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나는 투표했다 / 류시화

샌. 2022. 6. 2. 09:31

나는 첫 민들레에게 투표했다

봄이 왔다고 재잘대는 시냇물에게 투표했다

어둠 속에서 홀로 지저귀며

노래값 올리는 밤새에게 투표했다

다른 꽃들이 흙 속에 잠들어 있을 때

연약한 이마로 언 땅을 뚫고

유일하게 품은 노란색 다 풀어 꽃 피우는

얼음새꽃에게 투표했다

 

나는 흰백일홍에게 투표했다

백 일 동안 피고 지고 다시 피는 것이

백일을 사는 방법임을 아는 꽃에게 투표했다

부적처럼 희망을 고이 접어

가슴께에 품는 야생 기러기에게 투표했다

나는 잘린 가지에 돋는 새순의 연두색 용지에 투표했다

선택된 정의 앞에서는 투명해져 버리는

투표용지에 투표했다

'내가 틀릴 수도 있다'와 '네가 틀릴 수도 있다' 중에서

'내가 틀릴 수도 있다'에 투표했다

'나는 바다이다'라고 노래하는 물방울에게 투표했다

 

나는 별들이 밤하늘에 쓰는 문장에 투표했다

삶이 나에게 화가 난 것이 아니라

내가 삶에게 화가 난 것이라는 문장에,

아픔의 시작은 다른 사람에게 있을지라도

그 아픔 끝내는 것은 나에게 달려 있다는 문장에,

오늘은 나의 몫, 내일은 신의 몫이라는 문장에 투표했다

 

내 가슴이 색을 잃었을 때

물감 빌려주는 엉겅퀴에게 나는 투표했다

새벽을 훔쳐 멀리 달아났던 스무 살에게,

몸은 돌아왔으나 마음은 그 시간에 머물러 있는

사랑에게 투표했다

행복과 고통이 양쪽 면에 새겨져 있지만

고통 쪽은 다 닳아 버린 동전에게 투표했다

시의 행간에서 숨을 멈추는 사람에게 투표했다

 

- 나는 투표했다 / 류시화

 

 

지난 대선 결과에 실망해서 TV 뉴스는 보지 않고 있다. 휴대폰으로 뉴스 제목 정도는 보지만 정치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외면한다. 그래서 이번 지방 선거에는 기권을 하려고 했다. 집으로 발송된 공보물도 아예 열어보지 않았다.

 

어제 지방 선거가 있었다. 친척 형님과 점심 식사를 하는 중에 선거 얘기가 나왔고 경기도 도지사로 나온 민주당 김동연 후보와 국힘당 김은혜 후보가 막상막하 접전중이라는 말을 들었다. 기권을 하려고 했지만 내 한 표가 결과에 영향을 미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 돌아와서 아내와 함께 투표장으로 갔다.

 

아침에 일어나서 김동연 후보가 드라마틱하게 승리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어제의 내 한 표가 헛되지 않았음을 확인한다. 민들레 같은, 밤새 같은, 얼음새꽃 같은, 흰 백일홍 같은, 시의 행간에서 숨을 멈추는 사람 같은, 그런 후보는 없을까. 그렇다면 나도 당당하게 "나는 투표했다"라고 말할 수 있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