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남원 가는 길 / 양애경

샌. 2022. 6. 26. 14:39

임실을 지나 남원 가는 길

차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보면

조그만 동네에도 있을 건 다 있지

여기 살 수 있을 것 같지

북부농협에서 예금을 찾고

농협 상점에서 식료품을 사고

오수우체국에서 편지를 부치며

당장 오늘부터라도 살 수 있을 것 같지

나는 넝쿨장미인지도 몰라

철사로 엮은 길가 담장에서

이제 막 무더기 무더기 피어나기 시작하는, 붉은 꽃

한 송이 송이로는 보이지 않고

초록으로 무성한 이파리들 사이에

중간 크기 붓으로 몇 군데 문질러 놓은 것 같은

사실 꽃 피어도 그다지 보는 사람은 없는

넝쿨장미로 살 수 있을지도 몰라

그러니 여기서 내려서

논두렁 옆 둑길 하나로 걸어들어가서 방 한 칸 얻고

편지를 쓰고 우체국에서 편지를 부치고

농협에 구좌를 트고

그리고 농협 상점에서 쌀 한 봉지 비름나물 한 묶음 사고

그렇게 살아도 되는 것 같아

어디 있는지 모르는 당신

더 찾지 못하게 꽁꽁 숨어서 살고 싶은 마음

허탕을 친 당신이 한 번 더 차를 타고

나 사는 곳으로

찾아오게 하고 싶은 마음

지금 나 그런 마음 아닐까 몰라

임실에서 남원 가는 길.

 

- 남원 가는 길 / 양애경

 

 

시골길을 지나갈 때 옆에 타고 있던 지인이 농촌 마을을 보며 말했다. "저런 동네에서 한 번 살아보고 싶다." 여느 농촌 마을과 다를 바 없었지만 낭만적인 전원생활을 꿈꾸는 지인에게는 특별하게 다가왔을 것이다. 누구에게나 고달픈 현실에서 벗어나고픈 욕구가 있다. 그것이 도시인에게는 도시 탈출과 시골에 대한 동경으로 나타난다.

 

막상 가게 되면 그곳의 실정 또한 녹록치 않다는 걸 알아채는데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다.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똑같아"를 넘어 "시골이 오히려 더 야박해"라는 푸념이 나올지 모른다. 마음은 그대로인 채 몸만 간다면 누구나 경험할 귀결이다. 시인은 세상한테서 등을 돌린 소박하고 단순한 삶을 꿈꾼다.  '꽁꽁 숨어서 살고 싶은 마음'이란 도시의 욕망은 질식시키고 철저한 은둔과 고독을 사랑하겠다는 다짐이리라. 그러나 그대가 찾아올 길 하나까지 모조리 지울 수는 없는 일, 시인의 남원 가는 길에 나도 동행한다.

 

'시읽는기쁨' 카테고리의 다른 글

풍경을 빌리다 / 공광규  (0) 2022.07.10
여름밤 / 김용화  (0) 2022.07.03
꽃 또는 절벽 / 박시교  (0) 2022.06.16
나는 투표했다 / 류시화  (0) 2022.06.02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 서정주  (0) 2022.05.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