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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과거

오랜만에 나온 은희경 작가의 장편소설이다. 작가는 자전소설에 장기가 있어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과거를 재현한다. 이 소설은 1977년에 대학에 입학하여 시작한 기숙사 생활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나도 같은 70년대에 대학을 다녔으므로 비슷한 시대 환경을 경험했다. 그래서 더욱 공감할 수 있었고, 그 시절로 시간 여행을 할 수 있어 좋았다. 은희경 작가의 문장은 입에 착착 달라붙는 듯 감칠맛이 난다. 감성적인 여성 작가의 특징을 여실히 보여준다. 한 권의 책을 단 한 차례도 지루하지 않게 읽기가 드문 데 작가의 글은 그렇지 않다. 빨리 끝날까 봐 두려울 정도로 이야기에 빠져드는 마력이 있다. 그중에서 작가가 사랑에 빠졌을 때를 묘사한 아름다운 부분은 이렇다. 1977년의 6월과 7월은 일생에서 내가 가장..

읽고본느낌 2020.11.30

다읽(8) - 정의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다

세상에는 다양한 삶이 있지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가치 추구를 지향하는 삶과 그것에 무관심한 삶이다. 가치 추구를 지향하는 사람은 단순히 살아가는 데 목적이 있지 않다. 좀 더 의미 있은 삶을 위해서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화두를 품고 살아간다. 반대로 가치 추구에 무관심한 사람은 대개 현실주의자다. 지상에서 얼마나 누리고 즐기느냐가 목적이다. 세속적 가치관이 그들을 지배한다. 이 책 를 쓴 리 호이나키(Lee Hoinacki) 선생도 전자의 길을 가는 분 중 하나다. 제목에서 '비틀거리며'라는 말이 와닿는다. 이 길을 가는 사람은 질문과 고뇌, 방황을 필수적으로 경험해야 하기 때문이다. 세상에 대해 "No!"라고 말할 용기도 필요하다. 당연히 세상은 그를 곱게 봐주지 않는다. 선생은 대학교..

읽고본느낌 2020.11.22

소르본 철학 수업

작가는 고등학교 졸업식장에서 "명품 인간이 돼라"는 교장 선생님의 말씀을 낯설게 느낀다. '인간'과 '명품'이 서로 등치 될 수 있는 것일까? 한때는 정부에서 교육인적자원부라는 명칭을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사용하기도 했다. 세상의 당연함에 회의를 품었던 소녀는 프랑스 파리로 철학 공부를 하러 떠난다. 이 책 은 자의식에 눈 뜨면서 세상의 관념에 맞서 싸우며 나아가는 한 인간의 성장기라고 할 수 있다. 전진 작가는 2015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파리로 날아갔다. 2년의 어학 코스를 밟은 뒤, 2017년에 파리 제1대학 철학과에 입학하고 3년 만에 졸업했다. 지금은 같은 대학원 철학과 미술사학부에서 미학을 공부하고 있다. 요즈음 공부 잘하는 똑똑한(?) 아이들은 대개 의대나 법대를 간다. 우리 때만 해도 ..

읽고본느낌 2020.11.14

다읽(7) - 거꾸로 사는 재미

1983년에 펴낸 이오덕 선생의 수필집이다. 주로 70년대에 선생이 쓴 글이 주제별로 모여 있다. 1부는 자연, 2부는 삶에 대한 성찰, 3부는 시론(時論), 4부는 교육 수상이다. 선생의 글은 가식이 없고 진솔해서 좋다. 기교를 부리거나 장식 많은 글이 아니다. 선생의 고결한 성품이 배어 있다. 담박한 글맛을 느끼기에 아주 좋다. 겉 포장에 능숙한 시대에 선생의 글을 읽으면 더운 여름에 시원한 바람을 쐬는 것 같다. 내가 다시 꺼내서 읽어본 는 2006년에 산처럼 출판사에서 펴낸 것이다. '거꾸로 사는 재미'라는 제목이 언제나 마음을 끈다. 세상의 흐름과 다르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은 내 흥미를 자극하기 때문이다. 거꾸로 살아가면서 재미까지 더해진다면 이미 보통 경지에 오른 분이 아닐 것이다. 이오덕 ..

읽고본느낌 2020.11.09

우리의 불행은 당연하지 않습니다

세계 무대에서 우리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는 거울 같은 책이다. 우리나라는 작년에 세계에서 가장 크고 부유한 나라만 들어갈 수 있다는 '30-50 클럽'(1인당 국민소득 3만 불 이상, 인구 5천만 명 이상인 나라)에 들어간 일곱 번째 나라가 되었다. 미국, 일본,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그리고 한국이다. 대한민국은 경제적 성취와 정치적 민주화에서는 세계에서 독보적인 나라다. 반면에 '헬조선'이라는 말처럼 불명예의 기록도 다수 가지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자살률이 높고, 노동시간이 가장 길고, 불평등이 가장 심하고, 아이들이 가장 우울하고, 아이들을 가장 적게 낳고, 제일 서로를 불신하는 나라다. 이 정도면 지옥이라 할 만하다. 어느 외국 학자는 한국 사회의 특징을 '끝없는 경쟁, 극단적 개인..

읽고본느낌 2020.11.03

라틴어 수업

한동일 선생이 서강대에서 강의했던 라틴어 수업 내용을 정리한 책이다. 선생에 대해서는 어느 TV 프로그램에서 입지전적 인물로 소개하는 걸 본 적이 있다. 선생은 2003년에 이태리 라테라노 대학교에서 교회법학 석사 과정을 최우등으로 수료했고, 다음 해 박사 학위를 받았다. 또한 동아시아 최초로 바티칸 대법원인 로타 로마나의 변호사가 되었다. 로마 로타나의 변호사가 되기 위해서는 교회법과 함께 라틴어와 기타 유럽어를 잘 구사해야 한다. 모든 과정을 마쳐도 변호사 자격시험 합격 비율은 5% 정도라고 한다. 은 간단한 라틴어 설명과 함께 라틴어를 사용한 옛 로마제국의 풍습이나 일상을 흥미롭게 소개해 준다. 겸하여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함께 생각하도록 유도한다. 이런 내용의 강의라면 아..

읽고본느낌 2020.10.29

다읽(6) - 백범일지

'다시 읽기' 여섯 번째는 다. 20년 전쯤에 이 책을 처음 읽고 백범 선생의 인물됨에 크게 감명받았다. 독립운동을 한 정치가 정도로 알고 있었는데, 선생의 나라 사랑과 조국에 헌신한 삶을 접하고 경탄과 함께 가슴이 뛰었다. 다시 읽어봐도 마찬가지다. 선생은 영웅호걸의 면모를 갖춘 분이다. 역사에서 가정은 별 의미가 없지만, 만약 선생이 우리나라 초대 대통령이 되어 나라를 이끌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지도자로 누굴 만나느냐에 따라 국가의 흥망성쇠가 좌우되는 경우가 많다. 그런 점에서 선생이 반대파에 의해 암살당한 것은 대한민국의 초석을 다지는 절호의 기회를 놓친 것이나 다름이 없다. 그때 잘못 끼운 단추로 인해 아직도 '역사 바로 세우기'라는 말이 나오고 있다. 에는 구한말과 일제 강점기 시대에 조국을 ..

읽고본느낌 2020.10.24

나는 예수입니다

도올 김용옥 선생의 예수전이다. 도올 선생은 마가복음에 기반한 있는 그대로의 예수 알기 작업을 꾸준히 하고 있다. 네 복음서 중에서 그나마 마가복음이 예수의 원형을 제일 잘 간직하고 있다. 마가복음이 가장 먼저 성립한 복음서이면서 다른 복음서의 원형이기 때문이다. 마가복음을 마가복음으로, 있는 그대로 읽자는 것이 도올 선생의 주장이다. 교회에 다닐 때 마가복음에 대해서는 그다지 주목하지 않았다. 다른 복음서의 축쇄본 같은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가복음이야말로 오리지널한 예수의 모습이 담긴 복음서라는 사실을 이번에 새롭게 발견했다. 선생은 이전에 를 펴냈다. 와 상통하면서 서로 보완하는 내용으로 알고 있다. 이 책도 곧 사서 읽어볼 예정이다. 도올의 예수는 갈릴리 지평에서 민중에게 하나님 나라를..

읽고본느낌 2020.10.13

삶은 왜 짐이 되었는가

박찬국 교수가 쉽게 풀이한 하이데거 철학의 해설서다. 하이데거 하면 실존철학자로만 알고 있지 그분의 사상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었는데, 이 책을 통해 어느 정도 감을 잡을 수 있게 되었다. 서양의 소로우나 동양의 선불교, 노장사상과 상통하는 부분이 많다는 것이 친근하게 다가왔다. 는 전체가 10개의 장으로 되어 있다. 각 장과 그 장의 내용을 요약한 문장을 보면 하이데거 철학의 대체적인 의미를 짐작할 수 있다. 장 하나하나가 모두 묵직한 주제들이다. 1장, 고향 상실의 시대 진공청소기가 먼지를 빨아들이듯, 대도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사람들을 빨아들이고 있다. 이곳에서는 시기와 질시 그리고 경쟁이 은밀하게 혹은 공공연하게 사람들을 지배한다. 우리는 과거에 비해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울지 몰라도 마음은 한없..

읽고본느낌 2020.10.03

다읽(5) - 조화로운 삶

내 밤골 생활의 모델이 되었던 책이다. 헬렌 니어링과 스코트 니어링 부부는 1932년에 뉴욕을 떠나 버몬트 산골에서 20년 동안 현대 문명을 벗어난 대안적 삶을 살았다. 이 책 은 그들의 꿈과 이상을 실천해 나간 삶에 대한 성실한 기록이다. 단순함, 고요한 생활, 가치 있는 일, 조화로움이 그들이 추구한 삶의 기본 가치였다. 화폐에 의존하지 않는 자급자족의 삶을 도시에서 이룰 수 없다는 것은 자명했고, 해답은 자연 속에서 찾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버려진 농장에서 새로운 삶을 실험했고, 생각과 생활이 일치하는 조화로운 삶을 살았다. 두 사람은 조화로운 삶을 살기 위한 원칙을 세운다. - 먹고 사는 데 필요한 것들은 적어도 절반 넘게 자급자족한다. - 스스로 땀 흘려 집을 짓고, 땅을 일구어 양식을 장만..

읽고본느낌 2020.09.20

이집트 사자의 서

고대 이집트는 신의 나라라고 불릴 정도로 수천의 신이 있었다. 그중에서 태양신 '라'가 제일 유명하고, 다음으로는 사후세계를 관장하는 '오시리스'다. 이집트인들은 육신의 부활을 믿었기에 미라를 만들고 오시리스를 경배했다. 오시리스 신화는 드라마틱하기에 잠깐 소개하면, 오시리스에게는 동생인 세트(악의 신)가 있고 부인은 이시스다. 세트의 부인은 네프티스인데 이시스와 네프티스는 자매 사이다. 세트는 이시스를 좋아하고, 네프티스는 오시리스를 좋아한다. 여기서 갈등과 투쟁이 벌어진다. 결국 세트는 오시리스를 죽이고 시신을 나일강에 버린다. 이시스는 우여곡절 끝에 시신을 찾아내 부활시키고, 오시리스는 지하를 다스리는 신이 되었다. BC 20세기부터 시작된 오시리스 축제는 이런 과정을 재현한다. 주목해야 할 것은 ..

읽고본느낌 2020.09.12

다읽(4) - 유쾌한 행복론

사는 일이 납덩이를 안고 있는 듯 무거울 때 꺼내 보는 책이다. 아무 데나 펼쳐 읽어도 답답한 가슴이 풀어진다. 인생이란 무거운 것도 가벼운 것도 아니다. 살아가는 사람이 만들어낸 관념이며 망상일 뿐이다. 누가 납덩이를 들고 있으라 한 적이 없다. 한두 꼭지만 읽어도 글쓴이의 생활 속 유쾌한 인생 철학이 나에게로 번져온다. 전체 제목은 이다. 글쓴이는 생활 속의 철학자요, 세계 동포주의자를 자처하는 전시륜(1932~1998) 선생이다. 서울공대 재학 6.25로 학업을 중단하고 도미해서 철학과 물리학을 전공했다. 이후 미국에서 직장 생활과 글쓰기를 하며 살았던 분이다. 선생이 모국어로 쓴 유일한 책이 이 이다. "사람은 왜 사냐? 살라고 태어났기 때문에 산다. 어떻게 살면 좋을까? 행복하게 살면 된다." ..

읽고본느낌 2020.09.07

팩트풀니스

'팩트풀니스(Factfulness)'는 글쓴이가 만든 말로 '사실충실성'쯤으로 번역이 되겠다. 우리는 '사실'이 아니라 '느낌'과 '선입견'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세계를 왜곡하며 오해하고 있다. 그런 무지의 증거로 책 첫머리에 세계의 현실에 대한 13개의 삼지선다형 질문이 나온다. 나는 고작 4개밖에 못 맞추었는데,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통계학자인 한스 로슬링이 쓴 는 사실(Fact)에 근거한 세계관을 갖도록 다방면의 데이터를 사용해 우리의 오해를 풀어준다. 우리는 많이 아는 것 같지만 제대로 된 지식은 갖고 있지 않다. 사람들은 대체로 세상을 비관적으로 본다. 제일 큰 이유는 언론의 영향 탓이 아닌가 싶다. 폭력, 살인, 전쟁, 테러 등 자극적인 내용이 주된 뉴스거리가 되기 때문이다. 좋은..

읽고본느낌 2020.09.02

다읽(3) - 티벳 사자의 서

책 표지를 넘기니 내지에 이런 글을 적어 놓은 게 눈에 들어온다. 모든 것은 마음이 바라는 대로 이루어지나니.... 1996년 2월, 삶과 죽음의 신비! 1999년 12월, 지금 여기 나에게 주는 메시지 2002년 10월, 진리를 향한 길 읽었을 때마다 짧은 감상을 적은 것이다. 책에는 거의 메모를 남기지 않는데 는 예외였던 것 같다. 그만큼 나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처음 이 책을 만났을 때의 감동이 잊히지 않는다. 뭔가 새로운 개안을 한 느낌이랄까, 삶과 죽음을 바라보는 관점을 완전히 바꾼 책이다. 역설적으로 를 만남으로써 가톨릭 신앙이 오히려 더 깊어졌다. 의 원제목은 '바르도 퇴돌'로 '듣는 것만으로 영원한 자유에 이르기'라는 뜻이다. 인간의 죽음과 사후세계, 그리고 환생을 다루고 있다..

읽고본느낌 2020.08.27

다읽(2) - 생활의 발견

젊은 시절에 책을 읽고 생각을 나누던 친구가 있었다. 인생의 의미를 찾아 애쓰던 시기라 주로 철학책이 많았다. 둘은 많은 부분에서 생각을 공유했지만 조금 결이 다르기도 했다. 누가 추천했는지는 모르지만 그 친구와 함께 읽으며 토론했던 책 중 하나가 이 이다. 중국의 임어당(林語堂)이 썼는데 동양인의 정서에 잘 맞았다. 특히 친구는 임어당이 강조하는 동양의 멋과 여유에 홀딱 빠졌다. 반면에 나는 임어당의 노회하고 현실주의적 사고에 거리감이 있었다. 돌아보면 그때의 생각 차이가 지금 우리 둘의 생활 방식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 같다. 임어당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를 즐거움의 추구에 둔다. 인생에서 관념적인 목적이나 목표를 구하는 것은 헛되며 자신을 괴롭힐 뿐이다. 그분의 명쾌한 말이 있다. "만일 인생에..

읽고본느낌 2020.08.15

다읽(1) - 선의 황금시대

책장에서 잠자고 있는 옛 책을 다시 읽기로 한다. '다읽'은 '다시 읽기'의 줄임말이다. 코로나가 가르쳐 준 것 중 하나가 가까이 있는 것의 소중함이다. 방안을 가득 채우던 많은 책을 버렸을 때, 차마 떠나보내기 아까운 일부 책은 남겨 두었다. 언젠가는 다시 한번 읽어야지, 했는데 그때가 지금인 것 같다. '다읽'의 첫 번째 책은 중국의 오경웅(吳經熊) 선생이 쓴 다. 선(禪)에 관한 안내서로 이만한 책이 없다고 생각한다. 딱딱한 이론서가 아니라 선승의 생애와 일화 중심으로 쉽고 재미있게 선의 핵심을 풀이했다. 지은이인 오경웅 선생은 가톨릭 신자인 것이 특이하다. 1899년 중국에서 태어나 법학을 공부하고 바티칸 교황청 공사로도 근무했다. 특정 종교에 얽매이지 않고 폭넓게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이런 책..

읽고본느낌 2020.08.04

신의 진화

종교와 신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발전해 왔는지 진화론적 관점에서 설명한 책이다. 생물체가 자연환경에 적응하며 진화하듯이, 신 개념도 사회 환경과 상호작용하면서 진화한다. 신은 고정된 객관적 실체가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낸 변화하는 개념임을 아브라함 종교(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를 중심으로 보여준다. 이 책 는 미국의 저술가인 로버트 라이트가 썼다. 진화론의 관점에서 인간과 사회의 문제를 바라보는 과학자답게 종교 역시 그런 틀로 설명하고 있다. 상당히 방대한 내용이면서 종교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넓혀주는데 유용한 책이다. 이 책을 읽는다면 미신적인 신앙에 빠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아마 원시인들은 두려움에서 신을 찾았을 것이다. 애니미즘과 샤머니즘을 거쳐 고대 국가가 들어서면서 종교도 형식을 갖추기 시작했..

읽고본느낌 2020.07.25

사소한 부탁

책을 덮고 제목을 지긋이 바라본다. 그리고, '사소한 부탁', 여기에 담겨 있을 여러 의미를 생각한다. 그중에서도 나는 겸손의 마음을 읽는다. 내가 사유하고 주장하며, 글에 담은 내용이 '사소'하다는 걸 자각하는 건 얼마나 중요한가. 세상을 향한 의견 제시 또한 정중한 '부탁'이어야 한다. 요사이처럼 제 또는 진영의 목소리만 크게 난무하는 세태에서 더욱 필요한 태도가 아닐까. 황현산 선생의 은 선생이 쓴 칼럼을 모은 책이다. 2013년부터 2017년까지 발표한 글이 실려 있다. 말을 잘 하는 사람은 말을 잘 듣는 사람이다. 자기주장이 강하지 않다. 선생의 글에서는 지성인의 향기가 난다. 글이 깊이가 있으면서 담박하고 간결하다. 선생의 인품이 어떠할지 글로써 충분히 가늠할 수 있다. 영화 '다가오는 것들'..

읽고본느낌 2020.07.20

바이러스의 습격

세계보건기구에서는 향후 미래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3대 요소로 식량 부족, 기후 변화, 전염병 유행을 지목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전염병 유행은 하찮게 생각했다. 의학이 발달하면서 세균이나 바이러스 정도는 충분히 방비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 코로나19에 의한 팬데믹 사태로 생각이 바뀌었다. 만약 전염력이나 치명률이 높은 변종이 나타나면 문명만 아니라 인류 생존마저 위협 받을 수 있다. 인류가 바이러스에 대처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코로나19가 보여주고 있다. 은 바이러스 전문가인 최강석 선생이 쓴 바이러스에 대한 안내서다. 중고등학생이면 넉넉히 이해할 정도로 쉽게 쓴 책이다. 책에서는 1918년 스페인 독감부터 2002년의 사스, 2009년의 신종플루에 이르기까지 20세기와 21세..

읽고본느낌 2020.07.05

시옷의 세계

김소연 작가 하면 이 먼저 떠오른다. 그 책에 대한 인상이 워낙 강하게 남아있어서다. 마음을 지긋이 또는 예리하게 바라보는 작가의 감성에 빨려 들어갔던 기억이 난다. 작가는 과연 어떤 분일까, 궁금했는데 이 책이 조금은 해결해줬다. 는 시옷으로 시작하는 낱말을 주제로 하여 작가의 속내를 드러낸 책이다. 사라짐, 사소한 신비, 산책, 살아온 날들, 상상력, 새기다, 새하얀 사람 등 서른네 항목으로 되어 있다. 글 속에는 작가의 삶과 생각이 직접적으로 드러나 있다. 부제가 '조금 다른 시선, 조금 다른 생활'이다. 선택적 가난과 고결한 정신의 아름다움을 작가는 삶으로 보여주는 것 같다. 세상을 따라가느라 우리가 내팽개친 잊혀진 가치들을 다시 소환한다. 우리가 누리는 윤택함이 얼마나 많은 이에게 빚지고 있는지..

읽고본느낌 2020.06.27

히말라야 환상방황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트레킹에는 두 코스가 있다. 하나는, ABC라 불리는 베이스캠프 트레킹으로 안나푸르나 주봉 아래 베이스캠프(4,130m)까지 갔다 돌아오는 코스다. 히말라야 트레킹을 하는 사람들이 제일 많이 찾을 만큼 무난하다. 둘은, 안나푸르나 산군을 한 바퀴 도는 라운딩 코스로 난이도가 높다. 5,416m인 쏘롱라패스를 지나는 111km 길이다. 이 책 은 정유정 작가가 안나푸르나 라운딩 코스를 다녀온 기록이다. 2013년 9월 5일에 베시사하르를 출발하여 9월 21일에 나야폴에 도착했다. 총 17일이 걸렸다. 작가는 생애 최초의 해외여행을 안나푸르나 트레킹으로 잡았다. 답답한 일상의 탈출구로 히말라야를 선택했다. 동행은 후배 작가였다. 가이드와 포터, 그리고 여자 둘이 한 팀이 되어 히말라야를 ..

읽고본느낌 2020.06.21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

현장 실습생으로 CJ에서 일하던 특성화고등학교 김동준 학생은 회식 자리에서 선임자한테 뺨을 맞았고, 며칠 후 회사 기숙사 4층에서 뛰어내려 자살했다. 직접적인 계기는 폭행이었지만 그 전에 과도한 업무와 강압적인 회사 분위기가 있었다. 2014년 봄에 일어난 일이었다. 컴퓨터 프로그래머가 되기 위해 동아마이스터고등학교에 들어간 김 군은 현장 실습을 나가서는 전혀 엉뚱한 일을 배정받았다. 햄과 소시지를 만드는 진천 육가공공장에 배치된 것이다. 학교에만 있다가 갑자기 현장에 나가서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으리라. 모든 실업계고등학생이 겪는 문제지만 사회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래서 젊은이를 '죽음으로 내모는 사회'라는 말이 나온다. 은 은유 작가가 김 군의 주변 사람을 인터뷰한 르포르타주다. 김 군 가족..

읽고본느낌 2020.06.14

문장의 온도

이덕무(李德懋, 1741~1793) 선생은 별명이 간서치(看書痴)였다. '책만 보는 바보'라는 뜻이다. 가난한 서얼 출신으로 정규교육을 받지 못하고 자신의 힘으로 학문을 갈고닦았다. 북학파 실학자로 18세기 후반 조선에서 활약한 최고의 독서가며 문장가였다. 그는 성리학적 글쓰기를 지양하고 소소한 일상과 주변에서 관찰되는 사물에 집중한다. 하찮고 보잘것없는 것을 안에 숨은 아름다움을 서정적인 문장으로 그려낸다. 책을 좋아했지만 글자에만 매몰되지 않고 일상의 살아있는 현상들에서 세상의 원리를 발견한다. 는 이덕무의 와 에서 뽑은 글을 모은 책이다. 한정주 선생이 엮고 옮겼다. 두 책 모두 이덕무가 20대 때 쓴 글로 그만의 특유한 감성과 사유가 묻어 있다. 조선 시대 때 어떻게 이런 글을 쓸 수 있었는지 신..

읽고본느낌 2020.06.06

연필로 쓰기

최근 지인으로부터 일산 호수공원에서 김훈 작가를 봤다는 얘기를 들었다. 작가는 20년째 일산에서 살고 있다. 그리고 호수공원이 즐겨 찾는 산책 코스다. 의 전반부는 호수공원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물이 소재로 등장한다. 일산 호수공원에 나가면 벤치에 앉아 있는 작가를 쉽게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이 책의 제목처럼 김훈 작가는 글을 쓸 때 연필을 고집한다. 컴퓨터의 편리함을 알겠지만 연필이 주는 아날로그의 감성을 버리기 싫은가 보다. 글 쓰는 행위나 문체에서 작가 특유의 고집이 읽히기 때문에 작가를 좋아한다. 건조한 듯 담백한 듯하면서 의미의 정수를 캐내는 작가의 문체도 좋다. 는 작년에 나온 작가의 산문집이다. 공원 벤치에 앉아 세상을 관조하는 듯하지만 치열한 삶의 현장을 외면하지 않는다. 특히 신문에 발..

읽고본느낌 2020.05.28

7년의 밤

정유정 작가의 스릴러 소설이다. 여성작가라는 선입견을 씻어줄 정도로 스케일이 크고 선이 굵다. 그러면서 상황이나 인간 내면의 심리 묘사는 아기자기하며 세밀하다. 불의의 사고로 낭떠러지로 내몰린 뒤 아들을 지키려는 남자(최현수)와, 딸의 복수를 위해 치밀하게 준비하는 다른 남자(오영제)의 대결 이야기가 숨 막히게 전개된다. 그 과정에서 인간의 광기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인간 본성의 어두운 면을 부각하는데 범죄와 폭력 스토리는 빠질 수 없다. 작가가 이런 소설을 쓰는 이유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에 등장하는 캐릭터는 모두 개성이 뚜렷하다. 그중에서 제일 주목된 인물은 오영제다. 내가 아는 싸이코패스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싸이코패스는 자기 것에 대한 병적인 집착이 특징이다. 자기 물건을 부순 고양이를 ..

읽고본느낌 2020.05.24

경성에서 보낸 하루

청소년과 함께 떠나는 경성 여행기다. 때는 일제 강점기인 1934년의 어느 봄날이다. 친일파 두취(頭取, 은행장)의 아들이 유학 중인 동경에서 귀국하여 하루 동안 경성을 둘러보는 내용이다. 사실적인 묘사가 실제로 당시 경성 시내를 거니는 듯하다. 1934년은 일제의 식민 통치 체제가 더욱 단단해지고 해방의 가능성이 거의 사라져 버린 시대였다. 1937년 중일전쟁을 앞두고 전시 체제로 돌입하기 직전의 비교적 안정된 시대였으며, 식민지의 그림자를 덮어버릴 정도로 경성은 화려하고 평화로운 일상이 이어졌다. 그때 경성은 인구가 40만 정도 되었는데 일본인은 12만 정도였다. 경성은 북촌과 남촌으로 나누어져 있었고, 일본인은 주로 남촌에 거주했다. 백화점을 비롯한 상업 시설이나 유흥업소도 남촌에 주로 형성되었다...

읽고본느낌 2020.05.18

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

코로나19로 인해 자본주의 체제의 한계를 사람들이 인식하게 된 것 같다. 이런 방식으로 계속 살아도 되는지에 대한 의문을 품게 된 것이다. 무한 생산과 무한 소비의 시스템은 지구를 병들게 하고 인류를 파멸시킬지 모른다. 코로나19를 자연계가 인간에게 주는 경고로 받아들여 본다. 는 리오 휴버먼(Leo Hubeman)이 쓴 책으로 1930년대에 나왔다. 90여 년 전에 쓰였지만 지금도 많이 읽히는 책이라고 추천받았다. 이 책은 나 같이 이과를 전공을 사람도 읽기 쉬우면서 자본주의가 등장하고 발전해 간 과정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놓았다. 중세 시대부터 20세기 초까지 경제적 관점에서 인류 역사를 서술한 책이다.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1부는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이고, 2부는 '자본주의에서 ..

읽고본느낌 2020.05.12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진작 이름은 알고 있었으나 이제야 읽어본다. 가벼운 단편인 줄 알았는데 예상외로 긴 장편소설이다. 분량이 5백 페이지가 넘는다. 나쓰메 소세키가 일본의 국민작가이고, 그의 대표작이 이 소설이라고 해서 기대가 있었는데 책을 읽고 난 느낌은 좀 실망이다. 장편으로 담기에는 지리해질 위험이 있는 이야기다. 라는 제목 그대로 고양이의 시선으로 인간 세상을 바라본 2년의 기록이다. 여기 등장하는 고양이는 사람의 말만 못 할 뿐 지력은 인간 이상이다. 주인공인 구샤미와 친구들이 고양이의 관심 대상이다. 고양이를 통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작가의 의도는 충분히 알 것 같다. 세상을 바라보는 작가의 생각이 고양이를 통해 드러난다. 이 소설이 발표된 1905년은 일본이 근대화를 이루기 위해 전력을 다하던 때였다. 그만큼 ..

읽고본느낌 2020.05.02

상처받지 않을 권리

"정신분석학자 라캉은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지금 당신이 욕망하는 것이 진정으로 당신이 욕망하는 것인가?" 그는 우리 욕망의 대부분이 자신의 욕망이라기보다 타자의 욕망이라고 냉정하게 진단했던 것입니다. 아마도 지금 시대에 자본만큼 강하게 우리를 지배하는 타자도 없을 것입니다. 진정 무서운 일이 아닌가요? 자본은 마치 몸에 기생하는 암세포처럼 우리 내면의 욕망을 먹이삼아 번식하고 있습니다. 우리 욕망이 치열해질수록, 자본은 더욱 강해질 테고 우리 삶은 점차 병들어가겠지요. 자본이 남긴 뿌리 깊은 상처를 근본적으로 치유하려면 우리는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가장 시급한 것은 우리가 상처 받고 병들어 있다는 사실에 직면할 용기를 갖추는 일이 아닐까요? 숨겨진 상처를 상처 그대로 직시할 수 있을 때, 비로..

읽고본느낌 2020.04.21

나는 농담이다

우주를 소재로 사용한 게 흥미롭다. 책 표지에도 우주 그림이 그려져 있다. 서가에서 책을 뽑을 때 표지 그림이 이 책을 선택하게 했다. SF가 아닌 소설에서 우주가 등장하는 것은 드물다. 는 초기 화성 탐사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김중혁 작가의 소설이다. 송우영과 이일영이라는 두 남자가 주인공이다. 송우영은 스탠드업 코미디언인데 어머니가 죽으면서 남긴 편지를 주인(이일영)에게 돌려주려 한다. 이일영은 사고로 우주 미아가 된 상태다. 통신이 두절되고 산소가 점점 희박해져 가는 가운데 관제센터를 향해 메시지를 남긴다. 송우영과 이일영은 어머니가 같지만 아버지는 다른 형제다. 는 싱겁게 느껴지는 소설이다. 등장하는 인물도 희한하다고 해야 할까, 뚜렷한 색깔이나 개성이 없이 흐릿하다. 이 소설이 말하려는 바도 마..

읽고본느낌 2020.04.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