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 휴일에 하루 종일 비가 내린다. 셋이서 가까운 산길을 걷기로 했는데 비 때문에 취소되었다. 꽉 차게 되어 있는 하루가 갑자기 텅 비어 버렸다. 비 오는 날의 적적함은 견디기 힘들다. 안절부절 못하는 마음을 잠재우려 장석주 시인의 산문집을 꺼내본다. 마침 비에관한 글이 나온다. 봄비 봄비는 겨우내 딱딱하게 얼어붙은 땅을 두드리며 온다. 비들은 오, 저 ‘시체들의 창고’인 땅을 맹인의 지팡이로 두드리듯 두드린다. 그 소리를 들으며 얼어붙은 땅은 풀리고 땅 속에 숨은 씨앗들은 싹을 땅거죽 밖으로 밀어낸다. 봄비가 충분히 내리고 난 뒤에야 작약의 붉은 움이 돋고 모란의 묵은 가지들에도 꽃눈이 돋는다. 들창 너머로 혼자 내다보는 봄비는 쓸쓸하다. 곡식이 있으면 밥을 끓이고 곡식이 끊기면 굶는다. 하루도 거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