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쓴 전희식 선생은 치매를 앓고 있는 노모를 모시고 산다. 시골 빈집을 구해서 어머니의 몸 상태에 맞게 직접 수리했다. 그리고 도시 아파트에서 형과 함께 살고 있던 노모를 모시고 왔다. 귀도 멀고 똥오줌도 못 가리는 어머니가 계실 곳은 결코 도시가 아니라고 본 것이다. 사시사철 두 평 남짓한 방에서만 지내면서 밥도 받아먹고 똥오줌도 방에서 해결하는 것은 관리하는 입장에서는 편할지 몰라도 여든여섯 노쇠한 어머니의 남은 인생을 가두는 것으로 생각했다. 선생이 생각하는 모심은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우선하는 직접 돌봄이다. 치매 노인이라도 품위와 존엄을 지켜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가족과도 떨어져 어머니와 둘이서 지낸다. 똥오줌을 직접 받아내고, 진지를 해 드리고, 같이 놀아주고, 그러면서 농사일도 한다. 책 제목이 '똥꽃'인 것은 어머니의 똥을 꽃으로 본다는 뜻이다. 어머니의 배변 습관 개선을 위해 편한 기저귀도 사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옷이 엉망이 되어도 하루에도 몇 번씩 손으로 직접 빤다. 어머니에게는 늘 존댓말을 쓰고, 들고 나갈 때는 큰절을 올린다. 정신없는 엄마라고 절대로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어머니의 자존감을 높여주기 위해서다. 벌써 6년째 그렇게 살고 있다.
치매 걸린 노인을 모시고 사는 집은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안다. 나라면 단 하루만이라도 선생처럼 행동할 수가 없을 것 같다. 몇 년 전까지도 시골집에는 치매에 걸린 외할머니가 계셨다. 어머니가 모셨는데 다행히 외할머니는 마지막 며칠 전까지는 대소변을 직접 처리하실 정도였다. 그래도 시골에 내려가서 며칠씩 있게 되면 외할머니와 같은 방에서 생활했는데 처음에는 안쓰러워서 잘 해 드리지만 나중에는 짜증이 났다. 자꾸 밖으로 나가시기 때문에 모시고 들어오는 게 일이었다. 그것도 반복되면 귀찮아졌다. 어느 날이었다. 잠을 못 잘 정도로 자주 나가시길래 좀 세게 끌어당겼다. 외할머니는 넘어지시고는 "이놈이 사람 잡네"라면서 서럽게 우셨다. 내가 이렇게 불효막심하고 인간성이 더러운 놈이라는 걸 외할머니와 같이 있을 때마다 절감했다. 그때 왜 그랬을까? 밖에 나가시면 같이 따라나섰으면 될 텐데 왜 못했을까? 지금은 너무 후회된다.
전희식 선생을 생각하면 천사가 따로 없고 부처님이 따로 없다. 책에는 이런 얘기가 나온다. 들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왔더니 집이 난리가 되어 있었다. 마루에는 똥이 묻은 옷이 쌓여 있고 방안에도 어머니가 움직인 길을 따라 똥칠이 되어 있었다. 온몸에 똥칠갑이 된 어머니는 돌부처처럼 방구석에 웅크리고 있었다고 한다.
'어머니한테 다가갔다. 똥이 발에 밟혔다. 고개를 돌려 올려다보는 어머니 얼굴이 반쪽이었고 훨씬 굵어진 주름들이 얼굴을 뒤덮고 있었다. 어머니 곁에 가만히 쪼그리고 앉아 눈높이를 맞추었다. 어머니 눈은 겁을 머금고 있었다. 자식을 향한 부모의 겁먹은 눈초리.
그것은 버림받을지 모르는 공포였다.
어머니 어깨를 감싸고 꼭 안았다. 울컥하고 울음이 솟았다. 어머니가 천천히 돌아앉으며 내 팔을 잡았는데 미끈거리는 똥의 감촉이 전해져 왔다. 어머니 얼굴에 볼을 대고 속삭였다.
"어무이 똥재이."
이렇게 말해 놓고 보니 우스웠다. 그래서 웃었다. 그러자 눈물이 볼을 타고 굴러 내렸다.
"어무이 똥박사~"
소리를 높여 말하자 이번에는 어머니가 알아들었나 보다. 어머니 굳어 있던 얼굴이 풀렸다. 어머니도 내 웃음에 감염되었는지 따라 웃었다.
"어무이 똥대장~"
다시 소리쳤다.
우리는 서로 똥 묻은 상대를 손가락질해 가며 마구 웃었다. 불을 환히 밝히고 보니 여기저기 똥덩이들이 몇 년 잘 묵은 된장 같았다.'
나에게는 전설 같은 이야기다. 책에는 가슴을 울리는 이런 일화들이 많다. 어떤 경지에 올라야 어머니 똥이 꽃으로 보일까? 선생은 단순히 자신의 어머니를 모시는 것이 아니라 치매 어르신들의 존엄을 위해 연구하고 실천하고 있다. 어린이를 위한 동화(童話)는 많지만, 노인을 위한 노화(老話)는 없는 게 이상하다면서 자신이 직접 어머니를 위한 노화를 만들기도 했다. 제 어머니라는 생각을 넘어 세상 어머니 한 분을 모신다는 마음으로 살아간다고 한다. 효도를 넘어선 인간에 대한 섬김이다.
시골에서 홀로 살고 계시는 어머니가 떠오른다. 올해 여든셋이시다. 감사하게도 지금까지는 건강하시지만 노인의 일이라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 만약 치매라도 온다면 어떻게 감당할지 여간 걱정되는 게 아니다. 부모가 깊은 병에 들면 형제간에 갈등이 생기는 경우도 자주 본다. 쉽게 생각하는 게 요양원이지만 그것도 마음이 편할 리 없다. 그렇다고 전 선생 같은 마음을 낼 자신은 도저히 없다. 선생의 어머니 모시기는 예수의 산상수훈처럼 너무나 높이 있다. 우리 같은 보통 사람은 실천해 볼 시도조차 하기 어렵다.
선생이 운영하는 '부모를 모시(려)는 사람들'이라는 카페가 있다. 거기에는 '자식키우기 반만이라도'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자식한테 쏟는 정성의 반만이라도 부모에게 드린다면 우리 사회의 노인 문제는 상당 부분 해소될 것이다. 그런데 인간이란 생래적으로 내리사랑으로 가게 되어 있는가 보다. 이제 질병에 걸린 노인을 개인이나 가정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무거운 짐이 되어 버렸다. 사회나 국가가 나누어져야 한다. 그런 점에서 우리 사회도 많이 발전되었다고 본다. 그러나 시스템 이전에 부모 자식 사이의 유대와 사랑이 중요한 건 두말할 나위가 없다. <똥꽃>은 우리에게 진정 무엇이 소중한지를 묻는다.
'읽고본느낌'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함석헌 읽기(12) - 평화운동을 일으키자 (0) | 2013.05.10 |
---|---|
지슬 (0) | 2013.05.01 |
함석헌 읽기(11) - 세계의 한길 위에서 (0) | 2013.04.28 |
아무것도 하지 않을 권리 (0) | 2013.04.24 |
함석헌 읽기(10) - 오늘 다시 그리워지는 사람들 (0) | 2013.04.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