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인기 없는 에세이

샌. 2014. 6. 21. 08:19

러셀의 에세이 모음집으로 러셀 특유의 유머와 풍자를 확인할 수 있다. 15년에 걸쳐 발표했던 여러 종류의 글이 모여 있지만 러셀이 평생을 추구했던 일관된 가치가 바탕이 되고 있는 건 물론이다. 그가 지키려 했던 진보적 가치는 자유, 민주주의, 정의, 복지, 관용 등이었다.

 

<인기 없는 에세이>에 실려 있는 12편의 글 중 눈에 띄는 게 '인류의 미래'와 '지적 쓰레기들의 간략한 계보'다. 후자는 이 책의 부제로도 이름이 올라 있다.

 

미래에 대한 러셀의 생각이 '인류의 미래'에 잘 드러나 있다. 2차대전이 끝나고 나서 쓰여진 탓인지 내용은 상당히 비관적이다. 러셀은 20세기가 끝나기 전에 다음 세 가지 가능성 가운데 하나가 실현될 것이라고 보았다.

 

1. 모든 인간, 어쩌면 지구에 사는 모든 생명체가 종말을 맞는다.

2. 인구가 파국적으로 감소하여 야만 상태로 돌아간다.

3. 주요 전쟁 무기를 모두 독점한 단일 정부가 전 세계를 통일한다.

 

20세기가 지나갔지만 러셀의 예언은 빗나갔다. 러셀이 가장 가능성이 크다고 본 세 번째 경우는 3차 세계대전 후 미국과 소련 중 어느 한쪽이 승리함으로써 전 세계를 지배하고 평화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본 것이다. 러셀은 국지적 전쟁이나 혼란이 지속되는 것보다는 차라리 세계 제국이 등장하는 게 인류를 위해 낫다고 보았다. 단일 정부와 단일 군대에 의해 힘으로 유지되는 평화를 원한 것이다. 일종의 법가 사상과 유사한데 러셀답지 않은 논리여서 조금은 놀랐다. 그러나 러셀이 이 글을 쓸 당시에 핵에 대한 공포가 얼마나 컸던지를 돌아보면 이해하지 못할 바도 아니다.

 

'지적 쓰레기들의 간략한 계보'는 이성적 동물이라는 인간의 미망과 광기를 드러내는 글이다. 특히 종교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인간의 어리석음과 야만적 행동을 고발한다. 수학자이기도 했던 러셀은 기본적으로 과학의 합리적 정신을 존중한 사람이다. '지적 쓰레기'라는 말 속에는 비과학적이고 비합리적인 것에 대한 경멸이 담겨 있다.

 

러셀은 독단에서 벗어나는 방법으로 자신이 속한 사회적 집단에서 떠나 다른 집단이 지닌 견해를 알아보라고 권한다. 당신이 동의하지 않는 사람을 찾아 나서는 것이다. 또는 당신이 지지하지 않는 정당에 소속된 신문을 찾아 읽는다. 당신이 보기에 그 사람들과 신문이 미쳤거나 심술궂거나 사악하다면, 당신 역시 그들 눈에 그렇게 보인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양쪽 모두 옳을 수는 있지만 틀릴 수는 없다. 이렇게 반성하다 보면 틀림없이 신중한 견해를 갖게 된다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소위 지식인이라 자처하는 이들의 설익은 행태가 떠올랐다. 비뚤어진 신념으로 무장된 지식 장사치들만이 횡행하는 세상이다. 러셀 같은 깊이 있는 지성인이 우리 옆에는 왜 보이지 않는 것일까. 그래서 더욱 어둡게 느껴지는 현실이다.

 

"어느 시대에나 그러했듯이 우리 시대에도 현명한 사람은 세상에 많고 많은 갖가지 즐거움을 만끽할 것이며, 한편으로는 지적 쓰레기 또한 지긋지긋하게 많이 발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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