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온몸으로 기뻐하기

샌. 2015. 6. 9. 09:18

7개월 된 둘째 손주가 있다. 태어나서 조금씩 조금씩 자라고 배워가는 모습을 보면 생명의 신비에 경탄하게 된다. 아직 제힘으로 자리를 옮기지도 못하고 말도 못하지만 저를 돌봐주는 사람은 알아본다. 얼마 전까지도 날 보면 무섭다고 울었는데 지금은 낯이 익었다. 가끔 만나도 처음에는 빤히 쳐다보다가 이내 좋아라 한다.

 

그런데 아기가 사람을 반기는 모습을 보면 놀라운 데가 있다. 얼굴로 환하게 웃는 건 물론이고 입을 벌리면서 두 팔을 허공에 뒤흔든다. 좋아하는 마음이 온몸으로 드러난다. 기쁨이 전신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작은 존재가 즐거움에 온전히 젖어 있는 걸 느낀다.

 

반면에 어른은 무엇이 좋다고 이렇게 환호하지를 못한다. 내숭을 떨기도 하고, 밀당의 줄다리기를 잘하는 비결을 배우기도 한다. 좋다는 감정에 계산이 끼어드는 것이다. 이것은 제 이익이나 체면을 고려하기 때문이다. 아기에게는 그런 그림자가 전혀 없다. 좋으면 좋은 것이다.

 

어른이 된다는 건 생명의 순수성을 잃어버리는 과정이다.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라는 말이 손주를 보면서 실감한다. 유년기를 지났다는 건 낙원에서 추방되었다는 뜻과 같다. 우리가 아기에 경탄하는 건 잃어버린 순수성에 대한 동경이지 싶다.

 

삶은 원래 이렇게 희비의 감정으로 충만한 것인지 모른다. 인생은 기쁨과 슬픔을 오가는 시계추 같다는 말을 한다. 진폭이 작을수록 감정의 변화가 작은 것이다. 그러다가 가운데서 멈추면 죽음이다. 그런데 아기는 기쁠 때는 온몸으로 환호하고, 슬플 때는 역시 온몸으로 운다. 시계추 진폭이 최대치를 가리킨다. 그래도 시달리거나 괴롭지 않은 이유는 희비가 마음에 흔적을 남기지 않기 때문이다. 오직 현재에 충실하고 집중한다.

 

단순히 귀엽다는 차원을 넘어 아기와 함께 있으면 생명의 본질과 마주하는 것 같다. 어른이 가지지 못한 것, 그래서 안타까이 바라보게 되는 것, 아기에게는 우리를 매료시키는 그 무엇이 있다. 손주를 예뻐하는 배경에는 핏줄을 넘어 생명의 원형에 대한 향수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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