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1121

건들건들 / 이재무

꽃한테 농이나 걸며 살면 어떤가 움켜쥔 것 놓아야 새것 잡을 수 있지 빈손이라야 건들건들 놀 수 있지 암팡지고 꾀바르게 사느라 웃음 배웅한 뒤 그늘 깊어진 얼굴들아, 경전 따위 율법 따위 침이나 뱉어주고 가볍고 시원하게 간들간들 근들근들 영혼 곳간에 쟁인 시간의 낱알 한 톨 두 톨 빼먹으며 살면 어떤가 해종일 가지나 희롱하는 바람같이 - 건들건들 / 이재무 CBS 라디오에서 아나운서의 낭랑한 목소리로 소개받은 시다. "아, 그래!" 하며 잔잔한 물결로 가슴에 스며들었다. 세상살이 뭐 별것 있는가. 견주고, 탐내고, 다 헛된 짓거리가 아닌가. 하지만 누습에 절어 알면서도 어리석은 길에서 빠져나오지를 못한다. 이번 주의 화두는 시의 제목인 '건들건들'로 삼기로 한다. 꽃한테 농이나 걸며, 가지나 희롱하는 바..

시읽는기쁨 2020.10.24

슬기로운 등산법 / 곽은지

가만히 산을 올라보면 알 거야 같은 길도 여러 번 걸어보아야 길이 열린다는 것을 새침한 산새는 휙 지나가는 사람에게 마음을 주지 않고 나무도 한 번 지나가는 이에게 이야기를 걸지 않는다 여러 번 걷고 가만히 보는 자에게만 보이는 길 새의 노랫소리 얽혀 있는 나무의 포옹 꽃의 향기 바람결에 스치우는 풀 그리고 걸음마다 들리는 나뭇가지 부서지는 소리 가만히 산을 올라보면 알 거야 같은 길도 여러 번 걸어보아야 길이 열린다는 것을 - 슬기로운 등산법 / 곽은지 딱 우리 동네 뒷산에 맞는 시다. 10년 동안 살면서 제일 많이 찾은 곳이 뒷산이다. 등산이라고는 할 수 없는 야트막한 산이지만, 그래서 부담이 없고 편안하다. 오르는 데 특별한 준비도 필요 없다. 운동화를 신고 나서기만 하면 된다. 늘 같은 길이어서 ..

시읽는기쁨 2020.10.15

햇살의 말씀 / 공광규

세상에 사람과 집이 하도 많아서 하느님께서는 모두 들르시기가 어려운지라 특별히 추운 겨울에는 거실 깊숙이 햇살을 넣어주시는데 베란다 화초를 반짝반짝 만지시고 난초 잎에 앉아 휘청 몸무게를 재어보시고 기어가는 쌀벌레 옆구리를 간지럼 태워 데굴데굴 구르게 하시고 의자에 걸터앉아 책상도 환하게 만지시고 컴퓨터와 펼친 책을 자상하게 훑어보시고는 연필을 쥐고 백지에 사각사각 무슨 말씀을 써보라고 하시는지라 나는 그것이 궁금하여 귀를 세우고 거실 바닥에 누웠는데 햇살도 함께 누워서 볼과 코와 이마를 만져주시는지라 아! 따뜻한 햇살의 체온 때문에 나는 거실에 누운 까닭을 잊고 한참이나 있었는데 지나고 보니 햇살이 쓰시려고 했던 말씀이 생각나는지라 "광규야, 따뜻한 사람이 되거라" - 햇살의 말씀 / 공광규 지금 우리..

시읽는기쁨 2020.10.07

가을의 소원 / 안도현

적막의 포로가 되는 것 궁금한 게 없이 게을러지는 것 아무 이유 없이 걷는 것 햇볕이 슬어놓은 나락 냄새 맡는 것 마른풀처럼 더이상 뻗지 않는 것 가끔 소낙비 흠씬 맞는 것 혼자 우는 것 울다가 잠자리처럼 임종하는 것 초록을 그리워하지 않는 것 - 가을의 소원 / 안도현 자리에서 일어나면 싸늘한 기운이 적당히 기분 좋다. 자동으로 창문을 열던 손길도 멈추었다. 창 곁에 다가와 있던 안개가 천천히 물러가고 있다. 그 빈 자리를 '초추(初秋)의 양광(陽光)'이 채우기 시작하는 아침이다. 시인을 따라 내 가을의 소원은 뭐가 있을까를 들여다본다. '소원 없음'으로 소원을 삼는 게 제일 낫지 않을까, 라는 건방진 생각도 해 본다. 쉼 없이 생기고 사라지는 가운데 자연은 그대로 여여(如如)하거늘...

시읽는기쁨 2020.09.28

길들이기 / 방주현

주인이 집으로 돌아오면 꼬리를 흔들며 달려가 반겨 줘 너를 쓰다듬을 때는 웃으면서 머리를 대 주고 간식을 들고 부를 땐 가서 안겨도 돼 빈손으로 부를 땐 가끔 가지 말고 불러도 못 들은 척 보아도 못 본 척하는 날도 있어야 해 주인이 기운 없이 앉아 있을 땐 손을 핥아주고 무릎에 올라가 눈을 맞춰 줘 그러면 주인은 점점 길이 들어서 너를 찾게 될 거야 너만 찾게 될 거야 - 길들이기 / 방주현 나는 개를 좋아하지 않는다. 개가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성향이 싫다. 반면에 고양이는 좋다. 차갑게 보이는 냉정함, 사람에 집착하지 않는 독립성이 마음에 든다. 고양이의 눈에서는 살아 있는 야성이 보인다. "나는 사람에 충성하지 않는다." 이런 말을 할 정도면 갯과는 아니고 적어도 고양잇과에 속하는 사람이리라. 뒤..

시읽는기쁨 2020.09.17

여름휴가 / 신미나

불이 잘 안 붙네 형부는 번개탄 피우느라 눈이 맵고 오빠는 솥뚜껑 뒤집어 철수세미로 문지르고 고기 더 없냐 쌈장 어딨냐 돗자리 깔아라 상추 씻고 마늘 까고 기름장 내올 때 핏물이 살짝 밸 때 뒤집어야 안 질기지 그럼 잘하는 사람이 굽든가 언니가 소리 나게 집게를 내려놓을 때 장모님도 얼른 드세요 차돌박이에서 기름 뚝뚝 떨어질 때 소주 없냐 글라스 내와라 아버지가 소리칠 때 이 집 잔치한댜 미희 엄마가 머릿수건으로 탑새기를 탁탁 털며 마당에 들어설 때 달아오른 솥뚜껑 위로 치익 떨어지는 빗방울 비 온다 - 여름휴가 / 손미나 여름휴가를 잃어버린 2020년이다. 그러나 뒤집어 생각해서 아쉬워 말자. 모든 관계를 재점검하라고 코로나가 준 선물인지 모른다. 우리가 과연 제대로 살아왔던가? 사람과 일, 자연과의 ..

시읽는기쁨 2020.09.08

그 사람을 사랑한 이유 / 이생진

여기서는 실명이 좋겠다 그녀가 사랑했던 남자는 백석(白石)이고 백석이 사랑했던 여자는 김영한(金英韓)이라고 한데 백석은 그녀를 "자야(子夜)"라고 불렀지 이들이 만난 것은 20대 초 백석은 시 쓰는 영어선생이었고 자야는 춤추고 노래하는 기생이었다 그들은 3년동안 죽자사자 사랑한 후 백석은 만주땅을 헤매다 북한에서 죽었고 자야는 남한에서 무진 돈을 벌어 길상사에 시주했다 자야가 죽기 열흘 전 기운 없이 누워 있는 노령의 여사에게 젊은 기자가 이렇게 물었다 - 1000억의 재산을 내놓고 후회되지 않으세요? "무슨 후회?" - 그 사람 생각을 언제 많이 하셨나요?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는 때가 있나?" 기자는 어리둥절했다 - 천금을 내놨으니 이제 만복을 받으셔야죠 "그게 무슨 소용있어" 기자는 또 한번 어리..

시읽는기쁨 2020.08.31

세상에서 가장 큰 우산을 써 본 날 / 김봄희

후두두둑 비가 세차게 내리는데 마을버스가 서둘러 정류장에 들어왔어. 사람들은 우산을 접지도 펴지도 못한 채 엉거주춤한 자세로 버스에 오를 준비를 했지. 그때 교복을 입은 오빠가 가만히 버스 줄 밖으로 비켜서는 거야. 다른 차를 타려나 보다 생각했는데 아니었어. 기다리던 사람들이 버스에 다 오를 때까지 한참동안 우산을 높이 펴 들고 서 있더니 맨 마지막으로 버스에 오르는 거야. 그것을 본 만원 버스 속 사람들은 한 발짝씩 자리를 옮겨 오빠가 설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어. 마을버스는 걷는 사람들에게 빗물이 튀지 않게 더 천천히 움직였지. 나는 그날 세상에서 가장 큰 우산을 써 본 거야. - 세상에서 가장 큰 우산을 써 본 날 / 김봄희 따스하고 아름다운 장면이다. 누가 공익 광고로 찍어줬으면 좋겠다. 배려..

시읽는기쁨 2020.08.23

중용가 / 이밀

이 세상 모든 일은 중용이 제일이거니, 믿고 살아왔다네 - 한데 이상도 하지. 이 '중용' - 씹으면 씹을수록 단맛이 나네 그려. 자아, 이렇게 되면 무엇이고 중용을 택하여 당황하지 않고 서두르지 않으니 마음은 편하기 그지없는 것. 하늘과 땅 사이는 넓디넓은 것. 읍내와 시골 사이에 살며, 산과 개울 사이에 농토를 갖네. 반은 선비요, 반은 농사꾼일세. 적당히 일하고 적당히 노네. 아랫사람들도 적당히 구슬리네. 집은 너무 좋지도 그렇다고 초라하지도 않으니 가꾼 것이 절반이요, 안 가꾼 것 또한 절반일세. 입은 옷은 낡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새로 장만한 것도 아닐세. 너무 좋은 음식도 먹지 않고 하인배는 바보와 꾀보의 중간내기라. 아내는 너무 똑똑하지도 않고 너무 단순치도 않으니, 그러고 보면 이내 몸은 반..

시읽는기쁨 2020.08.16

변덕스런 날씨 / 김시습

개었다가 비 오고 비 오다 다시 개고 하늘도 그런데 하물며 세상 인정이랴 나를 칭찬하다가는 다시 나를 헐뜯고 이름 피한다면서 도리어 이름 구하네 피고 지는 저 꽃을 봄이 어찌 주관하며 가고 오는 저 구름과 산이 어찌 다투리 바라건대 사람들아 이 말을 기억하라 평생 동안 즐거운 곳 어디에도 없느니 乍晴還雨雨還晴 天道猶然況世情 譽我便應還毁我 逃名却自爲求名 花開花謝春何管 雲去雲來山不爭 寄語世人須記憶 取歡無處得平生 - 변덕스런 날씨(乍晴乍雨) / 김시습(金時習) "雲去雲來山不爭(구름 가고 구름 오되 산은 다투지 않는다)", 시를 읽어 내려가다가 여기에서 오래 멎는다. 하늘조차 변화무쌍한데 세상사야 오죽하겠는가. 변덕이 죽 끓듯 하는 인심은 더 말할 나위 없으리라. 돈, 건강, 명성, 그 어느 것이든 일일이 쫓아..

시읽는기쁨 2020.08.08

오징어 / 유하

눈앞의 저 빛! 찬란한 저 빛! 그러나 저건 죽음이다 의심하라 모오든 광명을! - 오징어 / 유하 쥐약을 덥석 삼키듯이 불난 집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지도 모르고 파티를 즐기듯이 떼를 지어 절벽으로 내달리는 레밍처럼 집어등 불빛을 향해 맹목적으로 달려드는 오징어처럼 우리 역시 현란한 빛과 향기에 취해 떼거리로 달려가고 있는지 모른다. 그 방향은 죽음으로 가는 길이라고 아무리 외쳐도, "미친놈!"이라고 손가락질하면서....

시읽는기쁨 2020.08.02

유언 / 류근

절대로 남에게 베푸는 사람 되지 말아라. 희생하는 사람 되지 말아라. 깨끗한 사람 되지 말아라. 마음이 따뜻해서 남보다 추워도 된다는 생각하지 말아라. 앞서 나가서 매맞지 말아라. 높은 데 우뚝 서서 조롱 당하지 말아라. 남이 욕하면 같이 욕하고 남이 때리면 같이 때려라. 더 욕하고 더 때려라. 남들에게 위로가 되기 위해 웃어주지 말아라. 실패하면 슬퍼하고 패배하면 분노해라. 빼앗기지 말아라. 빼앗기면 천배 백배로 복수하고 더 빼앗아라. 비겁해서 행복해질 수 있다면 백번이라도 비겁해라. 천국과 지옥이 있다고 믿지 말아라. 하느님이 있다고 믿지 말아라. 큰 교회 다녀라. 세상에 나쁜 짓이 있다고 믿지 말아라. 부끄러운 짓이 있다고 믿지 말아라. 양심과 선의는 네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라. 네가 나서지 않아도..

시읽는기쁨 2020.07.22

중은(中隱) / 백거이

大隱住朝市 小隱入久樊 丘樊太冷落 朝市太囂喧 不如作中隱 隱在留司官 似出服似出 非忙亦非閑 不勞心與力 又免饑與寒 終歲無公事 隨月有俸錢 君若好登臨 城南有秋山 君若愛游蕩 城東有春園 君若欲一醉 時出赴賓筵 洛中多君子 可以恣歡言 君子欲高臥 但自深俺關 亦無車馬客 造次到門前 人生處一世 其道難兩全 賤即苦凍餒 貴即多憂患 唯此中隱士 致身吉且安 窮通與豊約 正在四者間 제대로 된 은자는 조정과 저자에 있고 은자입네 하는 이들 산야로 들어가지만 산야는 고요하나 쓸쓸하기 짝이 없고 조정과 저자는 너무 소란스럽네 그 둘 모두 한직에 있는 것만 못하니 중은(中隱)이란 일 없는 직에 머무르는 것이라 출사한 것 같으면서 은거한 것 같고 바쁜 것도 그렇다고 한가한 것도 아니라네 몸과 마음 힘들어 할 까닭도 없고 추위와 주림도 면할 수가 있으며 ..

시읽는기쁨 2020.07.14

미래가 쏟아진다면 / 김소연

나는 먼 곳이 되고 싶다 철로 위에 귀를 댄 채 먼 곳의 소리를 듣던 아이의 마음으로 더 먼 곳이 되기 위해선 무얼 해야 할까 꿈속이라면 아이가 될 수도 있다 악몽을 꾸게 될 수도 있다 몸이 자꾸 나침반 바늘처럼 떨리는 아이가 되어 무슨 잘못을 저질렀을까 봐 괴로워하면서 몸이 자꾸 깃발처럼 펄럭이는 아이가 되어 어리석은 사랑에 빠졌을까 봐 괴로워하면서 무녀리로 태어나 열흘을 살다 간 강아지의 마음으로 그 뭉근한 체온을 안고 무덤을 만들러 가는 아이였던 마음으로 꿈에서 깨게 될 것이다 울지 마, 울지 마 라며 찰싹찰싹 때리던 엄마가 실은 자기가 울고 싶어 그랬다는 걸 알아버린 아이가 될 것이다 그럴 때 아이들은 여기에 와서 모르는 사람에게 손을 흔든다 꿈이라면 잠깐의 배웅이겠지만 불행히도 꿈은 아니라서 마..

시읽는기쁨 2020.07.07

물 끓이기 / 정양

한밤중에 배가 고파서 국수나 삶으려고 물을 끓인다. 끓어오를 일 너무 많아서 끓어오르는 놈만 미친놈 되는 세상에 열받은 냄비 속 맹물은 끓어도 끓어도 넘치지 않는다. 혈식(血食)을 일삼는 작고 천한 모기가 호랑이보다 구렁이보다 더 기가 막히고 열받게 한다던 다산 선생 오물수거비 받으러 오는 말단에게 신경질부리며 부끄럽던 김수영 시인 그들이 남기고 간 세상은 아직도 끓어오르는 놈만 미쳐 보인다. 열받는 사람만 쑥스럽다. 흙탕물 튀기고 간 택시 때문에 문을 쾅쾅 여닫는 아내 때문에 '솔'을 팔지 않는 담뱃가게 때문에 모기나 미친개나 호랑이 때문에 저렇게 부글부글 끓어오를 수 있다면 끓어올라 넘치더라도 부끄럽지도 쑥스럽지도 않은 세상이라면 그런 세상은 참 얼마나 아름다우랴. 배고픈 한밤중을 한참이나 잊어 버리..

시읽는기쁨 2020.07.02

비가 오신다 / 이대흠

서울이나 광주에서는 비가 온다는 말의 뜻을 알 수가 없다 비가 온다는 말은 장흥이나 강진 그도 아니면 구강포쯤 가야 이해가 된다 내리는 비야 내리는 비이지만 비가 걸어서 오거나 달려오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어떨 때 비는 싸우러 오는 병사처럼 씩씩거리며 다가오기도 하고 또 어떨 때는 그 병사의 아내가 지아비를 전쟁터로 보내고 돌아서서 골목길을 걸어오는 그 터벅거림으로 온다 그리고 또 어떨 때는 새색시 기다리는 신랑처럼 풀 나무 입술이 보타 있을 때 산모롱이에 얼비치는 진달래 치마로 멀미나는 꽃내를 몰고 오시기도 하는 것이다 - 비가 오신다 / 이대흠 농경사회에서는 자연에 대한 관심이 클 수밖에 없었다. 비나 바람에 대한 표현이 발달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비 이름만 해도 수십 가지를 헤아린다. 실비 /..

시읽는기쁨 2020.06.25

오늘, 쉰이 되었다 / 이면우

서른 전, 꼭 되짚어보겠다고 붉은 줄만 긋고 영영 덮어버린 책들에게 사죄한다 겉 핥고 아는 체했던 모든 책의 저자에게 사죄한다 마흔 전, 무슨 일로 다투다 속맘으론 낼, 모레쯤 화해해야지 작정하고 부러 큰 소리로 옳다고 우기던 일 아프다 세상에 풀지 못한 응어리가 아프다 쉰 전, 늦게 둔 아이를 내가 키운다고 믿었다 돌이켜보면, 그 어린 게 날 부축하여 온 길이다 아이가 이 구절을 마음으로 읽을 때쯤이면 난 눈썹 끝 물방울 같은 게 되어 있을 게다 오늘 아침, 쉰이 되었다, 라고 두 번 소리내어 말해보았다 서늘한 방에 앉았다가 무릎 한 번 탁 치고 빙긋이 혼자 웃었다 이제부턴 사람을 만나면 좀 무리를 해서라도 따끈한 국밥 한그릇씩 꼭 대접해야겠다고, 그리고 쓸쓸한 가운데 즐거움이 가느다란 연기처럼 솟아났..

시읽는기쁨 2020.06.17

별일 읍지 / 정수경

누구냐 니째여? 시째라고? 느덜은 목소리가 똑같어. 전화소리는 더 못 알아 보것어. 교회여. 목사님이 죽어도 교회 와서 죽으랴. 오는 길에 행사장 들러서 치료도 받았어. 당뇨에 좋다는디 댕긴지 얼마 안돼서 그란지, 당이 안 떨어져야. 자꾸 댕기믄 좋아 진당깨 빼먹지 말고 댕기야 긋어. 거기 가서 치료 받은깨 감기는 그만 한디, 인제 살만햐. 사람들이 가믄 기분 좋게 놀아줘. 젊은이들이 참 싹싹햐. 느들은 나 그렇게 기분 좋게 못해줘야. 미안 하니깨 치약 같은 거 하나씩 팔아줘. 어떤 이는 거그서 파는 약 먹고, 안마기 치료도 받고 했다는디 당이 그짓말처럼 떨어졌댜. 피도 맑아지고. 내가 무신 돈이 있간디. 비싼 약 같은 건 안 사니깨 걱정 말어. 야 근디 느 아들 잘 있다지야? 내가 새벽마둥 기도햐. 무..

시읽는기쁨 2020.06.11

프로레슬링은 쑈다 / 유하

박통 시절, 박통터지게 재미있었던 프로레슬링 김일의 미사일 박치기에 온국민이 들이받쳐서 박통터지게 티브이 앞에 몰려들던 프로레슬링 흡혈귀 브라쉬 인간산맥 압둘라 부처 전화번호부 찢기가 전매특허인 에이껭 하루까 필살의 십육문 킥 자이안트 바바 빽드롭의 명수 안토니오 이노끼 그 세계적인 레슬러들을 로프 반동 튕겨져 나오는 걸 박치기! 당수! 또는 코브라 트위스트, 혼줄을 내주던 김일 천규덕의 극동 태그매치 조 저녁 여덟시면 나를 어김없이 만화가게에 붙잡아 놓던 그 흥미진진한 프로레슬링이 어느 순간 시들해진 건 무슨 이유일까 왜 모두들 외면했던 것일까 프로레슬링 유혈 낭자극을 유난히 좋아했던 박통이 죽어서? 김일 같은 스타 레슬러가 안 나와서? 항간에 떠도는 루머 중 가장 유력한 설은 국내파 레슬러 장영철이 ..

시읽는기쁨 2020.06.04

벌과 하느님 / 가네코 미스즈

벌은 꽃 속에, 꽃은 정원 속에, 정원은 토담 속에, 토담은 마을 속에, 마을은 나라 속에, 나라는 세계 속에, 세계는 하느님 속에, 그래서, 그래서, 하느님은, 작은 벌 속에. - 벌과 하느님 / 가네코 미스즈 "일본 센자키에서 외동딸로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독서를 좋아하고 온순했다. 두 살 되던 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어머니가 재혼한 뒤 할머니 밑에서 성장했다. 고등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하고 집안일을 돕다가 어른들이 정한 남자와 결혼했으나 남편은 그녀가 글 쓰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방탕한 남편과의 불화와 병으로 괴로워하다 스물일곱이라는 젊은 나이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가네코 미스즈(1903~1930), 짧은 약력과 시 몇 편으로 그녀를 얼마나 알 수 있겠냐마는 왠지 그 이름만 들어도 슬퍼진다..

시읽는기쁨 2020.05.25

영국의 노동자들에게 / 셸리

영국의 노동자들아, 무엇 때문에 그대들을 업신여기는 지주들을 위해 밭을 가는가? 그대들의 폭군들이 입을 사치스런 옷을 무엇 때문에 힘들이고 근심하며 짜는가? 무엇 때문에 나서 죽을 때까지 먹이고, 입히고, 지켜 주는가? 그대들의 땀을 짜내려 드는 아니 그대들의 피를 마시려 드는 저 배은망덕한 게으름뱅이들을 영국의 부지런한 자들아, 무엇 때문에 많은 무기와 사슬과 채찍을 만드는가? 고통을 모르는 이 게으름뱅이들은 그것으로 그대들의 강요된 노동의 생산물을 약탈할 텐데 그대들은 여가, 안락함, 평온, 피난처, 음식, 부드러운 연인의 향기를 누리는가? 그렇지 않다면 그토록 값비싼 고통과 근심으로 그대들이 얻은 것은 무엇인가? 그대들이 뿌린 씨를 다른 사람이 거둔다네 그대들이 찾아낸 재산을 다른 사람이 가져간다네..

시읽는기쁨 2020.05.14

바느질 / 박경리

눈이 온전했던 시절에는 짜투리 시간 특히 잠 안 오는 밤이면 돋보기 쓰고 바느질을 했다 여행도 별로이고 노는 것에도 무취미 쇼핑도 재미없고 결국 시간 따라 쌓이는 것은 글줄이나 실린 책이다 벼개에 머리 얹고 곰곰이 생각하니 그것 다 바느질이 아니었던가 개미 쳇바퀴 돌 듯 한 땀 한 땀 기워 나간 흔적들이 글줄로 남은 게 아니었을까 - 바느질 / 박경리 바느질을 마지막으로 한 게 군대에서였던 것 같다. 그때는 군대 생활을 하자면 실과 바늘이 필수였다. 그전에는 외할머니와 함께 살면서 바늘귀에 실을 꿰 드리는 게 내 담당이었다. 지금은 아내한테서도 바느질하는 모습을 거의 보지 못한다. 꿰매야 할 정도로 해진 옷을 입지도 않거니와, 어지간하면 세탁소에 맡기기 때문이다. 어쩌다 돋보기를 쓰고 바느질하는 아내 모..

시읽는기쁨 2020.05.05

체제에 관하여 / 유하

횟집 수족관 속 우글거리는 산낙지 푸른 바다 누비던 완강한 접착력의 빨판도 유리벽의 두루뭉술함에 부딪혀 전투력을 잊은 채 퍼질러 앉은 지 오래 가쁜 호흡의 나날을 흐물흐물 살아가는 산낙지 주인은 부지런히 고무호스로 뽀글뽀글 하루분의 산소를 불어넣어 준다 산낙지를 찾는 손님들이 들이닥칠 때 여기 쌩쌩한 놈들이 있는뎁쇼 히히 제발 그때까지만 살아 있어 달라고 살아 있어 달라고 그러나, 헉헉대는 그대들의 숨통 속으로 단비처럼 달콤히 스며드는 저 산소 방울들은 진정 생명을 구원하는 손길인가 투명한 수족관을 바라보며 나는 투명하게 깨닫는다 산소라고 다 산소는 아니구나 저 수족관이라는 틀의 공간 속에서는 생명의 산소도 아우슈비츠의 독가스보다 더 잔인하고 음흉한 의미로 뽀글거리고 있는 것 아니냐 - 체제에 관하여 /..

시읽는기쁨 2020.04.24

위층 아래층 / 한현정

위층에 코끼리가 이사를 왔다 걸을 때마다 쿵쿵 천정이 울린다 아래층에는 토끼 아줌마가 산다 조그만 소리에도 놀라 깡충깡충 뛰어 올라온다 우리 집에는 고양이들이 산다 발소리가 날까 봐 살금살금 뒤꿈치를 들고 걷는다 - 위층 아래층 / 한현정 우리 아이들이 어렸을 때 가끔 아래층에서 항의를 받았다. "네, 조심하겠습니다"라고 했지만, 속으로는 "뭘, 그 정도를 가지고"라며 마땅찮아 했다. 이제 늙어서 둘만 남게 된 지금은 가끔 위층에 연락한다. "잠을 못 자요. 조용히 좀 해 주세요." 공손한 대답과 달리 위층의 속마음이 어떠하리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한다. 인간은 자기중심으로 세상을 본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기'가 어디 가당키나 한 일인가. 남에게는 역지사지를 요구하지만, 내가 역지사지하는 데는 인색..

시읽는기쁨 2020.04.17

안내 방송 / 주미경

아, 아, 오늘 늘푸른공원에 약을 친다고 합니다. 단풍나무 길 거위벌레 씨 아기 방 창문 꼭 닫아 주세요. 벚나무 길 자벌레 씨 아침 운동 참아 주시구요. 꽃등에 씨 라일락꽃은 비 온 뒤에 찾아 주세요. 아, 아, 돌배나무 길 비단벌레 씨 비단 마스크 하나 빌릴 수 있을까요. 참, 말매미 씨 바쁘시더라도 때맞춰 사이렌 부탁합니다. - 안내 방송 / 주미경 아파트 단지 안 수목에 약을 친다는 안내 방송이 가끔 나온다. 약이 들어갈 수 있으니 저층 세대는 창문을 닫아 달라고 당부하는 방송이다. 그런데 이 시를 보고 뜨끔했다. 인간의 입장에서만 볼 줄 알았지, 나무에 살고 있을 생명에는 관심이 없었다. 관점을 바꾸면 이렇게 신선한 시도 나온다. 코로나19로 많은 사람이 고통을 겪고 있지만 우리가 깨달아야 할 ..

시읽는기쁨 2020.04.06

어린 봄을 업다 / 박수현

몇십 년 만에 아이를 업었다 앞으로 안는 신식 띠에 익은 아이는 자꾸 허리께로 흘러내렸다 토닥토닥 엉덩짝을 두드리자 얼굴을 묻고 나비잠에 빠졌다 슬그머니 내 등을 내려와 제 길 간 어미처럼 아이도 날리는 벚꽃잎 밟으며 자박자박 걸음을 뗀다 어릴 적, 어른들 따라 밤마실 갔다 올 때면 넓은 등에 얼굴 묻는 것이 좋아 나는 마실이 파할 즈음 잠든 척하곤 했다 업혀서 돌아올 땐 부엉이 우는 밤길도 무섭지 않았다 가끔 백팩이나 메는 내 어두운 등짝으로 어린것의 온기가 전해진다 내가 걸어온 한 생이 고작 두어 뼘 등판 위에서 뒤집혔다는 생각 겁 많고 무른 가슴팍 대신 갖은 상처를 받아내느라 딱딱해진 등이 혹 슬픔의 정면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문득, 누가 이 말간 봄빛 한나절을 내 빈 등에 올려놓았는지 알 것도 같..

시읽는기쁨 2020.03.31

비밀번호 / 문현식

우리 집 비밀번호는 0000000 누르는 소리로 알아요 000 0000는 엄마 00 000 00는 아빠 0000 000는 누나 할머니는 0 0 0 0 0 0 0 제일 천천히 눌러도 제일 빨리 나를 부르던 이제 기억으로만 남은 소리 보 고 싶 은 할 머 니 - 비밀번호 / 문현식 착상이 빛나는 동시다. 도어락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의 리듬으로 엄마, 아빠, 누나, 할머니를 구별하는 예민함에 가족을 향한 사랑이 담겨 있다. 빨리 얼굴 보기를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라면 도어락 소리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으리라. 그중에서 백미는 할머니를 향한 그리움이다. 제일 천천히 눌러도 제일 빨리 나를 부르던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눈이 침침해서 숫자판의 번호가 잘 안 보였을 것이다. '보 고 싶 은 / 할 머 니'라고 생전에..

시읽는기쁨 2020.03.23

시를 쓰며 산다는 것은 / 조기영

시를 쓰던 어느 날 거짓말 한 번 있었습니다. 밥을 먹어야 하겠기에 돈을 벌러 나갔다가 주머니에 돈이 없어 같이 일했던 사람에게 급히 나오느라 지갑을 놓고 나왔으니 이천 원만 빌려 달라 했습니다. 그 돈 빌려 집에 오는 길에 발걸음이 무거웠습니다. 그날따라 비조차 내렸습니다. 우산 없이 집으로 오는 길은 이미 어두웠습니다. 많은 생각들이 머리 속을 스쳐갔습니다. 그러나 - 내 안에 주머니가 비어있다는 것은 슬픈 일이야. 하지만 마음이 비어 시를 쓸 수 없게 된다면 더욱 슬픈 일이 될 거야 - 이 말 한마디 하고 내게 웃었습니다. - 시를 쓰며 산다는 것은 / 조기영 조기영, 고민정 커플은 가난한 시인과 여자 아나운서의 결혼으로 화제가 되었다. 시인은 가난했고, 희귀병을 앓고 있었으며, 열한 살이나 연상이..

시읽는기쁨 2020.03.17

굴비 / 오탁번

수수밭 김매던 아낙이 솔개그늘에서 쉬고 있었다 마침 굴비장수가 지나갔다 - 굴비 사려, 굴비! 아주머니, 굴비 사요 - 사고 싶어도 돈이 없어요 메기수염을 한 굴비장수는 뙤약볕 들녘을 휘 돌아보았다 - 그거 한 번 하면 한 마리 주겠소! 가난한 계집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품 팔러 간 사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저녁밥상에 굴비 한 마리가 올랐다 - 웬 굴비여? 계집은 수수밭 고랑에서 굴비 잡은 이야기를 했다 사내는 굴비를 맛있게 먹고 나서 말했다 - 앞으로는 절대 하지 마! 수수밭 이랑에는 수수 이삭 패지도 않았지만 소쩍새가 목이 쉬는 새벽녁까지 사내와 계집은 풍년을 기원하며 수수떡방아를 찧었다 며칠 후 굴비장수가 마을에 나타났다 그날 저녁밥상에 굴비 한 마리가 또 올랐다 - 또 웬 굴비여? 계집이 굴비를 발..

시읽는기쁨 2020.03.11

벌써 삼월이고 / 정현종

벌써 삼월이고 벌써 삼월이고 벌써 구월이다. 슬퍼하지 말 것. 책 한 장이 넘어가고 술 한 잔이 넘어갔다. 목 메이지 말 것. 노래하고 노래할 것. - 벌써 삼월이고 / 정현종 우주 만물과 현상은 쉼 없이 움직이며 변한다. 영원하거나 고정불변한 것은 없다. 모든 것은 찰나적 현상일 뿐 언젠가는 사라진다. 코로나19로 세상이 뒤숭숭하지만, 이 또한 지나갈 것이다. 한 발자국 떨어져서 보면 좀 더 마음의 여유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나와 우리 공동체를 돌아보는 의미 있는 계기가 될 지 모른다. 다른 일도 마찬가지다. 슬픔과 근심, 치욕마저도, 너무 슬퍼하지 말고 목 메이지도 말자. 대신 노래하자. 벌써 삼월이다. 그리고 곧 구월이 될 것이다.

시읽는기쁨 2020.03.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