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1121

쇠비름 비빔밥 / 조성순

입에 녹는 안심살, 감칠맛 돌가자미, 세상의 별난 음식 먹어봐도 몇 번이면 물리고 말지. 고구마밭 지심맬 제 이랑 고랑 지천으로 자라 뽑아도 뽑아도 질긴 생명력으로 힘들게 하던 쇠비름, 다른 놈들은 뽑아서 흙만 털어놓으면 햇볕에 말라 거름이 되는데 이놈은 말라죽기는커녕 몇 주 후라도 비가 오면 어느새 뿌리를 박고 살아나지. 하는 수 없이 밭고랑 벗어난 길에 던져놓아 보지만 오가는 발길에 수없이 밟혀 형체도 분간 못할 지경이 되고서도 비만 오면 징그럽게 살아나는, 시난고난 앓고 난 뒤, 먹고 싶었다. 푹 삶은 쇠비름, 된장 고추장 고소한 참기름으로 비빈 - 쇠비름 비빔밥 / 조성순 쇠비름을 보면 외할머니 생각이 난다. 중학생 시절 읍에서 외할머니와 둘이 살 때, 여름 별미는 된장으로 무친 쇠비름이었다. 보..

시읽는기쁨 2021.06.29

천 개의 바람이 되어 / 미상

내 무덤 앞에서 울지 마세요 나는 그곳에 없습니다. 나는 잠들지 않습니다 나는 천의 바람, 천의 숨결로 흩날립니다 나는 눈 위에 반짝이는 다이아몬드입니다 나는 무르익은 곡식 비추는 햇빛이며 나는 부드러운 가을비입니다 당신이 아침 소리에 깨어날 때 나는 하늘을 고요히 맴돌고 있습니다 나는 밤하늘에 비치는 따스한 별입니다 내 무덤 앞에 서서 울지 마세요 나는 그곳에 없습니다. 나는 죽지 않습니다. - 천 개의 바람이 되어 / 미상 Do not stand at my grave and weep, I am not there, I do not sleep. I am a thousand winds that blow. I am the diamond glint on snow. I am the sunlight on ripe..

시읽는기쁨 2021.06.20

작은 것을 위하여 / 이기철

굴뚝새들은 조그맣게 산다 강아지풀 속이나 탱자나무 숲 속에 살면서도 그들은 즐겁고 물여뀌 잎새 위에서도 그들은 깃을 묻고 잠들 줄 안다 작은 빗방울 일부러 피하지 않고 숯더미 같은 것도 부리로 쪼으며 발톱으로 어루만진다 인가에서 울려오는 차임벨 소리에 놀란 눈을 뜨고 질주하는 자동차 소리에 가슴은 떨리지만 밤과 느릅나무 잎새와 어둠 속의 별빛을 바라보며 그들은 조용한 화해와 순응의 하룻밤을 새우고 짧은 꿈속에 저들의 생애의 몇 토막 이야기를 묻는다 아카시아꽃을 떨어뜨리고 불어온 바람이 깃털 속에 박히고 박하꽃 피운 바람이 부리 끝에 와 머무는 밤에도 그들의 하루는 어둠 속에서 깨어나 또 다른 날빛을 맞으며 가을로 간다 여름이 아무도 돌봐 주지 않는 들녘 끝에 개비름꽃 한 점 피웠다 지우듯이 가을은 아무도..

시읽는기쁨 2021.06.11

내가 생각하는 것은 / 백석

밖은 봄철날 따디기의 누굿하니 푹석한 밤이다 거리에는 사람두 많이 나서 흥성흥성할 것이다 어쩐지 이 사람들과 친하니 싸단니고 싶은 밤이다 그렇것만 나는 하이얀 자리 우에서 마른 팔뚝의 새파란 핏대를 바라보며 나는 가난한 아버지를 가진 것과 내가 오래 그려오든 처녀가 시집을 간 것과 그렇게도 살틀하든 동무가 나를 버린 일을 생각한다 또 내가 아는 그 몸이 성하고 돈도 있는 사람들이 즐거이 술을 먹으려 단닐 것과 내 손에는 신간서 하나도 없는 것과 그리고 그 '아서라 세상사'라도 들을 류성기도 없는 것을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이 내 눈가를 내 가슴가를 뜨겁게 하는 것도 생각한다 - 내가 생각하는 것은 / 백석 1935년, 친구의 결혼식 축하 모임에서 만난 여학생(박경련, 蘭)에게 백석은 한눈에 반한다...

시읽는기쁨 2021.06.02

청소를 끝마치고 / 강소천

책상 걸상을 죽 뒤로 밀어 놓고 먼지털이로 구석구석 먼지를 떨고 비로 박박 마루를 쓸고 물로 좍좍 걸레질을 하고 책상 걸상을 제자리에 나란히 해 놓고 맑은 물을 길어다가 교탁과 교단을 다시 닦는다. 비뚜러 놓인 교탁을 바로 잡다가 나는 문득 선생님이 되어 보고 싶었다. "강웅구, 수고했소. 오늘 청소는 만점이요. 인제 집으로 돌아가도 좋소." 언제 와 계셨는지 교실 문 앞에 담임 선생님이 서 계셨다. 나는 부끄러워 어쩔 줄 모르다가 "선생님 청소를 다 했습니다." 선생님도 빙그레 웃으시며 "강웅구, 수고했소. 오늘 청소는 만점이요. 인제 집으로 돌아가도 좋소." 그리고 선생님은 교사실로 가신다. 복도를 쓸던 동무들과 유리를 닦던 동무들이 한꺼번에 "와아" 하고 웃어 버렸다. 교사실로 가시던 선생님도 뒤돌..

시읽는기쁨 2021.05.27

요즘은 나 홀로 / 이태수

요즘은 혼자만 있을 때가 잦아졌다 나 홀로 느긋하게 온갖 생각의 안팎을 떠돈다 거기에 날개를 달아보거나 내 속으로 깊이 가라앉을 때가 잦다 빈 집에서 빈 방 가득 생각들을 풀어내다 거둬들이다 하면서 나 홀로 술잔을 기울일 때가 좋아졌다 혼자 마신 술에 젖어 술이 나를 열어주는 길을 따라 나 홀로 유유자적 거닐 때가 좋다 적막이 적막을 껴입고 또 껴입으면 혼자 그 적막을 지그시 눌러 앉히곤 한다 눌러 앉혀 다독이면 그윽하게 따뜻해지는 적막이 좋다 나 홀로, 늘 혼자라는 생각을 하면서 - 요즘은 나 홀로 / 이태수 대상포진 걸린 지가 세 주가 지났다. 그런데도 아직 포진이 생긴 얼굴은 전류가 흐르는 듯 지릿지릿하다. 마치 폭격을 당한 느낌이라 '포진'의 '포(疱)'가 나에게는 '포(砲)'로 읽힌다. 근 한 ..

시읽는기쁨 2021.05.11

돌아오는 길 / 박두진

비비새가 혼자서 앉아 있었다 마을에서도 숲에서도 멀리 떨어진 논벌로 지나간 전봇줄 위에 혼자서 동그마니 앉아 있었다 한참을 걸어오다 뒤돌아봐도 그때까지 혼자서 앉아 있었다 - 돌아오는 길 / 박두진 '붉은머리오목눈이'를 알게 된 게 불과 몇 달 전이다. 나이 일흔이 되어서야 이름을 불러주게 되다니, 그동안 뭘 하며 살았는지 자책이 되었다. 이 동시에 나오는 '비비새'가 붉은머리오목눈이다. 또는 '뱁새'라고도 한다. '뱁새가 황새 따라가려다 가랑이 찢어진다'는 속담에 나오는 바로 그 뱁새다. 살펴보니 비비새, 즉 붉은머리오목눈이는 자주 눈에 띈다. 얼굴이 통통한 게 무척 귀엽게 생겼다. 대체로 갈대 덤불 속에서 무리를 지어 지낸다. 그런데 여기 묘사된 비비새는 특이하다. 혼자서 그것도 전봇줄 위에 있는 경..

시읽는기쁨 2021.05.02

슬퍼할 수 없는 것 / 이성복

지금 바라보는 먼 산에 눈이 쌓여 있다는 것 지금 바라보는 먼 산에 가지 못하리라는 것 굳이 못 갈 것도 없지만 끝내 못 가리라는 것 나 없이 눈은 녹고 나 없이 봄은 오리라는 것 슬퍼할 수 없는 것, 슬퍼할 수조차 없는 것 - 슬퍼할 수 없는 것 / 이성복 히말라야와 산티아고를 버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전과는 달라졌다. 전에는 마음의 문제였다면 이제는 몸의 문제다. 12년 전에 찍었던 히말라야 사진을 보면서 다시 그곳에 가지 못하리라는 것을 확인한다. '굳이 못 갈 것도 없지만 끝내 못 가리라는 것', 바로 지금 내 심정이다. 이런 경계도 금방 지나갈 것이다. 그리고 종내는 슬퍼할 수조차 없는 때가 찾아올 것이다. 늙음이든, 병이든, 집안의 변고든 슬퍼할 수 있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것이다. 어찌할 수..

시읽는기쁨 2021.04.24

사는 법 / 홍관희

살다가 사는 일이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길을 멈춰 선 채 달리 사는 법이 있을까 하여 다른 길 위에 마음을 디뎌 보노라면 그 길을 가던 사람들도 더러는 길을 멈춰 선 채 주름 깊은 세월을 어루만지며 내가 지나온 길 위에 마음을 디뎌 보기도 하더라 마음은 그리 하더라 - 사는 법 / 홍관희 누군가 그랬다. "삶에는 정답이 없다. 각자의 해답이 있을 뿐." 우리는 수많은 겹쳐진 길들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서 살아간다. 우리가 하나를 선택할 때 한 길은 활성화되지만 다른 길은 사라진다. 선택이 우리의 온전한 의지의 발현인지는 잘 모르겠다. 어떤 때는 우연으로 보이고, 다른 때는 운명으로 보인다. 내 앞에는 수많은 가능성이 있었고, 나는 지금 그중 하나의 길에 서 있다. 길 위에 잠시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며..

시읽는기쁨 2021.04.18

몸무게는 설탕 두 숟갈 / 임복순

설탕 두 숟갈처럼 몸무게가 25그램밖에 나가지 않는 작은 북방사막딱새는 남아프리카에서 북극까지 삼만 킬로미터, 지구 한 바퀴를 난다고 한다. 살다가 가끔 내 몸무게보다 마음의 무게가 몇 백 배 더 무겁고 힘들고 괴로울 때 나는, 설탕 두 숟갈의 몸무게로 지구 한 바퀴를 날고 있을 아주 작은 새 한 마리 떠올리겠다. - 몸무게는 설탕 두 숟갈 / 임복순 언젠가 길을 가다가 건물 옆에 쓰러져 있는 작은 새 한 마리를 보았다. 어딘가 부딪쳐서 잠시 기절한 것 같았다. 다치지 않도록 옆 화단으로 옮길 때 내 손바닥 위에 올려진 새의 무게에 깜짝 놀랐다. 깃털 하나 놓인 듯 전혀 무게감이 없었다. 이렇게 가벼운 생명체도 있구나, 경탄스러웠다. 북방사막딱새는 25그램, 설탕 두 숟갈의 가벼운 몸무게로 거센 바람과 ..

시읽는기쁨 2021.04.12

비망록 / 문정희

남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남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가난한 식사 앞에서 기도를 하고 밤이면 고요히 일기를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구겨진 속옷을 내보이듯 매양 허물을 내보이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사랑하는 사람아 너는 내 가슴에 아직도 눈에 익은 별처럼 박혀 있고 나는 박힌 별이 돌처럼 아파서 이렇게 한 생애를 허둥거린다 - 비망록 / 문정희 비망록이란 그래도 잊지 말자는 다짐일 게다. 젊은 시절의 비망록을 아직도 고이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고마운 일이다. 그래서 한 생애를 허둥거린들 어떠리. 아프고 흔들린다는 건 내 가슴에 새긴 별을 버리지 않았다는 뜻이리라. 별에 도달하는 게 아니라 별을 바라보는 것으로 우리 인생은 의미가 있는 게 아닐까. 그런 별을 품고 있는 사람은..

시읽는기쁨 2021.03.27

소문이 돌다 / 정윤옥

복사꽃 활짝 핀 솔이네 집에 든 좀도둑 애지중지 보살펴온 난 몇 개 손 탔다 적금 부을 십오만 원은 손도 대지 않았다는데 그 별난 손님 베란다 화분들만 마구 헤집어놨다지 며칠 전 나도 시어골 골짝 몰래 들어가 고추순, 오이순, 다래순에 달래까지 사정없이 캐고 뜯고 훑어왔었는데 그 손님 꽃 도둑이면 난 영락없는 봄 도둑이네 - 소문이 돌다 / 정윤옥 그렇다면 나 역시 이 화려한 봄날의 활동사진을 공짜로 구경하는 도둑놈이 아닌가. 모델료를 내지 않고도 예쁜 꽃을 마음대로 찍는다. 멋진 자태의 홍매와 데이트를 하며 희희낙락한들 희롱죄로 고소 당하지도 않는다. 공으로 남의 것을 누리면서 뭘 더 바란단 말인가. 그런데 이 요염한 봄의 유혹에 누군들 좀도둑이 되지 않으리. 하느님도 슬며시 미소를 띠며 바라보실 것 ..

시읽는기쁨 2021.03.20

눈뜬장님 / 오탁번

연애할 때는 예쁜 것만 보였다 결혼한 뒤에는 예쁜 것 미운 것 반반씩 보였다 10년 20년 되니 예쁜 것은 잘 안 보였다 30년 40년 지나니 미운 것만 보였다 그래서 나는 눈뜬장님이 됐다 아내는 해가 갈수록 눈이 점점 밝아지나 보다 지난날이 빤히 보이는지 그 옛날 내 구린 짓 죄다 까발리며 옴짝달짝 못하게 한다 눈뜬장님 노약자한테 그러면 못써! - 눈뜬장님 / 오탁번 여자의 기억법은 특이하다. 과거의 서운했던 일은 기막히게 기억해 낸다. 둘 사이에 냉기류가 흐를 때면 어두운 창고 문이 저절로 열리나 보다. 아내의 넋두리를 들어보면 나는 무지 나쁜 사람이었던 것 같다. 한때는 정면 대응을 했지만 이젠 흘려 넘길 수밖에 없다. 창고를 채울 자물쇠가 없다는 걸 늦게서야 알았기 때문이다. 바라건대 아내도 눈뜬..

시읽는기쁨 2021.03.09

구들목 / 박남규

검정 이불 껍데기는 광목이었다 무명 솜이 따뜻하게 속을 채우고 있었지 온 식구가 그 이불 하나로 덮었으니 방바닥만큼 넓었다 차가워지는 겨울이면 이불은 방바닥 온기를 지키느라 낮에도 바닥을 품고 있었다 아랫목은 뚜껑 덮인 밥그릇이 온기를 안고 숨어있었다 오포 소리가 날 즈음, 밥알 거죽에 거뭇한 줄이 있는 보리밥 그 뚜껑을 열면 반갑다는 듯 주루르 눈물을 흘렸다 호호 불며 일하던 손이 방바닥을 쓰다듬으며 들어왔고 저녁이면 시린 일곱 식구의 발이 모여 사랑을 키웠다 부지런히 모아 키운 사랑이 지금도 가끔씩 이슬로 맺힌다 차가웁던 날에도 시냇물 소리를 내며 콩나물은 자랐고 검은 보자기 밑에서 고개 숙인 콩나물의 겸손과 배려를 배웠다 벌겋게 익은 자리는 아버지의 자리였다 구들목 중심에는 책임이 있었고 때론 배려..

시읽는기쁨 2021.02.28

설날 아침 / 남호섭

설날인데 앞집 할아버지 화났다. 아들이 주고 간 용돈 그새 어디 둔지 몰라 찾고 있는 할머니한테도 화나고 또 까먹고 간 손자 장난감에도 화나고 고속도로 꽉 막혔다는 뉴스에도 화나고 새배 마치자마자 텅 빈 집 안, 할아버지 마음에 드는 건 하나도 없다. - 설날 아침 / 남호섭 명절 후유증은 고향에 남은 할아버지, 할머니도 예외가 아니다. 도로가 막힌다고 경쟁하듯 박차고 떠나면 텅 빈자리가 심연처럼 깊고 크다. 화가 나서 심술을 부리는 사람이 앞집 할아버지만이겠는가. 뭐 이런 세상이 되었는지 할아버지 심사가 불편한 게 틀림 없다. 명절은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회오리바람 같은 건지 모른다. 한 바탕 휘저어놓고는 나 몰라라 슬그머니 사라진다. 덕분에 우리의 허약한 바탕을 깨닫게 되는 이점도 있지만....

시읽는기쁨 2021.02.14

꼬막 / 박노해

벌교 중학교 동창생 광석이가 꼬막 한 말을 부쳐왔다 꼬막을 삶는 일은 엄숙한 일 이 섬세한 남도南道의 살림 성사聖事는 타지 처자에게 맡겨서는 안 된다 모처럼 팔을 걷고 옛 기억을 살리며 싸목싸목 참꼬막을 삶는다 둥근 상에 수북이 삶은 꼬막을 두고 어여 모여 꼬막을 까먹는다 이 또롱또롱하고 짭조름하고 졸깃거리는 맛 나가 한겨울에 이걸 못 묵으면 몸살한다 친구야 고맙다 나는 겨울이면 니가 젤 좋아부러 감사 전화를 했더니 찬바람 부는 갯벌 바닷가에서 광석이 목소리가 긴 뻘 그림자다 우리 벌교 꼬막도 예전 같지 않다야 수확량이 솔찬히 줄어부렀어야 아니 아니 갯벌이 오염돼서만이 아니고 긍께 그 머시냐 태풍 때문이 아니것냐 요 몇 년 동안 우리 여자만에 말이시 태풍이 안 오셨다는 거 아니여 큰 태풍이 읎어서 바다와..

시읽는기쁨 2021.02.04

여자들은 빠집시다 / 윤금초

난봉꾼 타고난 끼로 숱한 아녀자를 농락했다. 성난 주민들 관아에 고발, 심판 받게 된 것이다. 원님 가로되 "저놈이 다시는 나뿐 짓 못하게 거시기를 잘라 버리도록 해라!" 그러자 그 아비가 일어서서 간청했다. "나리. 저 녀석이 우리 집안 4대 독자입니다. 대를 이어가야 하므로 저 아이 대신 제 거시기를 자르십시오." 깜짝 놀란 어머니가 불쑥 원님 앞에 나섰다. "사또, 법대로 하옵소서." 그러자 큰일 났다 싶은 며느리가 손사래, 손사래 치며 "어머님. 남정네 하는 일에 여자들은 빠집시다." - 여자들은 빠집시다 / 윤금초 도지사, 부산시장, 서울시장만 해도 벅찬데 이번에는 정의당 대표의 성추행이 터졌다. 권력과 성은 무슨 상관관계가 있는 걸까. 힘이 생기면 어디에든 과시해 보고 싶은 걸까. 성 욕망에는..

시읽는기쁨 2021.01.27

무이산에서 / 사방득

집으로 돌아갈 꿈 10년 동안 안 꾼 채로 푸른 산에 홀로 서서 물가를 바라보네 산 비 뚝, 그치고 나니 온 천지가 적막한데 몇 생애를 더 살아야 매화가 될까 몰라 十年無夢得還家 獨立靑峰野水涯 天地寂寥山雨歇 幾生修得到梅花 - 무이산에서(武夷山中) / 사방득(謝枋得) 사방득(謝枋得, 1226~1289)은 남송 시대의 문인으로 원나라가 침략하여 나라가 망하자 무이산으로 들어가 협력을 거부하고 저항한 인물이다. 내용으로 볼 때 10년 동안 무이산에 숨어 사는 기간 중에 쓴 시로 보인다. 지조를 지키며 살려고 한 사방득의 결기와 고독이 동시에 느껴진다. 결국 사방득은 스스로 곡기를 끊으면서 목숨을 버렸다고 한다. "몇 생애를 더 살아야 매화가 될까 몰라[幾生修得到梅花]." 이런 시를 읽으면 사는 게 무엇인지 아..

시읽는기쁨 2021.01.19

매아미 맵다 울고 / 이정신

매아미 맵다 울고 쓰르라미 쓰다 우니 산채를 맵다는가 박주를 쓰다는가 우리는 초야에 묻혔으니 맵고 쓴 줄 몰라라 - 매아미 맵다 울고 / 이정신 매미가 맵다고 울든 쓰르라미가 쓰다고 울든 왜 내가 속을 끓여야 하지? 매미나 쓰르라미가 아니라 아직도 거기에 매여 있는 내 마음 탓인 것을. 열 받고 단톡방을 뛰쳐나왔던 내 속 좁음을 반성한다. 이 시조를 지은 이정신(李廷藎) 선생은 현감을 지낸 조선 영조 때 분이라고 한다. 호는 백회재(百悔齋)다. 백 번을 뉘우쳐야 맵고 쓴 바를 잊는 경지에 이른다고 가르침을 주는 것 같다.

시읽는기쁨 2021.01.11

반성 / 함민복

늘 강아지 만지고 손을 씻었다 내일부터는 손을 씻고 강아지를 만져야지 - 반성 / 함민복 아파트 엘리베이터 안에는 손 세정제가 있다. 코로나를 예방하라고 관리사무소에서 마련한 것이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른 뒤에는 습관적으로 세정제로 손을 닦는다. 남의 손이 닿은 버튼이 오염되었을까 두려워서다. 그러나 이 시를 읽고는 반성했다. 먼저 손을 닦고 버튼을 누를 수도 있지 않는가. 모든 사람이 그렇게 한다면 결과는 동일하다. 그런데 둘 사이에 마음가짐은 천양지차가 난다. 시인의 타자에 대한 배려와 존중심이 지극하다. 실천 여부를 떠나 이런 생각을 떠올리는 마음이 아름답다. 코로나 시대에 우리가 반성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 뭣이 중요한지는 내팽개쳐 놓고 엉뚱한 곁다리만 신경 쓰고 있는 건 아닐까.

시읽는기쁨 2021.01.06

지나가고 떠나가고 / 이태수

지나간다. 바람이 지나가고 자동차들이 지나간다. 사람들이 지나가고 하루가 지나간다. 봄, 여름, 가을도 지나가고 또 한 해가 지나간다. 꿈 많던 시절이 지나가고 안 돌아올 것들이 줄줄이 지나간다. 물같이, 쏜살처럼, 떼 지어 지나간다. 떠나간다. 나뭇잎들이 나무를 떠나고 물고기들이 물을 떠난다. 사람들이 사람을 떠나고 강물이 강을 떠난다. 미련들이 미련을 떠나고 구름들이 하늘을 떠난다. 너도 기어이 나를 떠나고 못 돌아올 것들이 영영 떠나간다. 허공 깊숙이, 아득히, 죄다 떠나간다. 비우고 지우고 내려놓는다. 나의 이 낮은 감사의 기도는 마침내 환하다. 적막 속에 따뜻한 불꽃으로 타오른다. - 지나가고 떠나가고 / 이태수 다사다난(多事多難) - 연말이면 상투적으로 쓰지만, 올해는 이 말이 정말 실감 난다..

시읽는기쁨 2020.12.31

나는 5.18을 왜곡한다 / 최진석

지금 나는 5.18을 저주하고, 5.18을 왜곡한다. 1980년 5월 18일에 다시 태어난 적이 있는 나는 지금 5.18을 그때 5.18의 슬픈 눈으로 왜곡하고 폄훼한다. 무릎 꿇고 살기보다 서서 죽기를 원하면서 그들에게 포획된 5.18을 나는 저주한다. 그 잘난 5.18들은 5.18이 아니었다. 나는 속았다. 금남로, 전일빌딩, 전남도청, 카톨릭센터, 너릿재의 5.18은 죽었다. 자유의 5.18은 끝났다. 민주의 5.18은 길을 잃었다. 5.18이 전두환을 닮아갈 줄 꿈에도 몰랐다. 나는 속았다. 3.1, 4.19, 6.10, 부마항쟁의 자유로운 님들께 동학교도들의 겸손한 님들께 천안함 형제들의 원한에 미안하다. 자유를 위해 싸우다 자유를 가둔 5.18을 저주한다. 그들만의 5.18을 폄훼한다. 갇힌 ..

시읽는기쁨 2020.12.25

공휴일 / 김사인

중랑교 난간에 비슬막히 식구들 세워놓고 사내 하나 사진을 찍는다 햇볕에 절어 얼굴 검고 히쭉히쭉 신바람 나 가족사진 찍는데 아이 들쳐업은 촌스러운 여편네는 생전 처음 일이 쑥스럽고 좋아서 발그란 얼굴을 어쩔 줄 모르는데 큰애는 엄마 곁에 붙어서 학교에서 배운 대로 차렷을 하고 눈만 때굴때굴 숨죽이고 섰는데 그 곁 난간 틈으로는 웬 코스모스도 하나 고개 뽑고 내다보는데 짐을 맡아들고 장모인지 시어미인지 오가는 사람들 저리 좀 비키라고 부산도 한데 - 공휴일 / 김사인 저 시절 중랑교가 무슨 볼품이 있었을까? 밑으로는 시커먼 중랑천이 흐르던, 높은 빌딩 하나 없는 서울 변두리였다. 그래도 서울 구경이라고 시골에서 올라온 한 가족이 기념사진을 찍는가 보다. 사진천국이 된 지금는 누구나 주머니에 카메라를 넣고 ..

시읽는기쁨 2020.12.17

다시 아침 / 도종환

내게서 나간 소리가 나도 모르게 커진 날은 돌아와 빗자루로 방을 쓴다 떨어져 나가고 흩어진 것들을 천천히 쓰레받기에 담는다 요란한 행사장에서 명함을 잔뜩 받은 날은 설거지를 하고 쌀을 씻어 밥을 안친다 찬물에 차르르 차르르 씻겨나가는 뽀얀 소리를 듣는다 앞차를 쫓아가듯 하루를 보내고 온 날은 초록에 물을 준다 꽃잎이 자라는 속도를 한참씩 바라본다 다투고 대립하고 각을 세웠던 날은 건조대에 널린 빨래와 양말을 갠다 수건과 내복을 판판하게 접으며 음악을 듣는다 가느다란 선율이 링거액처럼 몸속으로 방울방울 떨어져 내리는 걸 느끼며 눈을 감는다 - 다시 아침 / 도종환 시인이 마음을 정화하듯 하는 행위를 나 역시 집에서 일상으로 한다. 방 쓸기, 설거지와 밥 안치기, 초록에 물 주기, 빨래 개기 등은 퇴직 이후..

시읽는기쁨 2020.12.10

쥐 / 요사노 아키코

나의 집 천장에 쥐가 사느니라. 빠작빠작 소리남은 끌 잡고 상을 새기는 사람 밤에도 자지 않음과 같으니라. 또 그의 아내와 춤을 추면서 빙 돌아가는 울림은 경마가 달리는 모습. 내 글 쓰는 종이 위에 천장 위 모래며 먼지들 펄펄 날려옴도 그들이 어찌 알 것인가? 그러나 나는 생각하느니 나는 쥐들과 함께 살고 있노라. 그들에게 먹을 것이 있으랴. 천장에 구멍이라도 뚫어서 때때로 나를 엿보라. - 쥐 / 요사노 아키코 이웃간에 층간 소음으로 인한 다툼이 가끔 뉴스에 나온다. 며칠 전에는 윗집 현관문에 인분을 뿌린 사건이 있었다. 댓글에는 누리꾼의 설왕설래가 무성했다. 나 역시 오랫동안 층간 소음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다행히 아파트 관리사무소를 통한 중재로 윗집 사람을 만나고 나서 사정이 많이 좋아졌다. 층간..

시읽는기쁨 2020.12.03

산에 대하여 / 신경림

산이라 해서 다 크고 높은 것은 아니다 다 험하고 가파른 것은 아니다 어떤 산은 크고 높은 산 아래 시시덕거리고 웃으며 나지막히 엎드려 있고 또 어떤 산은 험하고 가파른 산자락에서 슬그머니 빠져 동네까지 내려와 부러운 듯 사람 사는 꼴을 구경하고 섰다 그리고는 높은 산을 오르는 사람들에게 순하디순한 길이 되어주기도 하고 남의 눈을 꺼리는 젊은 쌍에게 짐즛 따뜻한 사랑의 숨을 자리가 되어주기도 한다 그래서 낮은 산은 내 이웃이던 간난이네 안방 왕골자리처럼 때에 절고 그 누더기 이불처럼 지린내가 배지만 눈개비나무 찰피나무며 모싯대 개쑥에 덮여 곤줄박이 개개비 휘파람새 노랫소리를 듣는 기쁨은 낮은 산만이 안다 사람들이 서로 미워서 잡아죽일 듯 이빨을 갈고 손톱을 세우다가도 칡넝쿨처럼 머루넝쿨처럼 감기고 어우러..

시읽는기쁨 2020.11.27

아는 얼굴들 다 어디로 / 이유경

아는 얼굴들 다 어디로 가 있는 걸까 십여 년 외딴곳에서 하루하루 보내다가 이 번잡한 광화문사거리 다시 와 서보니 주름진 얼굴 된 나만 산 것 같다 우리 기다려주던 사람이나 나무들 풍경 하나씩 바꾸며 없어져 갔고 옛것들 다 비켜서라!며 새것들 차례로 와서 치장할 거고 그들끼리는 쉽게 친해지겠지 그렇지, 그들끼리는 그들 세상을 공들여 만들어가겠지 우리가 보낸 세월까지 지우면서 - 너 여기서 무엇하고 있느냐 누구 내 어깨라도 툭 쳐줬으면 싶다 - 아는 얼굴들 다 어디로 / 이유경 예전에 살던 집을 찾아간 적이 있다. 단독주택이 모여 있던 동네는 거대한 아파트 단지로 변해서 어디가 어디인지 구분조차 되지 않았다. 전파상이 있고, 콩나물 할머니가 앉아 있고, 아이들 뛰노는 소리로 분주했던 골목길을 비롯해 모든 ..

시읽는기쁨 2020.11.20

아내와 나 사이 / 이생진

아내는 76이고 나는 80입니다 지금은 아침저녁으로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어가지만 속으로 다투기도 많이 다툰 사이입니다 요즘은 망각을 경쟁하듯 합니다 나는 창문을 열러 갔다가 창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고 아내는 냉장고 문을 열고서 우두커니 서 있습니다 누구 기억이 일찍 돌아오나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은 서서히 우리 둘을 떠나고 마지막에는 내가 그의 남편인 줄 모르고 그가 내 아내인 줄 모르는 날도 올 것입니다 서로 모르는 사이가 서로 알아가며 살다가 다시 모르는 사이로 돌아가는 세월 그것을 무엇이라 하겠습니까 인생? 철학? 종교? 우린 너무 먼 데서 살았습니다 - 아내와 나 사이 / 이생진 시인이 그리는 풍경을 바라보면 가슴이 아리다. 산다는 게 뭘까? 부부의 연은 또 무엇일까? '서로 모르는 사..

시읽는기쁨 2020.11.12

입동 / 이면우

무우 속에 도마질 소리 꽉 들어찼다 배추고랑이 된장국 안에 달큰해졌다 어둔 부엌에서 어머니, 가마솥 뚜껑 열고 밥 푸신다 김이 어머니 몸 뭉게구름 둘렀다 우리는 올망졸망 둘러앉아 한 대접씩 차례를 기다린다 숟가락 한번 들었다 놓고 젓가락 맞추고 크고 둥그런 상에서 가만히 기다린다 근데 오늘 저녁은 왜 이리 더디냐 현관 문 찰칵 열리며 찬바람 휘이익 들어오고 다녀왔습니다 외치며 아이가 따라 들어선다 그때 주방 김 말끔히 걷히자 거기, 아내가 구부정이 서서 등 보이며 압력솥 뚜껑을 열고 있다 - 입동 / 이면우 어제가 입동(立冬)이었다. 절기가 달력보다 앞서 겨울이 왔음을 알린다. 사람들은 세월이 빠르다고 하지만 나에게는 그다지 실감이 안 난다. 집에 가만히 있으면 하루가 그리 급하지는 않다. 느릿느릿 가는..

시읽는기쁨 2020.11.08

잠깐 꾸는 꿈같이 / 이태수

담담해지고 싶다 말은 담박하게 삭이고 물 흐르듯이 걸어가고 싶다 지나가는 건 지나가게 두고 떠나가는 것들은 그냥 떠나보내고 이 괴로움도, 외로움도, 그리움도 두 팔로 오롯이 그러안으며 모두 다독여 앉혀놓고 싶다 이슬처럼, 물방울처럼 잠깐 꾸는 꿈같이 - 잠깐 꾸는 꿈같이 / 이태수 단풍이 참 곱다. 사라지는 것들은 왜 이리 아름다운지, 창 밖을 넋 놓고 바라보게 된다. 사람의 끝도 이렇게 물든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 삶도 그를 닮기를, 잠깐 꾸는 꿈같이....

시읽는기쁨 2020.1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