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1121

바닷가 늙은 집 / 손세실리아

제주 해안가를 걷다가 버려진 집을 발견했습니다 거역할 수 없는 그 어떤 이끌림으로 빨려들 듯 들어섰던 것인데요 둘러보니 폐가처럼 보이던 외관과는 달리 뼈대란 뼈대와 살점이란 살점이 합심해 무너뜨리고 주저앉히려는 세력에 맞서 대항한 이력 곳곳에 역력합니다 얼마 남지 않은 나의 생도 저렇듯 담담하고 의연히 쇠락하길 바라며 덜컥 입도(入島)를 결심하고 말았던 것인데요 이런 속내를 알아챈 조천 앞바다 수십 수만 평이 우르르우르르 덤으로 딸려왔습니다 어떤 부호도 부럽지 않은 세금 한 푼 물지 않는 - 바닷가 늙은 집 / 손세실리아 작년 봄, 제주도에 갔을 때 '시인의 집'을 찾아갔었다. 검은 현무암이 양떼처럼 흩어져 있는 조천 바닷가에 시인의 집은 낮고 겸손하게 앉아 있었다. 덜컥 새집을 짓는 게 아니라 백 년 ..

시읽는기쁨 2020.02.24

속 빈 것들 / 공광규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것들은 다 속이 비어 있다 줄기에서 슬픈 숨소리가 흘러나와 피리를 만들어 불게 되었다는 갈대도 그렇고 시골집 뒤란에 총총히 서 있는 대나무도 그렇고 가수 김태곤이 힐링 프로그램에 들고 나와 켜는 해금과 대금도 그렇고 프란치스코 회관에서 회의 마치고 나오다가 정동 길거리에서 산 오카리나도 그렇고 나도 속 빈 놈이 되어야겠다 속 빈 것들과 놀아야겠다 - 속 빈 것들 / 공광규 '서른 개 바퀴살이 한 군데로 모여 바퀴통을 만드는데 그 가운데가 비어 있음으로 수레의 쓸모가 생겨납니다. 흙을 빚어 그릇을 만드는데 그 가운데가 비어 있음으로 그릇의 쓸모가 생겨납니다. 문과 창을 뚫어 방을 만드는데 그 가운데가 비어 있음으로 방의 쓸모가 생겨납니다.' '완전한 비움에 이르십시오. 참된 고요를 지..

시읽는기쁨 2020.02.19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 백석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거리를 걸어가는 것은 잠풍 날씨가 너무나 좋은 탓이고 가난한 동무가 새 구두를 신고 지나간 탓이고 언제나 꼭같은 넥타이를 매고 고운 사람을 사랑하는 탓이다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거리를 걸어가는 것은 또 내 많지 않은 월급이 얼마나 고마운 탓이고 이렇게 젊은 나이로 코밑수염도 길러보는 탓이고 그리고 여늬 가난한 집 부엌으로 달재 생선을 진장에 꼿꼿이 지진 것은 맛도 있다는 말이 자꼬 들려오는 탓이다 -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 백석 첫 연에 나오는 '언제나 꼭같은 넥타이를 매고'에 대해 자야는 이렇게 설명한다. 백석과 자야가 오순도순 살던 청진동 시절이었다. 시내에 나갔다가 자야는 백석에게 어울릴 것 같은 넥타이를 샀다. 옅은 검은색 바탕에 다홍빛 빗금 줄무늬가 잔잔하게 박힌 것이었다..

시읽는기쁨 2020.02.09

자야오가(子夜吳歌) / 이백

장안도 한밤에 달은 밝은데 집집이 들리는 다듬이 소리 처량도 하구나 가을바람은 불어서 그치지를 않으니 이 모두가 옥관(玉關)의 정을 일깨우노나 언제쯤 오랑캐를 평정하고 원정 끝낸 그이가 돌아오실까 長安一片月 萬戶擣衣聲 秋風吹不盡 總是玉關情 何日平胡虜 良人罷遠征 - 子夜吳歌 中 秋歌 / 李白 1936년, 함흥에서 만난 백석(白石)과 진향(眞香)은 첫눈에 사랑에 빠졌다. 어느 날 진향은 서점에서 라는 제목의 당시 선집을 사서 백석에게 보여주었다. 책을 훑어보던 백석은 미소를 머금고 진향을 바라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나, 당신에게 아호를 하나 지어줄 거야. 이제부터 '자야'라고 합시다!" 이렇게 해서 '자야'라는 애칭이 생겼고, 어쩌면 동진의 자야라는 여인처럼 평생을 기다리는 숙명으로 살아가도록 예정이 되었..

시읽는기쁨 2020.02.04

가벼운 금언 / 이상희

- 기적을 믿니? 이렇게 낡은 손으로 쓰는 약속을, 사랑을 너는 믿겠니? 빈 식기食器를 햇볕에 널고 오늘은 가벼운 금언을 짓기로 한다. 하루에 세 번 크게 숨을 쉴 것, 맑은 강과 큰 산이 있다는 곳을 향해 머리를 둘 것, 머리를 두고 누워 좋은 결심을 떠올려 볼 것, 시간의 묵직한 테가 이마에 얹힐 때까지 해질 때까지 매일 한 번은 최후를 생각해 둘 것. - 가벼운 금언 / 이상희 젊었을 때 늙은 내 모습을 상상한 적이 있었을까? 전혀 없지는 않았을 것 같다. 젊을 때의 내가 지금의 나를 본다면 뭐라고 할까? 그래, 잘 익어가고 있구나, 라고 고개를 끄덕여줄까? 아니면 실망 가득한 얼굴로 씁쓸하게 바라볼까? 가끔 그런 게 궁금할 때가 있다. '맑은 강과 큰 산이 있다는 곳을 향해 머리를 둘 것'이라는 ..

시읽는기쁨 2020.01.29

아귀들 / 정현종

계곡마다 식당이 들어차고 물가마다 레스토랑이 즐비하다. 이 나라 산천 가는 데마다 식당이요 카페요 레스토랑뿐이다. 굶어 죽은 귀신들이 환생을 해서 저렇게 됐을 것이다. 또 다른 아귀들은 몰려들어 아귀아귀 먹는다. (다 아는 얘기지만 대학가도 도시의 골목도 식당과 술집으로 미어진다!) 한 아귀인 나는 토종닭을 시켜 먹으며 이 천박한 나라를 개탄하고 개탄한다. 이 나라 이 국민은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가. 이 땅의 계곡들아 대답해다오. 바다야 강물들아 대답해다오. 아귀들 대답해다오. - 아귀들 / 정현종 "진지 드셨니껴?" 어릴 때 동네 골목에서 어르신을 만나면 의레 하던 인사말이었다. 제 때 끼니를 차려 먹기 어렵던 시절의 안타까움이 배어 있던 말이다. 아마 우리 나이대가 보릿고개를 경험한 마지막 세대일 것..

시읽는기쁨 2020.01.23

나이 / 이븐 하짐

누군가 나에게 나이를 물었지. 세월 속에 희끗희끗해진 머리를 보고 난 뒤 내 이마의 주름살들을 보고 난 뒤. 난 그에게 대답했지. 내 나이는 한 시간이라고. 사실 난 아무곳도 세지 않으니까. 게다가 내가 살아온 세월에 대해서는. 그가 나에게 말했지.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죠? 설명해 주세요. 그래서 난 말했지. 어느 날 불시에 나는 내 마음을 사로잡은 이에게 입을 맞추었지. 아무도 모르는 은밀한 입맞춤을. 나의 날들이 너무도 많지만 나는 그 짧은 순간만을 세지. 왜냐하면 그 순간이 정말로 나의 모든 삶이었으니까. - 나이 / 이븐 하짐 괴테가 그랬던가. 자신의 일생을 통해서 진정으로 행복했던 시간은 하루가 채 안 된다고. 우리가 볼 때 세상의 복이란 복은 혼자 독차지한 것 같은 괴테인데, 인간에게 ..

시읽는기쁨 2020.01.15

그거 안 먹으면 / 정양

아침저녁 한 웅큼씩 약을 먹는다 약 먹는 걸 더러 잊는다고 했더니 의사선생은 벌컥 화를 내면서 그게 목숨 걸린 일이란다 꼬박꼬박 챙기며 깜박 잊으며 약에 걸린 목숨이 하릴없이 늙는다 약 먹는 일 말고도 꾸역꾸역 마지못해 하고 사는 게 깜박 잊고 사는 게 어디 한두 가지랴 쭈글거리는 내 몰골이 안돼 보였던지 제자 하나가 날더러 제발 나이 좀 먹지 말라는데 그거 안 먹으면 깜박 죽는다는 걸 녀석도 깜박 잊었나보다 - 그거 안 먹으면 / 정양 요즘 들어 깜박하는 일이 잦다고 친구가 말했다. 시내에 나간 게 어제인지 그저께인지 헷갈린다고 쓴웃음을 지었다. 젊을 때 영민했던 친구도 나이를 먹으면서 이렇게 변해간다. 우리말에서 나이를 '먹는다'는 표현이 재미있다. 먹는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뜻이다. 먹지 않으면 죽는..

시읽는기쁨 2020.01.09

온돌방 / 조향미

할머니는 겨울이면 무를 썰어 말리셨다 해 좋을 땐 마당에 마루에 소쿠리 가득 궂은 날엔 방 안 가득 무 향내가 났다 우리도 따순 데를 골라 호박씨를 늘어놓았다 실겅엔 주렁주렁 메주 뜨는 냄새 쿰쿰하고 윗목에선 콩나물이 쑥쑥 자라고 아랫목 술독엔 향기로운 술이 익어가고 있었다 설을 앞두고 어머니는 조청에 버무린 쌀 콩 깨 강정을 한 방 가득 펼쳤다 문풍지엔 바람 쌩쌩 불고 문고리는 쩍쩍 얼고 아궁이엔 지긋한 장작불 등이 뜨거워 자반처럼 이리저리 몸을 뒤집으며 우리는 노릇노릇 토실토실 익어갔다 그런 온돌방에서 여물게 자란 아이들은 어느 먼 날 장마처럼 젖은 생을 만나도 아침 나팔꽃처럼 금세 활짝 피어나곤 한다 아, 그 온돌방에서 세월을 잊고 익어가던 메주가 되었으면 한세상 취케 만들 독한 밀주가 되었으면 아..

시읽는기쁨 2020.01.04

'나라' 없는 나라 / 이시영

어디 남태평양에 아직 발견되지 않은 섬은 없을까. 국경도 없고 경계도 없고 그리하여 군대나 경찰은 더욱 없는. 낮에는 바다에 뛰어들어 솟구치는 물고기를 잡고 야자수 아래 통통한 아랫배를 드러내고 낮잠을 자며 이웃 섬에서 닭이 울어도 개의치 않고 제국의 상선들이 다가와도 꿈쩍하지 않을 거야. 그 대신 밤이면 주먹만 한 별들이 떠서 참치들이 흰 배를 뒤집으며 뛰는 고독한 수평선을 오래 비춰줄 거야. 아, 그런 '나라' 없는 나라가 있다면! - '나라' 없는 나라 / 이시영 선거법과 공수처법 처리를 두고 국회가 시끄럽다. 무한한 권력욕과 제 이익 챙기기밖에 모르는 정치꾼들의 행태는 예나 지금이나 똑 같다. 언제 아니 그런 적 있었느냐고 나를 달래면서, 시인처럼 '나라' 없는 나라를 꿈꾼다. 쇠붙이와 껍데기의 ..

시읽는기쁨 2019.12.29

얼떨결에 / 고증식

나이 팔십에 여주 당숙은 다신 수술 안 받겠다 선언하고 두 해쯤 더 논에서 살다 돌아갔다 누구는 애통해하고 누구는 대단한 결단이네 평하지만 사실은 무서워서 그랬단다 얼떨결에 한번은 했지만 수술받고 깨어날 때 너무 아프더란다 이건 조카한테만 하는 얘기지만 치과도 안 가본 놈이 선뜻 따라가고 남자들 군대도 멋모를 때 한번 가는 거 아니냐고 얼떨결에 세월만 갔지 나이 먹었다고 다 깊어지는 게 아니더라고 죽을 때는 아마 그럴 거라고 얼떨결에 꼴까닥하고 말 거라고 그렇게 얼떨결에 노래하던 당숙은 내년에 뿌릴 씨앗들 골라 놓고 앞뒤 마당도 싹싹 비질해 놓고 그 길로 빈방에 들어 깊은 잠 되었다 - 얼떨결에 / 고증식 올 한 해도 꼬리에 다다랐다. 돌아보니 일 년이 얼떨결에 후딱 지나간 것 같다. 사람의 생애도 마찬..

시읽는기쁨 2019.12.23

버들가지는 꺾여도 / 신흠

오동나무는 천 년을 묵어도 제 곡조를 간직하고 매화는 평생 춥게 지내도 그 향기를 팔지 않는다 달은 천 번을 이지러져도 본바탕이 변하지 않고 버들가지는 백 번을 꺾여도 새 가지가 돋는다 桐千年老恒藏曲 梅一生寒不賣香 月到千虧餘本質 柳經百別又新枝 - 신흠(申欽, 1566~1628) 도산서원에 있는 왕버들을 올린 블로그 글에 어떤 분이 댓글을 달아주었다. 서원에 왜 버드나무가 있을까 궁금했는데, 신흠 선생의 이 시에 답이 있다고 알려준 것이었다. 퇴계 이황 선생이 이 시를 평생 좌우명으로 삼고 지내셨다는데, 두 분은 시대가 다르니 퇴계 선생이 알았을 리가 없다. 시가 품고 있는 의미는 짐작하셨을 수 있다. 어쨌든 도산서원의 버드나무는 선비 정신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상촌(象村) 신흠 선생은 조선 중기의 문..

시읽는기쁨 2019.12.15

애기와 바람 / 이원수

찬 바람이 제아무리 많이 불어도 애기는 꼭 밖에 나가 노올지. "감기 들라, 가지 마라." 할머니가 붙들면 고개를 잘래잘래 도리질하며 "아냐, 아냐 감기 없쪄." 문 열고 내다보면 바람맞이 밭길에 아, 우리 애기는 뛰어다니네. 떼지어 몰려가는 겨울바람 속으로 저기 우리 애기는 뛰어다니네. - 애기와 바람 / 이원수 유치원 버스에서 내린 손주를 맞아 집으로 돌아올 때 할머니와 손주는 자주 실랑이한다. 놀이터 옆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 그네 타고 놀래." "안 돼. 추워서 감기 걸리면 큰일 나." "난 안 춥단 말이야." 손주가 떼를 쓰면 할머니가 질 수밖에 없다. 따스한 날은 미세먼지 때문에 할머니는 또 걱정이다. 우리가 자랄 때는 공기 걱정, 날씨 걱정이 어디 있었는가. 고삐 풀린 망아..

시읽는기쁨 2019.12.06

떠도는 자의 노래 / 신경림

외진 별정우체국에 무엇인가를 놓고 온 것 같다 어느 삭막한 간이역에 누군가를 버리고 온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문득 일어나 기차를 타고 가서는 눈이 펑펑 쏟아지는 좁은 골목을 서성이고 쓰레기들이 지저분하게 널린 저잣거리도 기웃댄다 놓고 온 것을 찾겠다고 아니, 이미 이 세상에 오기 전 저 세상 끝에 무엇인가를 나는 놓고 왔는지도 모른다 쓸쓸한 나룻가에 누군가를 버리고 왔는지도 모른다 저 세상에 가서도 다시 이 세상에 버리고 간 것을 다시 찾겠다고 헤매고 다닐는지도 모른다 - 떠도는 자의 노래 / 신경림 "이 물을 마시는 이는 누구나 다시 목마를 것입니다."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신 말씀은 옳다. 영혼의 측면에서 인간은 갈증을 느끼는 존재다. 물은 잠시의 해갈일 뿐 다시 갈증이 찾아온다. 잘못 소금물..

시읽는기쁨 2019.11.28

진경 / 손세실리아

북한산 백화사 굽잇길 오랜 노역으로 활처럼 휜 등 명아주 지팡이에 떠받치고 무쇠 걸음 중인 노파 뒤를 발목 잘린 유기견이 묵묵히 따르고 있습니다 가쁜 생의 고비 혼자 건너게 할 수 없다며 눈에 밟힌다며 절룩절룩 쩔뚝쩔뚝 - 진경(珍景) / 손세실리아 시집 를 폈을 때 맨 처음에 만난 이 시에 가슴이 먹먹해져 책장을 넘기지 못했다. 이 시에 묘사된 노파의 이미지가 떠오르면 무엇엔가 체한 것 같기도 하고, 칼에 베인 것 갈기도 한 통증이 생겼다. 백화사 굽잇길의 노파를 연민이나 동정의 대상으로 여겼다면 그럴 리가 없었을 것이다. 생명(生命)을 직역하면 '살아내라는 명령'이 아닌가. 그러나 고단한 인생길일지라도 한 아픔이 다른 아픔을 보듬고 함께 걸어갈 때 꽃이 되고 진경이 될 수 있지 않은가. 애잔한 생명붙..

시읽는기쁨 2019.11.22

아기는 있는 힘을 다하여 잔다 / 김기택

아기는 있는 힘을 다하여 잔다. 부드럽고 기름진 잠을 한순간도 흘리지 않는다. 젖처럼 깊이 빨아들인다. 옆에서 텔레비전이 노래 불러대고 아빠가 전화기에 붙어 회사 일을 한참 떠들어대도 아기의 잠은 조금도 움츠러들거나 다치지 않는다. 어둠속에서 수액을 퍼올리는 뿌리와 같이, 잠은 고요하지만 있는 힘을 다하여 움직인다. 아기는 간간이 이불을 걷어차거나, 깨어 울거나, 칭얼거리며 엄마 품을 파고든다. 그래도 엄마는 젖을 주거나 쉬를 누이지 않는다. 얼핏 깬 듯 보여도 실은 곤히 자고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몽유병자처럼 허깨비 몸은 움직이지만, 잠은 한치도 흔들리거나 빈틈을 보이는 일이 없다. 남김없이 잠을 비운 아기가 아침 햇빛을 받아 환하게 깨어난다. 밤사이 훌쩍 자란 풀잎 같이 이불을 차고 일어난다. ..

시읽는기쁨 2019.11.16

연꽃이 피어나네 / 한산

너른 바위에 홀로 앉았노라니 계곡물 소리에 가슴 시리네 고요한 풍광 눈부시게 아름답고 안개 속에 희미하게 바위 드러나네 편안한 마음으로 쉬노라니 지는 해에 나무 그림자 낮아졌네 내 스스로 마음자리 들여다보니 흙탕물 속에서 연꽃이 피어나네 盤陀石上坐 谿澗冷凄凄 靜玩偏嘉麗 虛巖蒙霧迷 恰然憩歇處 日斜樹影低 我自觀心地 蓮花出於泥 - 寒山 가을이 짙어가는 시절에 한산의 시를 읽는다. 한산이 듣던 천태산(天台山)의 맑은 계곡물 소리에 귀 기울인다. 물욕에 찌든 이 검은 속내를 조금이나마 씻어가 주길 기대하면서. 나는 언제쯤 구차한 자리 훌훌 털고 편안한 마음으로 쉴 수 있으리. 제 마음자리 들여다보며 '흙탕물 속에서 연꽃이 피어나네'라고 노래할 수 있으리. 한산은 다른 시에서 자신을 이렇게 드러냈다. 吾心似秋月 碧..

시읽는기쁨 2019.11.09

논어 새로 읽기 / 권순진

사람이 칠십까지 살아내기가 여의치 않았던 시절 그 나이라면 가르칠 일도 깨우칠 것도 없었겠다. 나이 오십에 하늘의 뜻을 다 알아차려야 한다 했으니 그 문턱 넘은 뒤로는 다만 제각기 붙은 자리에서 순서대로 순해지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귀가 순해지는 이순耳順에 앞서 쉰다섯 즈음엔 입이 순해지는 구순口順이어야 지당하고 귀와 입이 양순해진 다음에는 눈의 착함이 순서란 말이지 예순 다섯 안순眼順은 세상으로 향하는 눈이 너그러워질 때. 입과 귀와 눈이 일제히 말랑말랑해지면 좌뇌 우뇌 다 맑아져서 복장 또한 편해지겠거늘 아직도 주둥이는 달싹달싹 귓속은 가렵고 눈은 그렁그렁 찻잔 속 들여다보며 간장종지만 달그락대고 있으니. - 논어 새로 읽기 / 권순진 어제 읽기를 마쳤다. 무려 7년이 걸렸다. 를 다시 읽은 계기..

시읽는기쁨 2019.10.30

이 넉넉한 쓸쓸함 / 이병률

우리가 살아 있는 세계는 우리가 살아가야 할 세계와 다를 테니 그때는 사랑이 많은 사람이 되어 만나자 무심함을 단순함을 오래 바라보는 사람이 되어 만나자 저녁빛이 마음의 내벽 사방에 펼쳐지는 사이 가득 도착할 것을 기다리자 과연 우리는 점 하나로 온 것이 맞는지 그러면 산 것인지 버틴 것인지 그 의문마저 쓸쓸해 문득 멈추는 일이 많았으니 서로를 부둥켜안고 지내지 않으면 안 되게 살자 닳고 해져서 더 이상 걸을 수 없다고 발이 발을 뒤틀어버리는 순간까지 우리는 그것으로 살자 밤새도록 몸에서 운이 다 빠져나가도록 자는 일에 육체를 잠시 맡겨두더라도 우리 매일 꽃이 필 때처럼 호된 아침을 맞자 - 이 넉넉한 쓸쓸함 / 이병률 일행과 헤어져서 돌아오다가 버스 창문으로 들어오는 화사한 가을 햇살에 끌려 중간에 내..

시읽는기쁨 2019.10.25

하늘 / 박두진

하늘이 내게로 온다. 여릿여릿 머얼리서 온다. 하늘은, 머얼리서 오는 하늘은 호수처럼 푸르다. 호수처럼 푸른 하늘에 내가 안긴다. 온몸이 안긴다. 가슴으로, 가슴으로 스미어드는 하늘 향기로운 하늘의 호흡 따가운 볕 초가을 햇볕으로 목을 씻고 나는 하늘을 마신다. 자꾸 목말라 마신다. 마시는 하늘에 내가 익는다. 능금처럼 내 마음이 익는다. - 하늘 / 박두진 박두진 시인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시다. 박두진 문학길을 걸으며 이 시를 찾아 읊었다. 요사이는 휴대폰이 있으니 편리하다. 젊었을 때 무척 좋아했던 시였는데 그동안 까맣게 잊고 있음을 새삼 알아챘다. 푸른 가을 하늘 아래 호수를 따라 오붓하게 길이 나 있었다. 시인이 말하는 호수를 여기 금광호수로 착각한들 어떠랴. 호수는 지상의 꿈, 하늘은 천상의..

시읽는기쁨 2019.10.17

복권 가게 앞에서 / 박상천

아이와 함께 길을 걷다가 문득 복권이 사고 싶다. 호주머니에 손을 넣다가 잠시 망설인다. 복권을 사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이긴 싫어 꾸욱 참고 가게 앞을 그냥 지나쳐 간다. 자꾸만 호주머니에 손이 가지만 아이에게 변명할 말들이 잘 생각나지 않는다. 내 행동을 이해하도록 설명해주어야 할만큼 아이가 자라고 나니 이제 나는 복권을 사고 싶은 나이, 참 쓸쓸하고 허전한 나이에 이르고 말았다. - 복권 가게 앞에서 / 박상천 집으로 오는 길목에 복권 가게가 새로 생겼다. 몇 번 지나치다가 어제는 안으로 들어갔다. 젊은 남자가 앉아있다가 반갑게 맞는다. 언제 개업했느냐고 물으니, 그동안 세 번 추첨했는데 5만 원짜리 당첨이 여러 번 나왔다고 자랑한다. 고작 5만 원이냐고 반문하니 그것도 쉽지 않단다. 6개 숫자 중 ..

시읽는기쁨 2019.10.08

받들어 꽃 / 곽재구

국군의 날 행사가 끝나고 아이들이 아파트 입구에 모여 전쟁놀이를 한다 장난감 비행기 전차 항공모함 아이들은 저희들 나이보다 많은 수의 장난감 무기들을 횡대로 늘어놓고 에잇 기관총 받아라 수류탄 받아라 무서운 줄 모르고 서로가 침략자가 되어 전쟁놀이를 한다 한참 그렇게 바라보고 서 있으니 아뿔사 힘이 센 304호실 아이가 303호실 아이의 탱크를 짓누르고 짓눌린 303호실 아이가 기관총을 들고 부동자세로 받들어 총을 한다 아이들 전쟁의 클라이막스가 받들어 총에 있음을 우리가 알지 못했듯이 아버지의 슬픔의 클라이막스가 받들어 총에 있음을 아이들은 알지 못한다 떠들면서 따라오는 아이들에게 아이스크림과 학용품 한아름을 골라주며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 앞에서 나는 얘기했다 아름답고 힘있는 것은 총이 아니란다 아름..

시읽는기쁨 2019.10.03

경안리에서 / 강민

"이 놈의 전쟁 언제나 끝나지. 빨리 끝나야 고향엘 갈 텐데." 때와 땀에 절어 새까만 감발을 풀며 그는 말했다. 부풀어 터진 그의 발바닥이 찢어진 이 강산의 슬픔을... 말해 주고 있었다 지치고 더럽게 얼룩진 그의 몸에선 어쩌면 그의 두고 온 고향 같은 냄새가 났다 1950년 8월의 경안리 주막 희미한 등잔불 밑에서 우리는 같은 또래끼리의 하염없는 얘기를 나누었다 적의(敵意)는 없었다 같은 말을 쓸 수 있다는 행복감마저 있었다 고급중학교에 다니다 강제로 끌려나와 여기까지 왔다는 그 그에게 나는 또 철없이 말했었다 "북이 쳐내려오니 남으로 달아나는 길"이라고 적의는 없었다 우리는 서로 쳐다보며 피식 웃었다 굶주리고 지친 사람들은 모두 잠이 들고, 우리만 하염없는 얘기로 밤을 밝혔다 그리고 새벽에 그는 떠..

시읽는기쁨 2019.09.24

씨팔! / 배한봉

수업 시간 담임선생님의 숙제 질문에 병채는 "씨팔!"이라고 대답했다 하네 아이들은 책상을 두드리며 웃었으나 "씨팔! 확실한 기라예!" 병채는 다시 한 번 씩씩하게 답했다 하네 처녀인 담임선생님은 순간 몹시 당황했겠지 그러다 녀석의 공책을 보고는 배꼽을 잡았겠지 어제 초등학교 1학년 병채의 숙제는 봉숭아 씨방을 살펴보고 씨앗수를 알아가는 것 착실하게 자연 공부를 하고 공책에 '씨8'이라 적어간 답을 녀석은 자랑스럽게 큰 소리로 말한 것뿐이라 하네 세상의 물음에 나는 언제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답을 외쳐본 적 있나 울퉁불퉁 비포장도로 같은 삶이 나를 보고 씨팔! 씨팔! 지나가네 - 씨팔! / 배한봉 에 보아뱀 그림 이야기가 나온다. 어린 왕자가 보아뱀이 코끼리를 잡아먹은 그림을 그렸지만, 어른들은 모자 그..

시읽는기쁨 2019.09.18

엄마가 숙제하라고 했는데 잠깐만 놀고 하려고 놀이터에 갔다가 미끄럼틀에서 넘어져서 이빨이 부러져 치과에 갔는데 의사선생님이 어쩌다 이랬냐고 물어서 한 말 / 김창완

모아요 - 엄마가 숙제하라고 했는데 잠깐만 놀고 하려고 놀이터에 갔다가 미끄럼틀에서 넘어져서 이빨이 부러져 치과에 갔는데 의사선생님이 어쩌다 이랬냐고 물어서 한 말 / 김창완 시 제목이 길고 내용이 단 한 마디로 된 게 재미있다. 역시 재치있는 김창완 시인이다. 사건이 일어난 상황부터 아이의 대답까지 따라가는 내내 웃음이 나온다. 아이의 "모아요" 한 마디가 절정을 찍는다. 천진난만한 시인의 얼굴이 떠오른다. 예순 여섯 나이에 어디서 이런 동심이 샘솟는지 정말 '모아요'다.

시읽는기쁨 2019.09.09

풀 / 김재진

베어진 풀에서 향기가 난다 알고 보면 향기는 풀의 상처다 베이는 순간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지만 비명 대신 풀들은 향기를 지른다 들판을 물들이는 초록의 상처 상처가 내뿜는 향기에 취해 나는 아픈 것도 잊는다 상처도 저토록 아름다운 것이 있다 - 풀 / 김재진 '아름다움'은 '앓음'에서 나왔는지 모른다. 예술 작품을 보라. 창작 과정의 고통과 아픔 없이 나오는 명작은 없다. 상처의 향기가 사람에게 감동을 준다. 풀은 자신의 전 생이 베어지는 때에 향기를 낸다. 원망과 한탄의 늪에 빠지거나 복수의 칼날을 갈지 않는다. 상처에서 나오는 악취는 썩는 신호다. 향기는 생명 의지의 표현이다. 상처의 향기가 아름다움이다.

시읽는기쁨 2019.08.30

게으름 연습 / 나태주

텃밭에 아무 것도 심지 않기로 했다 텃밭에 나가 땀흘려 수고하는 대신 낮잠이나 자 두기로 하고 흰 구름이나 보고 새소리나 듣기로 했다 내가 텃밭을 돌보지 않는 사이 이런 저런 풀들이 찾아와 살았다 각시풀, 쇠비름, 참비름, 강아지풀, 더러는 채송화 꽃 두어 송이 잡풀들 사이에 끼어 얼굴을 내밀었다 흥, 꽃들이 오히려 잡풀들 사이에 끼어 잡풀 행세를 하러드는군 어느 날 보니 텃밭에 통통통 뛰어노는 놈들이 있었다 메뚜기였다 연초록 빛 방아깨비, 콩메뚜기, 풀무치 어린 새끼들도 보였다 하, 이 녀석들은 어디서부터 찾아온 진객(珍客)들일까 내가 텃밭을 돌보지 않는 사이 하늘의 식솔들이 내려와 내 대신 이들을 돌보아 주신 모양이다 해와 달과 별들이 번갈아 이들을 받들어 가꾸어 주신 모양이다 아예 나는 텃밭을 하늘..

시읽는기쁨 2019.08.25

힘없는 자는 / 박노해

힘없는 자는 용서할 자유마저 없나니 그것은 비굴함이기에 힘없는 자는 화해할 자유마저 없나니 그것은 도피이기에 힘없는 자는 침묵할 자유마저 없나니 그것은 불의의 승인이기에 힘을 기르자 저 강대한 세력을 기어코 뛰어넘을 저 사나운 폭력을 끝끝내 품어 안을 끈질긴 힘, 사랑의 힘을 - 힘없는 자는 / 박노해 지난 8월 15일 제74주년 광복절 기념식에서 문 대통령은 '아무도 흔들 수 없는 나라'를 만들자고 강조했다. 대통령이 경축사에서 인용한 시가 김기림의 '새나라송頌'이다. 이 시에는 '시멘트와 철과 희망 위에 아무도 흔들 수 없는 새 나라 세워 가자'라는 구절이 나온다. 대통령 메시지의 핵심이 '아무도 흔들 수 없는 나라'다. 일본의 무역 보복으로 그 의미가 엄중하게 다가온다. 박노해 시인의 이 시 역시 ..

시읽는기쁨 2019.08.17

모든 것을 기억하는 물 / 김혜순

직육면체 물, 동그란 물, 길고 긴 물, 구불구불한 물, 봄날 아침 목련꽃 한 송이로 솟아오르는 물, 내 몸뚱이 모습 그대로 걸어가는 물, 저 직립하고 걸어다니는 물, 물, 물...... 내 아기, 아장거리며 걸어오던 물, 이 지상 살다갔던 800억 사람 몸 속을 모두 기억하는, 오래고 오랜 빗물, 지구 한 방울. 오늘 아침 내 눈썹 위에 똑 떨어지네. 자꾸만 이곳에 있으면서 저곳으로 가고 싶은, 그런 운명을 타고난 저 물이, 초침 같은 한 방울 물이 내 뺨을 타고 또 어딘가로 흘러가네. - 모든 것을 기억하는 물 / 김혜순 지금 내가 숨 쉬는 한 호흡 속에도 우주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 땅속 깊은 곳의 마그마인 적도 있고, 600년 전 세종대왕의 폐에 들어갔던 공기 분자도 있을 것이다. 생명이 다하면..

시읽는기쁨 2019.08.11

나 홀로 웃노라 / 정약용

有栗無人食 多男必患飢 達官必倡愚 才者無所施 家室少完福 至道常陵遲 翁嗇子每蕩 婦慧郞必癡 月滿頻値雲 花開風誤之 物物盡如此 獨笑無人知 - 獨笑 / 丁若鏞 양식 많은 집은 자식이 귀하고, 아들 많은 집은 허구한 날 끼니 걱정 벼슬 높은 사람은 으례 멍청하고, 재주 있는 사람은 펼 길이 없다오 복 많아도 다 갖춘 집 드물고, 지극한 도라도 무너지기 마련 아비가 절약하면 자식은 흥청망청, 아내가 똑똑하면 남편은 꼭 바보라오 달이 차면 구름이 자주 끼고, 꽃이 피면 바람이 심술 부려 세상만사 다 이러하니, 사람들은 모르리라 나 홀로 웃는 까닭 이만큼이라도 살아보니 한 가지는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세상사가 내 뜻대로는 안 된다." 도모하는 일은 자주 어긋나게 마련이고, 열에 아홉은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것이..

시읽는기쁨 2019.08.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