없었다. 그러나 무엇에 가치를 두느냐에 따라 상상하지 못할 일은 없다. 

 

 

 

 

 

 

 

 

정몽주 선생의 묘에서 이런저런 생각에 잠겼다. 무덤 주위에는 제비꽃을 비롯해 여러 꽃이 만발했다. 묘역은 왕릉처럼 규모가 크고 잘 가꿔져 있었다.

 

입구에는 선생의 '단심가(丹心歌)' 비가 있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선생이 노래한 '님'이 고작 임금이나 고려 왕조는 아니었을 것이다. 더 크고 진실된 '그 무엇'이었을 것이라고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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