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연속극 유감

샌. 2014. 5. 12. 09:27

다른 나라도 그런지 모르지만, 우리나라 TV는 연속극을 너무 많이 방송하는 것 같다. 그것도 황금시간대에 주로 편성이 되어 있다. 수요가 있으니까 방송을 하겠지만 나같이 연속극을 보지 않는 사람은 채널 선택권을 박탈당한 기분이다. 한류 열풍의 일등공신이 드라마니 무조건 나무랄 일도 아니나, 아무래도 입맛이 쓴 건 사실이다. TV를 바보상자라 부르는 건 넋을 놓고 연속극에 빠지는 현상을 나무란 것이다.

 

연속극 보는 걸 폄하하고 싶지는 않지만, 과연 책을 읽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를 생각하면 한심해진다. 한국인의 지적 수준을 하향 평준화시키는데 연속극의 공헌을 빼놓을 수 없다. 배운 사람이나 못 배운 사람이나 나이 들면 비슷해진다는 농담도 있다. 사람들의 TV 연속극에 대한 몰두가 불가사의하다. 막장이라고 욕은 하면서 오히려 더 열심히 기다리니 말이다. 만약 시청률이 낮다면 그런 프로를 애써 만들 방송국은 없을 것이다.

 

연속극의 주 시청자는 여자들인 것 같다. 그런데 친구들과 얘기하다 보면 남자도 연속극을 화제에 올리는 경우가 있다. 누구는 어떻다느니 하며 탤런트 비평도 따른다. 그럼 나는 의아한 듯이 묻는다. "아니, 연속극도 보는 거야?" 그럼 내 취향을 아는 친구는 멋쩍게 말한다. "마누라가 연속극 볼 때 뭣 해? 같이 옆에 있다가 보는 거지." 그리고 요즘 연속극은 멋지게 잘 만든다는 칭찬도 대개 따라온다. 한 번 보기 시작하면 빠질 수밖에 없다는 소리다. 뭔가 다르다고 생각되는 사람도 연속극 앞에서는 만인 평등이다.

 

나는 연속극을 안 본 지가 오래되었다. 연예나 오락 프로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잘 나가는 탤런트나 연예인을 거의 모른다. 중국에 갔을 때 거리 광고판에 나온 이영애도 몰라본다고 한국 사람 맞느냐는 핀잔을 듣기도 했다. 그런데 금년 들어 예외가 생겼다. KBS 사극 '정도전'에 관심이 있어 시간이 날 때 TV 다시보기를 통해 시청한다. 역사 공부를 하는 학생처럼 TV 앞에 앉는다. 덕분에 정도전에 관한 책도 찾아보게 되었다.

 

내가 보는 드라마는 좋은 드라마고, 남이 보는 것은 나쁜 드라마라고 구분 짓는 건 아니다. 중독이 되어 있느냐의 문제다. 연속극 중독은 알콜중독보다 더 무서울 수 있다. 나쁜 드라마는 현실에 대한 비판의식을 마비시킨다. 부창부수(夫唱婦隨)라고 아내도 연속극과는 거리가 멀다. 우리가 무슨 개똥철학이라도 있어서 연속극을 피하는 건 아니다. 흥미를 못 느낄 따름이다. 다음 스토리에 조마조마하지 않게 처음부터 안 보려는 게 맞다. 연속극에 중독되지 않은 아내가 나에게는 무척 고맙다.


도올 선생의 책에서 이런 말을 보았다. "텔레비전 연속극을 안 보는 삶이 위대한 삶이다. 일상생활에서 텔레비전을 안 보는 사람이 반은 되어야 그 나라가 건강한 나라라고 말할 수 있다." 오죽했으면 텔레비전 연속극을 안 보는 게 위대한 삶이라고까지 말했을까. 그런데 산속에서 사는 자연인이라면 모를까, 현대 도시 생활에서 텔레비전을 외면한다는 건 어려운 일이다. 나는 선생의 말을 약간 순화시켜 이렇게 말하고 싶다. "텔레비전 연속극을 안 보는 삶이 좋은 삶이다. 일상생활에서 텔레비전을 보는 시간만큼 책을 읽는 사람이 반은 되어야 그 나라가 건강한 나라라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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