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역사 앞에서

샌. 2012. 6. 25. 10:36

'한 사학자의 6.25 일기'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역사학자 김성칠(金聖七) 선생이 1950년 6.25 한국전쟁이 일어난 후 인공 치하의 서울에서 지내며 당시의 상황을 기록한 일기문이다. 서울대 사학과 조교수로 있었던 선생은 피난을 가지 않고 정릉 집에 머물며 동란을 온몸으로 경험했다. 중립적 입장에 섰던 선생은 역사학자답게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술하고 있다. 사료로서의 가치를 염두에 두고 적으신 것 같다.

어느 전쟁이나 마찬가지지만 이념의 광기에 희생되는 것은 죄 없고 아무것도 모르는 민중들이다. 다만 그 시대에 존재했다는 것만으로 희생자가 된 경우가 허다하다. 6.25는 우리 민족의 비극이었고, 민족사에 씻을 수 없는 오명을 남겼다. 벌써 62년이 지났지만 그 상처는 아직도 남아 있다.남북간에 적대관계가 지속되고 있는 건 6.25가 남긴 원죄다. 어떤 명목이든 전쟁은 인류에 대한 범죄 행위다. 생물 중에서 이런 집단 학살극을 벌이는 종이 얼마나 될까?

선생은 서울에서 공산주의를 직접 경험하며 무척 실망한다. 당시에 이상주의적 성향이 있는지식인들은 사회주의를 동경했다. 그러나 막상 부딪쳐 본 그들 체제는 너무나 비인간적이고 무자비했다. 지나친 정치 선전도 견디기 어려웠다. 부정부패와 무책임성에도 불구하고 자유민주주의의 소중함을 선생은 절실히 깨닫는다. 그러나 서울을 탈환한 뒤에는 반대로 남측에 의해 같은 만행이 저질러졌다. 꿈과 희망을 앗긴 청춘들이 부지기수였다. 선생의 일기에는 나라의 미래에 대한 걱정과 한탄이 쉼 없이 나온다.

인간은 역사를 통해 과연 무엇을 배우기나 하는가? 이념 대립과 전쟁은 지금도 지구 위어딘가에서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파괴와 살육에 치를 떨면서도 시간이 지나면 다시 같은 짓을 반복한다. 6.25의 교훈은 어디 갔는지 남과 북은 여전히 적대적인 감정을 지닌 채 대립하고 있다. 빨갱이, 종북, 괴뢰, 미제라는 구호는 여전히 효과를 발휘한다. 인간만큼 어리석은 종도 없다.

선생이 전쟁 중에 살아남은 것은 주변 사람들에게서 신망을 얻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선생은 교수직에서 파면된 외에는 별 피해가 없었다. 웬만한 사람은 모두 납치되어가고, 남은 사람은 지하에 숨어 지내느라 죽을 고생을 했다는데 어떻게 무사히 지냈느냐고 신기해하는 선배에게 이렇게 답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우리야 그 웬만한 사람의 축에 들기나 합니까. 우리같이 정치적 반응이 없는 인간들을 잡아가서 인공국에선들 대체 무엇에 씁니까. 나중엔 워낙 많이들 잡혀간다, 총살을 당한다 하는 바람에 지레 겁을 집어먹어서 마을에서도 얼굴을 내놓지 않고 살았지만 그건 괜한 걱정이었고, 끝까지 아무도 나를 잡으러 온 사람은 없었습니다. 하여튼 이번 경험을 통해서 내가 절실히 느껴지는 점은, 난리가 났을 때 교묘히 숨느니보다는 평소에 마을 사람들과 좋게 지내고 또 세상에 아무와도 원수를 맺지 않는 것이 어떠한 경우에라도 살아남는 제일 좋은 방법이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당시에 유행하던 '3만지'라는 말도 소개하고 있다. 첫째, 밖에서 보아 있는지 만지 한 마을에, 둘째, 집인지 만지 한 집을 지니고, 셋째, 사람인지 만지 할 정도로 처신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이다. 무자비한 좌우 항쟁이 시골 사람에게 남긴 슬픈 교훈이다.

그런 선생이 부친의 병환으로 고향을 찾았다가 괴한의 습격을 받고 작고했다. 38세의 아까운 나이였다. 이 책을 알게 된 것은 김기협 님이 쓴 <아흔 개의 봄>을 통해서였다. 김기협 님이 바로 선생의 셋째 아드님이다. 선생의 부인은 일찍 남편을 여의고 4남매를 훌륭하게 키우셨다. 선생의 일기는 몰래 감추어두고 있다가 민주화가 된 90년대가 되어서야 세상에 공개했다.

마침 오늘이 6.25 발발 62주년 기념일이다. 일기를 통해 전쟁의 잔인성과 당시 시대상을 알 수 있지만, 인간답게 살려는 한 지식인의 고투도 읽을 수 있다. 선생의 온화한 풍모와 인격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선생은 전쟁의 와중에서도 자신의 소신을 지키며 떳떳하게 살았다. 어떤 경우에도 인간이 지녀야 할 품위를 지키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감동을 준다. 역사 앞에서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하는지를 후세의 우리들에게 일깨워주는 책이다. 1950년 1월 1일의 일기에는 새해의 맹세가 이렇게 적혀 있다.

1. 말로나 글로나 수다를 떨지 말 일.
2. 겸손하고 너그러우며 제 잘한 일을 입 밖에 내거나 붓끝에 올리지 말 일.
3. 남의 잘못, 학설의 그릇됨을 타내지 말고 제 바른 행동과 제 깊은 공부로써 이를 휩싸버릴 것.
4. 약속을 삼가하고 일단 승낙한 일은 성실히 이를 이행할 일.
5. 쓰기보다 읽기에, 읽기보다 생각하기에.
6. 사소한 일이라도 먼 앞날을 헤아리고 인생의 깊은 뜻을 생각해서 말하고 행할 일.
7. 날마다(하루도 거르지 않고) 무엇이든 읽고 생각하고, 그 결과를 일기로 적어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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