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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한 오후

한가한 오후 시간이다. 창 밖의하늘은 짙은 구름으로 덮여 있다. 금새라도 비가 내릴듯 하다. 하늘은 연한 잿빛 도화지같다. 긴 붓에 무지개빛 물감을 묻혀 멋진 그림을 그리고 싶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바라보고 즐거워 할 그런 그림이면 좋겠다. 텅 빈하늘을 바라보며 커피 한 잔을 타서 마신다. 찻잔의 온기가 따스하다. 달콤한 향이 오늘따라 특히 고맙다. 근 한 달 가까이 술과 커피를 멀리 했다. 속이 아파서 식사도조심하며 지냈다. 가끔씩 속이 그렇게 심술을 부린다. 오랜만에 맛보는 커피 향이 그래서 고맙고 향기롭다. 사실 산다는게 별 것아니지 싶다. 인간이 뭐 대단한 것 같아도 내적 만족이나 행복은 거창한 데서 오지 않는다. 아주 작고 사소한 것, 반짝이는 보석은 우리가 하찮게 여기는 곳에 숨어있는지 모..

길위의단상 2003.12.05

겨울 나무 아래서

겨울 나무 밑에 앉아 있다. 벌거벗은 나신(裸身)이지만 부끄러움은 없다. 편안하다. 고개를 드니 나무가지가 그리는 기하학적인 선의 그림이 아름답다. 세 나무가 공중에서는 서로 뒤엉켜 마치 한 몸인 듯 사이좋게 어울려 있다. 겉치레를 버린 겨울 나무는 솔직하고 단순하다. 무척 가벼울 것 같다. 그러나 속으로는 추운 계절을 견뎌내려는 스스로의 엄격함이 있을 것이다. 통하는 것이 남녀간에 정만은 아닐 것이다. 사람과 나무 사이에도 우리가 감지하지 못하는 통하는 기운이 있을 것 같다. 몇 년 전 이른 봄에 후배와 축령산으로 야생화를 보러 갔다. 그런데 이 친구는 돋보기와 청진기를 들고 왔다. 산에 가는데 왠 청진기인가. 정신없이꽃 사진을 찍다가 둘러보니 친구는 나무 하나를 꼭 껴안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어..

사진속일상 2003.12.04

창경궁 회화나무

창경궁에 있는 300여살이 되었다는 회화나무이다. 안내문에 보면 창경원 시절에 수많은 관람객들의 손에 가지가 꺾이고 시달려 수형이 이렇게 불균형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세월의 풍파를 견딘 나무의 품위는 더욱 당당해 보인다. 끈질긴 생명력과 바위와 같은 과묵함이 거목에서 느껴진다. 일본에는 나이가 5천년이 넘는 나무도 있다고 한다. 삼나무의 일종이라고 한 것 같다. 한 생명체가 우리 나라역사와 맞먹는 세월만큼 살아왔다니 절로 감탄이 난다. 그 나무 앞에서는 누구라도 경배를 하게 될 것 같다. 그 긴 침묵의 세월에 비하면 우리 인간은 얼마나 왜소한가. 자연을 이용 대상으로만 여기는오만한 짓거리는 이제 그만 뒀으면 좋겠다.

천년의나무 2003.12.03

작은 사내들 / 김광규

작아진다 자꾸만 작아진다 성장을 멈추기 전에 그들은 벌써 작아지기 시작했다 첫사랑을 알기 전에 이미 전쟁을 헤아리며 작아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나이를 먹을수록 자꾸만 작아진다 하품을 하다가 뚝 그치며 작아지고 끔찍한 악몽에 몸서리치며 작아지고 노크 소리가 날 때마다 깜짝 놀라 작아지고 푸른 신호등 앞에서도 주춤하다 작아진다 얼굴 가리고 신문을 보며 세상이 너무나 평온하여 작아진다 넥타이를 매고 보기 좋게 일렬로 서서 작아지고 모두가 장사를 해 돈벌 생각을 하며 작아지고 들리지 않는 명령에 귀 기울이며 작아지고 제복처럼 같은 말을 되풀이하며 작아지고 보이지 않는 적과 싸우며 작아지고 수많은 모임을 갖고 박수를 치며 작아지고 권력의 점심을 얻어먹고 이를 쑤시며 작아지고 배가 나와 열심히 골프를 치며 작아지고 ..

시읽는기쁨 2003.12.02

침묵의 달

12월의 첫 날이다. 아메리카 인디언은 이 달을 `침묵의 달`로 불렀다고 한다. 12월로 시작되는 겨울은 침묵의 계절이면서 휴식의 계절이다. 쉼없이 일하던 자연도 잠시 숨을 고르는 계절이다. 무수한 잎들을 대지에 돌려주고 나무는 고독한 철학자의 모습으로 이 겨울을 맞는다. 뭇 생명들도 분주하던 삶을 멈추고 안식의 보금자리로 돌아간다. 점점 차가와지는 날씨에 사람들도 몸을 움츠리며 따스한 방과 가정의 품으로 모여든다. 겨울은 바쁜 삶 속에 묻혀 보지 못하던, 듣지 못하던, 망각하고 있던 것들의 가치를 재발견하는 계절이다. 보잘 것 없어 보이는 것들이 오히려 소중하고 귀한 것임을 알게도 된다. 어둠과 침묵의 가치가 다시 되살아 난다. 그동안 우리는 너무 많은 소리와 너무 많은 이론들에 노출되어 있었음을 알게..

길위의단상 2003.12.01

김칫독을 묻으며

오늘 아침 고향 마을은 늦게까지 안개가 자욱했다. 고향집 뒤 야산의 나무들도 아침 안개에 오랫동안 젖어 있었다. 어제는 어머니, 동생네 식구들과 같이 겨울 김장을 담궜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터에 들러 집 뒤안에 김칫독을묻었다. .................... 눈 내리는 날, 집 뒤안으로 걸어가는 사람의 발걸음이 아름다운 그런 그리운 집이 될 수 있을려나..... ............................... 눈 오는 집 아침 눈이 하얗게 처마 끝을 지나 마당에 내리고 그 여자가 몸을 웅숭그리고 아직 쓸지 않은 마당을 지나 뒤안으로 김치를 내러 가다가 "하따, 눈이 참말로 이쁘게도 온다이이"하며 눈이 가득 내리는 하늘을 바라보다가 속눈썹에 걸린 눈을 털며 김칫독을 열 때 하얀 눈송이들이..

사진속일상 2003.11.30

불가근 불가원(不可近 不可遠)

4년 전 농촌 마을 한가운데에 터를 잡을 때 여러 사람들이 걱정했다. 도시 생활을 하다가 시골 마을 가운데에서 살기가 만만치 않을 것이라고 했다. 도시의 익명성이 보장되는 생활에 젖어 있다가 모든 것이 노출되는 시골 문화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염려를 했다. 가능하면 마을에서 좀 떨어진 곳, 덜 간섭받는 장소를 고르라고 충고했다. 도시 아파트 생활의 장점이자 단점이 고립성이다. 대개의 경우 한 가구 한 가구가 서로 고립된 섬이다. 옆 집에 신경 쓸 일도 없고, 옆 집으로부터 간섭받지도 않는다. 이것을 나만의 공간에 대한 안락함으로받아들일 수도 있고, 이웃과의 단절로 느낄 수도 있다. 당시에는사람들의 걱정을 무시해 버렸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면 된다고 그쪽 환경에 눈높이를 맞추고 산다면 문..

참살이의꿈 2003.11.29

어느 가을날, 산을 오르다가만난 나뭇잎은크고 작은 상처로 가득했다. 둘러보니 다른 잎들도 마찬가지였다. 숲은 아름답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상처없는 마음이란 없다. 그러나이런 불완전함과 아름다움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잎들이 모여 나무을 만들고, 나무들이 모여 숲을 이룬다. 온갖 생명체들이 숲 속에 깃들여 산다. 그러할 수 있음은 이런 상처가 생명을 기르기 때문이다. 자연의 조화와 아름다움은 여기에 있다. 우리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모든 인간은 불완전하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살아가는 험난한 과정에서 이런 저런 상처를 가지고 있다. 상처는 아프지만 두려워하고 기피해야 할 것만은 아니다. 그런 상처를 보듬어 안고 사랑하기는 어렵지만...... 우리를 결합시켜 조화있는 유기체가 되게 하는 것은 바로 우..

꽃들의향기 2003.11.28

철없는 개나리

한강변 둑방의 개나리가 꽃을 피우다. 지금이 어느 때인데..... 작년 이맘때 쯤에도 그러더니 올해도 마찬가지다. 이러다간 봄 소식만 아니라 겨울을 알리는 꽃으로도 변할지 모르겠다. 잎이 모두 떨어지고 앙상한 나뭇가지만 남았지만 그 속으로는 변함없이 생명의 기운이 흐르고 있을 것이다. 적절한 조건만 되면 숨어있던 생명은 화산처럼 분출한다. 저 작은 꽃에서 생명의 무한한 힘을 느끼게 된다.

사진속일상 2003.11.26

슬프게 하는 것들

일전에 테헤란로를 지나게 되었다. 서울에 살면서도 가보지 않은 거리가 많다. 테헤란로를 지상으로 지나가게 된 것도 처음이었다. 길 양편으로 솟은 빌딩들, 깔끔한 거리 모습이 선진국의 도시에 온 듯한 착각에 빠졌다. 이만큼 잘 살게 되었다는 뿌듯함도 있었지만 왠지 주눅도 들었다. 같은 차에 타고 있던 사람이 설명을 해 주었다. 저건 무슨 빌딩이고, 저게 그 유명한 ○○○이라고 했다. 이때 같이 있던 한 사람이 무심결에 "에라, 확 무너졌으면 좋겠다."라고 하는 것이었다. 다들 에이 하면서 핀잔을 주었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니 내 마음 속에도 그런 감정이 도사리고 있는 것 같아 무서웠다. 그만큼 빈부격차의 문제는 심각하다. 전체적 평균은 나아지고 있을지라도 이런 상대적 소외감이 우리 모두를 아프게 하고 있다. ..

길위의단상 2003.11.25

순수를 꿈꾸며 / 블레이크

한 알의 모래알 속에서 세계를 보고 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본다. 그대의 손바닥 안에 무한이 있고 한 순간 속에 영원이 있다. 새장에 갇힌 한 마리 로빈새는 천국을 온통 분노케 하며 주인집 문 앞에 굶주림으로 쓰러진 개는 한 나라의 멸망을 예고한다. 쫓기는 토끼의 울음 소리는 우리의 머리를 찢는다. 종달새가 날개에 상처를 입으면 아기 천사는 노래를 멈추고....... -- W. Blake / Auguries of Innocence 중에서 To see a World in a grain of sand, And a Heaven in a wild flower, Hold infinity in the palm of your hand, And Eternity in an hour. A robin redbreast i..

시읽는기쁨 2003.11.24

겨울의 시작

서울은 그래도 한강이 있어 아름답다. 한강변의 넓은 억새밭을 노랗게 물들이며 빌딩들 사이로 해가 진다. 가을도 저물었다. 어제부터는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며 겨울의 시작을 알린다. 지금 도시의 아파트 생활에서야 겨울 준비가 별 다른게 없지만, 옛날에는 김장을 하고 연탄을 들여 놓으며 겨울 준비에 부산했다. 그 당시 할머니, 동생과 셋이 살 때에도 배추를 50포기넘게 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좁은 부엌에 연탄을 가득 쌓고, 냉기를 막기 위해 방 창문 바깥에는 비닐을 붙였다. 벽으로는 왠 찬 바람이 그렇게 들어 왔는지 한창 추울 때는 이불로 벽에 커튼을 쳐야했다. 가끔씩 연탄 가스가 들어와서 어떤 날 아침은 정신이 몽롱해서 깨어났다. 그래도 밖에 나가 찬 공기를 쐬면 이내 정신이 들었다. 작은방 한 칸에 옹..

사진속일상 2003.11.23

절망하는 농심

나라 안팎이 어수선하다. 그저께는 농민들의 시위가 있었다. 급기야 도심에서의 폭력으로까지 이어졌다. 작년의 농민 집회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현장의 소리를 듣고 싶어서였다.그 때 접한 농민들의 목소리에는 분노와 한이 가득차 있었다. 대회가 끝나고 돌아가는 지하철 안에서 한 젊은 농민은 울고 있었다. 그러나 1년이 지나도 아무 것도 변한 것은 없다. TV로 보는 전경과의 충돌은 농민들의 속마음이나 울분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우리 사회가 가는 길이 어디인지 심각하게 자문해 볼 때가 아닌가 한다. 그것은 농민만이 아니라 모든 노동자들 그리고 이 사회의 약자들에 대한 문제이기도 하다. 그쪽의 공통된 정서는 박탈감이다. 빛 좋은 개살구식 경제 성장의 이면에서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희생을 강요하고 있다...

길위의단상 2003.11.21

새벽 전화벨 소리

새벽에 전화벨 소리가 잠을 깨운다. 방안은 온통 깜깜한데 가슴이 철렁한다. 수화기를 드니 고향에 계신 어머님이시다. 이젠 심장이 방망이질친다. ".....무슨 일이세요?" "응, 별 일 없나... 다음 주말에 전부 모여서 김장 하기로 했으니까 그 때 내려 온나..." 아이구..... 그렇다고 이 꼭두새벽에 전화를 하시다니..... 새벽 전화벨 소리는 너무 무섭다. 고향에는 96세 되신 외할머니가 계신다. 몇 년 전부터는 치매 증상이 나타나서 함께 계시는 어머니가 무척 고생하신다. 금방 한 말도 잊어버려서 외할머니 옆에 있으면 똑 같은 말을 수도 없이 반복해야 한다. 우습기도 하지만 짜증이 나기도 한다. 어떤 때는 이제 그만 돌아가셨으면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임종 소식이 올까 봐 늘 불안하다. 외할머..

길위의단상 2003.11.20

낙엽 / 구르몽

시몬, 나무 잎새 져버린 숲으로 가자. 낙엽은 이끼와 돌과 오솔길을 덮고 있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낙엽 빛깔은 정답고 모양은 쓸쓸하다. 낙엽은 떨어져 땅위에 흩어져 있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해질 무렵 낙엽 모양은 쓸쓸하다. 바람에 흩어지며 낙엽은 상냥히 외친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발로 밟으면 낙엽은 영혼처럼 운다. 낙엽은 날개 소리와 여자의 옷자락 소리를 낸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가까이 오라, 우리도 언젠가는 낙엽이 되리니 가까이 오라, 밤이 오고 바람이 분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 낙엽, 구르몽(R. Gurmon) 아침에 흐린 하늘이 낮이 되면서 개이더니 지금은 가을 햇살이 눈부시다. 이런 날은 하던 일..

시읽는기쁨 2003.11.19

노루귀

가을의 끝에서 봄의 시작을 본다. 3월..... 대기에 봄 기운이 스며들 때, 그러나 아직 산 속은 겨울이다. 그늘진 곳에는 잔설이 남아 있고 새 생명의 싹은 보이지 않는다. 이 때 얼어붙은 대지를 뚫고 봄 소식을 전하는 첫 생명들이 있다. 그 중의 하나가 노루귀로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야생화이다. 나의 봄은 이 노루귀와 만나는 것으로 시작된다. 주로 만나는 장소는 천마산과 소백산이다. 꽃의 크기라야 1-2cm 정도나 될까, 저렇게 여린 생명이 눈 속을 뚫고 올라오는 모습은 경이롭기만 하다. 꽃색은 흰색, 연보라색, 연분홍색 등이 있다. 색깔이 너무 곱다. 그리고 줄기에는 가는 솜털이 빽빽히 나 있는데 역광으로 보면 무척 아름답다. 이 가을의 끝에서 내년 봄을 그려보는 것이 행복하다. 사람만이 희망이라고..

꽃들의향기 2003.11.18

쓸쓸한 그곳

터에 다녀오다. 늦가을이어선지 더욱 쓸쓸했다. 월동 준비를 한답시고 펌프에도 헌 옷가지를 둘러씌우고 바깥 수도꼭지도 물을 뺀 다음 폐쇄시켰다. 그러나 찾아오는 사람도 찾아갈 사람도 없었다. 다만 담안 사람들과 잠시 웃음으로 인사를 나누었을 뿐이다. 도시의 소외가 싫었는데 지금까지는 시골 마을에서도 아직 이방인이다. 적응하기가 무척 힘이 든다. 지난 사건의 여파가 나에게는 아직 크다. 첫 눈에 정이 들기는 쉽다. 그러나 한 번 소원해진 뒤에 다시 정을 붙이기는 어렵다. 이건 사람이나 물건이나 땅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깊은 정이란 것은 이런 과정을 겪어야 하는 것인지 모른다. 상대의 결점이나 단점을 발견하고도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마음, 그러고도 느끼는 동질감이야말로 세월이 쌓인 깊은 정이라고..

참살이의꿈 2003.11.17

행복한 시간

자전거를 세워 놓고 강변에 앉아 석양을 본다. 퇴근할 때 자주 만나는 저녁 풍경이다. 하루 일을 마치고 가벼워진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가는 저녁 시간, 한낮의 분주함과 소란함이 서서히 잦아들고 모든 사물이 무채색 속으로 스며드는 안식과 평화의 시간, 비록 하찮은 하루였을지라도 상처 입고, 상처를 주며 아쉽기만 한 하루였을지라도 어쩐지 모든 걸 다 사랑하고 용서할 것 같은 넉넉한 마음이 되는시간, 하루 중 가장 행복한 시간.... 비록 도시의 한가운데지만 이런 저녁 무렵이 나는 가장 좋다.

사진속일상 2003.11.14

산이 아프면 우리도 아프다

새벽첫차를타고내려오신어머님께서 그만가자. 이젠그만가자 다그만두고 이제,그만가자하신다. 단식서른여덟날 천성산 고속철도 관통을 반대하는 지율 스님 단식이 오늘로 41일째입니다. 천성산은 경남 양산에 있는 산세는 크지 않으나 수려한 경관으로 경남의 소금강으로 불리는 산입니다. 원효대사와 의상대사의 설화도 있는 이 산에는 고산 습지와 함께 희귀식물과 동물들의 보고라고 합니다. 지금 정부는 이 산을 관통하는 고속철도를 고집하고 있습니다. 오직 개발과 편리와 경제성의 논리만이 이 시대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미미한 꽃과 동물일지라도 함께 공존하는 방향으로 정책이 변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미래는 없습니다. 산이 아프면 우리가 아프고, 우리의 다음 세대가 그 고통을 짊어집니다. 출세간의 자식을 찾아온 어머니의 모습..

길위의단상 2003.11.13

My heart leaps up / Wordsworth

하늘의 무지개 바라보면 내 가슴 뛰노라. 내 삶이 시작될 때 그러했고 어른이 된 지금도 그러하니 늙어서도 그러하리라. 아니라면 죽음만도 못하리!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 원컨대 내 생애의 하루하루가 자연에 대한 경애로 이어지기를. My heart leaps up when I behold A rainbow in the sky; So was it when my life began; So is it now I am a man; So be it when I shall grow old, Or let me die! The Child is Father of the Man; And I could wish my days to be Bound each to each by natural piety. -- My heart le..

시읽는기쁨 2003.11.11

전혜린의 가을

......... 긴 여행 - 돌아오지 않는 여행, 깨어남 없는 깊은 잠, 이러한 것들이 가을이면 매년 나의 고정 관념으로 되어 버린다. 여름의 모든 색채와 열기가 가고 난 뒤의 냉기와 검은 빛과 조락은 나에게는 너무나 죽음을 갈망하는 자태로 유혹을 보내 온다. 그래서 매년 가을이면 몇 주일이나 학교도 못 나오게 되고 앓아 눕게 된다. 의사는 신경의 병이라지만 나 자신은 내가 `존재에 앓고 있다`고 생각하고 싶을 만큼 절실하고 긴박하게 생과 사만을 집요하게 생각하고 불면 불식의 나날을 보내게 된다. 생과 사에 대한 생각이라기보다는 사에 대한 생각이 나를 사로잡아 버린다. 가을은 토카이의 시 속에서처럼 저녁 노을에 박쥐가 퍼덕거리는 숲을 지나서 오솔길을 한없이 걸어가다가 길목에 있는 선술집에 들어가 `어린..

읽고본느낌 2003.11.10

억새(2)

어느 해 가을, 억새를 보러 명성산에 갔다. 맑고 청명한 가을날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산에 오르는 동안 등산객을 한 명도 만나지 못했다. 억새 사진을찍기 시작했을 때였다. 갑자기 천둥 소리가 나면서 포탄이 머리 위를 날아가서 터지기 시작했다. 탱크 수 십대가 포격을 하기 시작하고 비행기까지 날아와 폭탄을 터뜨렸다. 군인들이 기동 훈련하는 한 복판에 들어가 있었던 것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온 산이 출입 통제되었는데 그것도 모르고 혼자 산에 올랐던 것이다. 전투기 소리, 폭탄 터지는 소리, 온 천지를 뒤흔드는 굉음에 혼비백산하여 도망쳐 내려왔다. 꼭 오발탄이라도 날아와 내 옆에서 터질 것 같았다. 전쟁이 나면 아마도 먼저 소리에 질려 버릴 것이다. 이 사진을 보면 황망히 도망치던 그때 생각이 난다.

꽃들의향기 2003.11.10

친구가 견진 받는 날

오늘은 친구가 견진을 받는 날이다. 이 친구와는 시골 중학교를 같이 다녔다. 그런데 서로 가까와진 건 서울에 있는 같은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부터었다. 당시 4명이 올라 왔는데 이 친구와는 1학년 때 같은 반에 배정되었다. 60년대 말, 모두가 어려운 때였다. 시골 학생들은 대부분 셋방을 얻어 자취 생활을 했다. 친구도 형들과 함께 산동네 좁은 방에서 어렵게 지냈다. 그래도 우리는 사정이 나은 편이었다. 한 친구는 도시락을 싸오지 못할 정도로 곤궁했다. 어떤 때는 셋방에서 쫒겨나독서실서 살기도 했다. 그런 힘든 환경에서도 모두들 공부는 열심히 했다. 그리고 웃음을 잃지도 않았다. 아마도 미래에 대한 꿈과 희망이 그 때에 가장 꽃 피지 않았는가 싶다. 친구는 법대에 진학했다. 그리고 사시에 도전했으나 계속 ..

길위의단상 2003.11.08

솔직한 급훈

어느 고등학교 1학년 교실에 걸려 있는 급훈이다. 이게 무슨 뜻일까? 처음에는 의아하게 생각했는데 설명을 듣고는 이해가 되었지만 그러나 뒷 맛이 씁쓸하다. 서울 지하철 2호선 주위에는 유명 대학들이 여럿 있다. 연대, 이화여대, 서강대, 홍익대, 서울대, 건국대, 한양대 등등..... 여기에 다니는 학생들은 주로 2호선을 타고 등하교를 한다. 결국 `2호선을 타자`란 말은 이런 유명 대학들에 진학하자는 뜻일게다 인문계 고등학교는 겉으로는 전인 교육을 표방하고 있지만 실은 입시 학원에 다름없다. 교육 과정이나 활동이 지적 분야의 경쟁에만 편중되어 있다. 그래도 예전에는 성실이라든가 노력, 착함 같은 인성적 측면을 강조했는데 이젠 노골적으로 입시 경쟁에 내몰고 있다. 그나마 솔직하다고 인정해주어야 할 것인지..

사진속일상 2003.11.07

너와집 한 채 / 김명인

길이 있다면, 어디 두천쯤에나 가서 강원남도 울진군 북면의 버려진 너와집이나 얻어 들겠네, 거기서 한 마장 다시 화전에 그슬린 말재를 넘어 눈 아래 골짜기에 들었다가 길을 잃겠네 저 비탈바다 온통 단풍 불 붙을 때 너와집 썩은 나무껍질에도 베어든 연기가 매워서 집이 없는 사람 거기서도 눈물 잣겠네 쪽문을 열면 더욱 쓸쓸해진 개옻 그늘과 문득 죽음과, 들플처럼 버팅길 남은 가을과 길이 있다면, 시간 비껴 길 찾아가는 사람들 아무도 기억 못하는 두천 그런 산길에 접어들어 함께 불 붙는 몸으로 저 골짜기 가득 구름 연기 첩첩 채워넣고서 사무친 세간의 슬픔, 저버리지 못한 세월마저 허물어버린 뒤 주저앉을 듯 겨우겨우 서 있는 저기 너와집, 토방 밖에는 황토흙빛 강아지 한 마리 키우겠네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

시읽는기쁨 2003.11.06

Learning to fall

가을은 떠나 가고, 떠나 보내는 계절인가 보다. 담안에 계시는 어느 분이 최근에 슬픈 일을 연달아 겪으셨다. 친한 친구가 갑자기 뇌졸증으로 쓰러져서 사망하고,경황이 없던 바로 그 날에 언니가 또 교통사고로 사망한 것이다. 바로 어제의 일이다. 그 분의 지금 심정이 어떠할지 어찌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그 분에게 지금 어떤 위로의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멀쩡하던 사람이 어느 순간에 우리 곁을 떠나간다. 아무 이별의 말도 없이, 무심히 떨어지는 저 낙엽처럼 그렇게 이 곳에서 사라져 간다. 그 분은 가장 사랑하는 두 사람을같은 날 동시에 잃었다. 그러나 세상은 변함없이 그대로이다. 밖에는 서글프도록 아름다운 가을의 풍경이 펼쳐져 있다. 살다 보면 내 것이라 여겼던 애지중지하던 그 무언가를 상실하는 경험을 ..

길위의단상 2003.11.04

본회퍼의 `옥중서간`을 읽고

이번 주말 집에서 쉬면서 본회퍼의 `옥중서간`을 다시 읽어보다. 그의 신학적 사상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다만 그의 삶이 나에게는 자극제가 되고 성찰이 된다. 그의 삶 자체가 무언의 메시지이다. 우리가, 특히 신앙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어떻게 고민하고 살아야 하는지를 묻고 있기 때문이다. 본회퍼는 독일의 촉망받던 신학자며 목사였다. 히틀러가 집권한 후 그는 고국으로 돌아와 반나찌 운동에 가담한다. 1943년 봄에그는 체포되고 히틀러 암살 계획에 연루되어 종전을 몇 달 앞두고 처형되었다. 많은 위대한 사람들이 그러하듯 그는 자신의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고 시대가 요구하는 소명에 몸을 던진 사람이었다. 그의 용기와 사랑,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신앙이 편지에 잘 나타나 있다. 종교의 ..

읽고본느낌 2003.1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