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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유럽인 이야기

학창 시절에 유럽의 중세는 '암흑시대(Dark Ages)'라고 배웠다. 지금도 중세라고 하면 제일 먼저 그 말이 떠오른다. 대략 서기 500년부터 1500년에 이르는 1천 년의 시간으로 봉건제와 미신에 가까운 종교가 인간 정신을 옭아맨 몽매의 시대라는 것이었다. 중세가 끝나고 르네상스 시기가 되어서야 문화의 빛이 살아나고 서구 문명이 개화했다고 한다. 를 쓴 주경철 선생은 이런 선입견은 버리라고 말한다. 중세는 야만성과 함께 세련된 문화가 공존한 콘스라스트가 강한 시대였으며, 이 시대 사람들은 독특한 문명을 건설하여 후대에 물려준 총천연색의 화려한 중세사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는 중세를 살았던 여러 인물을 중심으로 중세의 속살을 흥미진진하게 보여준다. 쉽고 재미있게 쓰여 있어 단숨에 읽었다. 책은 5부로..

읽고본느낌 2024.01.03

흐린 겨울 하늘

연말연시 내내 흐린 하늘이다. 올해의 새해 첫날 일출도 영 시원찮았던 모양이다. 이왕이면 멋진 해돋이와 함께 한 해를 시작하면 좋으련만, 겨울 하늘은 심술을 부리는 듯 잔뜩 찌푸려 있다. 나라 안팎 사정도 이런 날씨를 닮아가는 게 아닌가 싶다. 이미 정치, 경제 등 여러 분야에서 짙은 먹구름이 다가오고 있는 게 보인다. 2024년은 여느 연초와 달리 기대보다는 걱정과 우려로 시작하는 해다. 운동화를 챙겨 신고 경안천에 나갔다. 겨울이 되면 아무래도 몸을 덜 움직이니 운동 부족이 되기 십상이다. 걷기 위해 밖에 나가는 것이 몇 주 만인지 모르겠다. 다행히 날씨는 누긋하다. 구름이 감싸주는 탓인지 요사이는 밤에도 영하로 떨어지지 않는다. 짙은 구름 사이로 잠깐 해가 보이는 순간이 있었다. 경안천에는 사시사철..

사진속일상 2024.01.02

새해 인사 / 나태주

글쎄, 해님과 달님을 삼백예순다섯 개나 공짜로 받았지 뭡니까 그 위에 수없이 많은 별빛과 새소리와 구름과 그리고 꽃과 물소리와 바람과 풀벌레 소리들을 덤으로 받았지 뭡니까 이제, 또다시 삼백예순다섯 개의 새로운 해님과 달님을 공짜로 받을 차례입니다 그 위에 얼마나 더 많은 좋은 것들을 덤으로 받을지 모르는 일입니다 그렇게 잘 살면 되는 일입니다 그 위에 무엇을 더 바라시겠습니까? - 새해 인사 / 나태주 2024년 새해가 열렸다. 꿈 없이 꿀잠을 자고 난 첫날 아침이다. 하얀 도화지를 앞에 놓고 무슨 그림을 그릴까, 하고 설레는 소년이 되어도 본다. 그러다가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라는 글자가 환등기의 영상처럼 눈앞에서 명멸한다. '빈 손'이라는 말이 전해주는 느낌이 정겹고 따스하다. 시인의 새해 ..

시읽는기쁨 2024.01.01

블로그 20년

2003년 9월 12일에 블로그를 시작했으니 올해로 20년이 된다. 막상 해당 날짜에는 모르고 지나쳤다가 연말이 되어서야 20년이나 된 걸 알았다. 그때 알았다면 뭔가 기념이라도 했을 텐데. 20년 전 무렵은 내 인생의 변곡점이 된 시기였다. 밤골 생활이 벽에 부딪치면서 좌절과 무력감에 시달렸다. 밖으로 눈을 돌리면 차가운 질책뿐이었다. 혼자 있는 시간과 공간이 필요했다. 그때 절박한 심정으로 찾은 것이 블로그였다. 나를 진실로 위로할 사람은 나밖에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블로그는 타인와 소통하기 위해서 개설한 것이 아니었다. 내가 나한테 하는 대화며 독백이었다. 블로그를 하면서 뭔가를 쓴다는 것이 엄청난 위안이 된다는 걸 확인했다. 블로그가 아니었으면 우울증에 걸렸거나 자포자기했을지 모른다. 좀 ..

길위의단상 2023.12.31

사기[10-3]

"일찍이 왕께 변장자(卞莊子)라는 이가 호랑이를 찔러 죽인 일을 들려 드린 사람이 있었습니까? 변장자가 호랑이를 찌르려고 하자, 묵고 있던 여관의 심부름하는 아이가 말리면서 '호랑이 두 마리가 소를 잡아먹으려 합니다. 먹어 봐서 맛이 좋으면 분명히 서로 다툴 것입니다. 다투게 되면 반드시 싸울 테고, 서로 싸우게 되면 큰 놈은 상처를 입고 작은 놈은 죽을 것입니다. 상처 입은 놈을 찔러 죽이면 한꺼번에 호랑이 두 마리를 잡았다는 명성을 얻을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변장자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고 서서 기다렸습니다. 조금 있으니 정말 두 호랑이가 싸워서 큰 놈은 상처를 입고 작은 놈은 죽었습니다. 이때 변장자가 상처 입은 놈을 찔러 죽이니 한 번에 호랑이 두 마리를 잡는 공을 세웠다고 합니다. 지금 한..

삶의나침반 2023.12.30

올해 마지막 당구

올해만큼 당구에 집중해 본 때가 없었다. 그동안은 심심풀이로 치는 당구였다. 그런데 올봄에 불현듯 당구 실력이 늘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책을 사서 읽고 유튜브 당구 강좌를 보며 공부했다. 당구 모임에도 열심히 참가하고, 사람들을 만나면 당구를 치자고 졸랐다. 당구 치는 횟수가 몇 배로 늘어났다. 노력하면 일취월장할 것 같았다. 가을이 되면서 벽에 부딪쳤다. 예상한 만큼 실력이 늘지 않는 것이었다. 어느 공놀이든 자신 있다고 여겼는데 당구는 아니었다. 당구가 얼마나 섬세하고 어려운지를 실감한 거다. 소질이 없는지, 아니면 나이 탓인지 진척이 없으니 스트레스만 받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겨울에 들면서 당구 공부를 포기했다. 못 치더라도 즐기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어제는 올해의 마지막 당구 모임에 참석..

사진속일상 2023.12.29

이웃을 잘 만나는 복

예부터 바람직한 인생을 위해서는 오복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민간에서 전해지는 오복(五福)이란 건강한 치아, 부부의 백년해로, 많은 자손, 풍족한 재산, 명당에 묻히는 것 등이다. 현대의 기준으로는 빼도 괜찮은 것도 있다. 예를 들면 치아는 치과에 가면 새것처럼 만들어 준다.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명당에 묻혀야 한다고 풍수지리를 신봉하는 현대인은 없다(대통령병에 걸린 몇몇을 제외하고). 현대를 살아가는 나는 '이웃을 잘 만나는 복'을 오복에 포함시키고 싶다. 우리나라는 아파트 등 공동주택의 거주 비율이 80%가 넘는다. 많은 사람들이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웃과 살아간다. 너무 밀집하여 살면 마찰이 생기기 마련이다. 대표적인 게 층간소음이다. 막무가내인 이웃을 만나면 해결책이 없다. 현대에서 ..

길위의단상 2023.12.28

평화로운 백조의 호수

지난 한파에 경안천이 얼었다. 다행히 일부 얼지 않은 데가 있어 고니와 기러기가 모여 노니는 운동장이 되었다. 백조(고니)의 호수라고 불러도 될 것 같다. 차이코프스키의 '백조의 호수'를 들으며 오늘 찍은 사진을 정리한다. 경안천의 새들은 백과 흑이 조화를 이루며 평화롭게 살아간다. 고니는 고니대로, 기러기는 기러기대로, 함께 있되 서로 간섭하지 않으며, 내 땅이니 나가라고 폭력을 쓰지도 않는다. 낮 동안에는 대부분이 쉬거나 유유히 헤엄 치며 보낸다. 여유롭게 살아가는 모습이 너무 부럽다. 인간도 새처럼 가볍게 살 수는 없는지, 잠깐만이라도 너희와 동류가 되어 덕지덕지 쌓인 인간의 때를 벗어버리고 싶구나.

사진속일상 2023.12.27

혼자 사는 사람들

진아는 타인과의 관계 맺기에 어려움을 겪는 여자다. 혼자 살면서 집과 회사(카드 회사 콜센터 직원)만을 오가는 생활을 한다. 동료들과 대화도 없고, 점심도 외딴 식당에서 혼자 먹으며, 출퇴근 때는 이어폰을 끼고 휴대폰 화면만 본다. 휴대폰에 집중하는 것은 나에게 가까이 오지 말라는 신호와 같다. 외부와 단절된 삶이 편하기 때문이다. 이런 패턴에 균열을 일으키는 사건 두 가지가 생긴다. 하나는, 신입사원 수진을 1:1로 연수를 시켜야 하는 일로 진아에게는 너무 부담스러운 것이었다. 붙임성 좋은 수진에게 매몰차게 대하지만, 솔직하고 관계를 중시하는 수진을 보며 진아의 마음에는 미묘한 파장이 인다. 다른 하나는, 홀로 사는 옆집 남자가 고독사한 지 일주일 만에 발견된 사건이다. 뒤이어 입주한 남자는 떠난 사람..

읽고본느낌 2023.12.26

화이트 크리스마스

올해는 화이트 크리스마스다. 밤 사이에 내린 눈이 오전까지 이어지며 지상을 하얗게 덮고 있다. 일주일 넘게 움츠리게 만든 한파도 물러가고 포근한 성탄절이다. 가정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는 친구가 성탄 축하 인사를 전하며 이사야서의 성탄 예언을 적어 보냈다. 이번 크리스마스는 친구에게 더욱 애틋하며 간절한 날이 되지 않을까 싶다. "험한 길이 평탄하여질 것이요,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 세상의 연약하고 버림 받고 힘없는 존재들이 따스하게 위안을 받았으면 좋겠다. 당신의 상처 입은 선한 마음도 위로를 받았으면 한다. 흰 눈이 세상을 순일하게 감싸주듯, 안팎의 소란이 잠들고 평화가 찾아온다면, 그렇게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사진속일상 2023.12.25

사친(思親) / 사임당

산 첩첩 내 고향은 천리건만 자나 깨나 꿈속에도 돌아가고파 한송정 가에는 외로이 뜬 달 경포대 앞에는 한 줄기 바람 갈매기는 모래톱에 흩어졌다 모이고 고깃배들은 바다 위로 오고 가리니 언제나 강릉길 다시 밟아가 색동옷 입고 앉아 바느질할꼬 千里家山萬疊峰 歸心長在夢魂中 寒松亭畔雙輪月 鏡浦臺前一陳風 沙上白鷗恒聚散 海門漁艇每西東 何時重踏臨瀛路 更着斑衣膝下縫 - 사친(思親) / 사임당(師任堂) 사임당은 이원수와 혼인하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홀로 남은 어머니에 대한 애틋함이 각별했을 것 같다. 원래 다정다감한 성품인지라 어머니를 걱정하고 그리워하는 마음이 남달랐으리라. 사임당은 열아홉에 혼인을 한 뒤 7남매를 키우며 파주와 한양에서 살았다. 쪼들리는 살림을 꾸리고 시어머니를 봉양하는 동안 ..

시읽는기쁨 2023.12.24

사임당

'현모양처 신화를 벗기고 다시 읽는 16세기 조선 소녀 이야기'라는 부제에 끌렸다. 우리가 교육받은 현모양처의 표상으로서의 사임당에 의문을 품었기 때문이다. 책을 읽어보니 '현모양처(賢母良妻)'는 일제 강점기 때부터 권력이 원하는 여성을 만들기 위해 사용한 용어였다. 국가주의 이데올로기에 의한 필요로 순종과 희생정신을 주입하기 위한 세뇌 과정의 일부였다. 가부장사회였던 조선 시대에는 '열녀효부(烈女孝婦)'라는 말로 여성성을 억압했다. 어느 시대에나 지배층이 요구하는 인간상이 있기 마련이다. 당대나 직후에 사임당은 '여성화가 신씨'로 불렸다. 그림을 잘 그렸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송시열에 의해 '율곡의 어머니'로 존경하기 시작했다. 율곡을 대성현으로 모시게 되니 자연스레 율곡을 기른 어머니의 모성성을 숭앙..

읽고본느낌 2023.12.23

다는 아닐 거야 / 방주현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줄기차게 울어대는 매미 소리 귀가 따가워도 이 동네 매미가 다 저러는 건 아닐 거야 날개를 비비다 말고 가만히 쉬는 매미가 있을 거야 어쩌면 수줍음 많은 매미도 있을지 몰라 그런 매미 좋다고 찾아오는 암컷도 있을지 몰라 - 다는 아닐 거야 / 방주현 매미의 울음소리는 암컷을 부르는 수컷의 세레나데다. 암컷에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큰소리를 내야 유리하다. 매미의 울음소리는 처절한 생존경쟁인 셈이다. 땅 속에서 10년 정도 애벌레로 살다가 지상으로 나온 매미는 고작 한두 주 짝짓기를 하기 위해 몸부림치다가 죽는다. 필사적인 매미의 외침이 이해될 만하다. 한 소리로 울어대는 매미 중에서 혹 엉뚱한 매미가 있을지도 모른다. 수줍은 매미일 수도 있고, 내가 왜 소리를 내야 하는지..

시읽는기쁨 2023.12.22

어머니를 돌보다

정상뇌압수두증(正常腦壓水頭症)이라는 희귀병에 걸린 어머니를 간병하며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관찰한 기록이다. '1994년 말, 어머니가 병을 얻었다'로 책은 시작한다. 뇌에 생긴 이상으로 인지장애가 생긴 어머니는 11년 동안 세 딸과 간병인들에 의지하며 자신의 뉴욕 아파트에서 지내다가 생을 마감했다. 지은이인 린 틸먼(Lynne Tillman)은 미국의 소설가로 병든 어머니를 돌봐야 하는 혼돈스러운 심경을 아프게 고백한다. 원제는 다. 지은이는 어머니를 요양원에 보내지 않고 집에서 케어했다. 그 과정에서 생기는 가족과의 마찰, 의사와 간병인과의 갈등, 불안, 낙담, 우울감 등을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여타 간병 기록이 어두운 면보다는 긍정적인 부분에 비중을 두지만, 지은이는 부정적인 감정을 숨기지 않고..

읽고본느낌 2023.12.21

사기[10-2]

진나라가 제나라를 치려고 하자, 제나라와 초나라는 합종을 맺었으므로 이에 장의는 초나라로 가서 상황을 살펴보려고 했다. 초나라 회왕은 장의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가장 좋은 숙소를 비워 놓았다. 장의가 도착하자 회왕은 몸소 장의를 숙소로 안내하고 이렇게 물었다. "이곳은 외지고 누추한 곳입니다. 선생은 이 나라에 무엇을 가르쳐 주려고 합니까?" 장의는 초나라 왕을 설득하여 말했다. "대왕께서 진정 저의 말을 옳다고 여겨 관문을 닫아걸고 제나라와 맺은 합종의 약속을 깨신다면 신은 상과 오 일대의 땅 600리를 초나라에 바치고, 진나라 공주를 왕의 첩이 되게 하며, 진나라와 초나라는 서로 며느리를 맞아 오고 딸을 시집보내는 사이가 되어 영원히 형제 나라가 되게 하겠습니다. 이는 북쪽으로는 제나라를 약화시키고 ..

삶의나침반 2023.12.20

사람을 만나고 오면 쓸쓸해진다

연말이라 모임이 잦다. 이번 주도 두 차례 송년 모임이 있다. 뜸한 해도 있었는데 올해는 별스럽게 만남이 많다. 사람과의 교류가 적은 편인 내가 이럴진대 다른 분들은 어떨까 싶다. 모임을 다녀오면 피곤하다. 인간관계에서 오는 감정의 피로도가 크기 때문이다. 사람을 만난다는 게 나한테는 어렵고 힘이 든다. 대화에서는 억지로 박자를 맞춰주며 고개를 끄덕여줘야 한다. 그렇다고 속마음을 솔직히 드러내면 분위기가 어색해지기 십상이다. 가능하면 사람들과의 접촉을 피하지만 모든 관계를 끊을 수는 없는 일이다. 타인과 만나고 접촉해야 활력이 솟는 사람도 있는 모양이다. 사소한 갈등이야 문제 삼지 않는다. 사람이 북적이는 데가 좋고, 모여서 수다를 떨어야 생기가 돋는다고 하니 신기하다. 나는 혼자 있어야 편하다. 사람과..

참살이의꿈 2023.12.19

경안천 버들(231218)

갑자기 차가워진 날씨 탓인가, 오랜만에 찾아간 경안천 버들이 너무 추워 보였다. 주변 풍경도 스산하고 쓸쓸했다. 나목은 크기마저 줄이려는 듯 잔뜩 웅크린 자세로 서 있었다. 나무는 움직일 수 없다. 나무는 혹독한 계절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견딜 뿐이다. 오랜 진화를 거치며 환경에 적응되었다 하더라도 그들에게 겨울은 긴 인고의 시기일 것이다. 하지만 기약하지 않아도 봄은 찾아오고, 겨울의 시련이 있어 나무는 더 단단해진다. 경안버들이 외롭게 보여서 세 차례 다중노출을 해서 찍어보았다. 내 마음의 위안일지 모르지만 조금은 더 포근해졌다.

천년의나무 2023.12.18

경안천 고니(2023/12/18)

아침 기온이 영하 13도까지 떨어졌다. 오전에 경안천에 나갔을 때도 영하 10도 안팎을 오르내렸다. 강추위가 사흘째 이어지고 있다. 이번 주 내내 동장군의 위세가 거셀 전망이다. 경안천은 가장자리에서부터 얼기 시작하고 있다. 고니와 기러기들은 몸을 움츠린 채 정지 상태다. 소리를 지르며 동료들과 장난치는 녀석들도 일부 있다. 시베리아에서 내려왔으니 이 정도 추위는 아무렇지 않을 것이다. 고니와 기러기가 함께 어울려 지내는 모습이 평화로웠다. 얘들은 자기들 영역을 지키느라 싸우지 않는다. 또한 먹이를 가지고도 다투지 않는다. 날개를 펴면 다 내 하늘 내 땅인데 더 챙길 게 뭐가 있겠는가. 많이 소유하면 오히려 부담스럽다. 높이 날 수가 없다. 새들을 보면서 마태오복음의 한 구절을 떠올린다. "하늘의 새들을..

사진속일상 2023.12.18

견리망의(見利忘義)

'교수신문'에서는 연말이면 올해의 사자성어를 선정한다. 올해 사자성어는 견리망의(見利忘義)다. '이로움을 보자 의로움을 잊는다'/'의로움을 잊고 이익만 챙긴다'는 뜻으로, 전국 교수 1,300여 명이 뽑았다. 안중근 의사의 붓글씨로 유명한 '견리사의(見利思義)'를 뒤집어서 만든 말인 것 같다.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병폐를 들라면 극심한 이기주의가 아닐까 한다. 옛날이라고 인간성이 달랐을 것 같지 않지만, 그래도 겉으로는 의로움을 명분으로 내세웠다. 이제는 다들 철면피가 되고 뻔뻔해졌다. 도시와 시골, 잘 사는 이나 못 사는 이나 차이가 없다. 세상은 약육강식의 정글이 되었고, 각자도생의 싸움판이 되었다. 견리망의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곳이 정치판이다. 자신이나 정파의 이익을 위해서는 의로움 따위는 헌신짝만..

길위의단상 2023.12.17

남아 있는 나날

일본계 영국인인 가즈오 이시구로(Kazuo Ishiguro, 2017년 노벨 문학상 수상)의 소설이다. 작가는 1954년에 일본 나가사키에서 태어나, 1960년 영국으로 이주해 학업을 마치고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인간과 문명에 대한 비판을 작가 특유의 문체로 잘 그려낸다고 한다. 는 영국 귀족 가문에서 집사로 일하는 스티븐스가 과거에 함께 일했던 켄턴을 찾아가는 6일 동안의 여정을 그린 소설이다. 자신의 직업에 최선을 다해 살아온 스티븐스로서는 달링턴 홀을 떠나 평생 처음 해 보는 여행이다. 중간중간 과거에 대한 회상이 여정과 교차하며 소설을 구성한다. 소설에서 자주 나오는 단어가 '품격'이다. 품격과 충성심, 성실, 명예 등을 빼놓고는 스티븐스를 설명할 수 없다. 스티븐스는 귀족을 섬기는 자신의 직..

읽고본느낌 2023.12.16

겨울비에 젖는 경안천

어제부터 겨울비가 내린다. 밤에 잠을 깼더니 양철 환기통으로 조잘거리며 떨어지는 낙숫물 소리가 정겨웠다. 한밤에도 눈이 아니라 비가 내리는 겨울이다. 하지만 이도 잠시일 뿐, 오늘 저녁부터는 기온이 떨어지고 밤에는 눈으로 변한다는 예보다. 경안천 둑에 서니 강변 풍경이 희뿌옇게 젖어 있다. 사선으로 긋는 빗줄기는 바지 아랫부분을 축축하게 적신다. 경안천에 나온 것은 고니가 얼마큼 와 있는지 궁금해서였다. 고니는 군데군데 무리를 지어 상당한 숫자가 모여 있었다. 둑 위에는 늘 고니를 찍으려는 사진사들이 많은데 오늘은 한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 경안천 주변 도로를 따라 한 시간 정도 우중 드라이브를 즐겼다. 빗줄기를 헤치며 앞으로 달려나가는 기분은 드라이브의 백미다. 음악도 끄고 하늘에서 내려와 대지와 차체..

사진속일상 2023.12.15

물빛공원 반영

롯데백화점 건대스타시티점에 있는 한 식당에서 점심 모임이 있었다. 전 같으면 서울 나가는 데 당연히 대중교통을 이용했겠지만 요사이는 자가용을 끌고 나갈까 말까를 고민한다. 편하게 다녀오기 위해서는 자가용이 훨씬 낫다. 이번에도 유혹에 넘어가 결국은 자동차 키를 꺼내 들었다. 편한 게 선택의 우선순위가 된다는 것은 늙었다는 징후 중 하나다. 대중교통이 있는데 굳이 자가용을 가지고 다니는 사람을 보면서 지구 환경은 생각하지 않은 채 제 한 몸 편하자는 이기적인 행동이라고 비난했었다. 세상은 돌고 도는가, 그런 손가락질을 이제는 내가 받게 되었다. 어쩔 수 없지 뭐, 라고 불편해지는 마음을 외면할 정도로 철면피가 되어 가는 나를 본다. 모임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물빛공원을 한 바퀴 산책했다. 호수 반영이 실..

사진속일상 2023.12.14

쓰기의 말들

당구 책을 읽는다고 당구를 잘 칠 수 없듯이, 글쓰기 책을 읽는다고 글을 잘 쓰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가끔 글쓰기 책을 힐끔거리는 건 되도록이면 글을 잘 쓰고 싶은 바람 때문이다. 무엇에고 만족하기는 쉽지 않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은 '글 쓰는 사람'인 은유의 글쓰기 안내서다. 부제가 '안 쓰는 사람이 쓰는 사람이 되는 기적을 위하여'다. 책을 읽다 보면 나도 글을 써 보고 싶어지고,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좀 더 잘 쓰고 싶어진다. 은유의 글쓰기 수업은 이론보다는 실용적인 팁이 많아 실제 글쓰기에 도움이 많이 된다. 이 책은 유명인이 남긴 104개의 문장을 소개하면서 지은이의 체험에서 우러나온 글쓰기의 다양한 길을 보여준다. 누구에게나 자신에게 적용할 수 있는 내용이 몇 가지는 나올 것이다. 이번에..

읽고본느낌 2023.12.13

님의 침묵 / 한용운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숲을 향하야 한 적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黃金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서盟誓는 차디찬 티끌이 되야서 한숨의 미풍微風에 날어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追憶은 나의 운명運命의 지침指針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源泉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希望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시읽는기쁨 2023.12.12

사기[10-1]

장의는 학업을 마치자 유세하러 제후들을 찾아갔다. 장의는 일찍이 초나라 재상과 함께 술을 마신 적이 있는데, 얼마 후 초나라 재상이 구슬을 잃어버렸다. 재상의 문하 사람들이 장의를 의심하고 이렇게 말했다. "장의는 가난하고 행실이 좋지 않습니다. 틀림없이 이자가 재상의 구슬을 훔쳤을 것입니다." 그러고는 모두 함께 장의를 붙들어 수백 번 매질을 했으나, 장의가 구슬을 훔쳤다고 말하지 않으므로 풀어 주었다. 장의의 아내가 말했다. "아! 당신이 글을 읽어 유세하지 않았던들 어찌 이런 수모를 겪었겠습니까?" 그러자 장의는 자기 아내에게 말했다. "내 혀가 아직 붙어 있는지 아닌지 보시오." 장의의 아내가 웃으면서 말했다. "혀는 남아 있네요." 장의가 말했다. "그럼 됐소." - 사기(史記) 10-1, 장의..

삶의나침반 2023.12.11

괴물

열흘 전에 개봉한 따끈따끈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다. 고레에다 감독의 영화는 따스한 인간애를 다루지만 대체적으로 밍밍한데, 이 영화는 관객을 살짝 긴장시키면서 우리 사회 및 인간의 내면을 잘 담아낸 수작이다. 고레에다 감독의 영화 중 최고라고 할 만하다. '괴물'은 학교 폭력을 배경으로 깔고 있지만 학교 폭력이나 인간 심성의 사악함을 고발하는 영화는 아니다. 같은 사안이더라도 보는 관점에 따라 얼마나 평가가 달라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은 진실과 허위, 선과 악을 칼로 자르듯 명쾌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영화는 3막으로 되어 있는데 각각 어머니인 사오리, 교사인 호리, 사건의 중심에 있는 두 아이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현실이 교차한다. 영화의 중심은 미나토와 요리, 두 아이가 ..

읽고본느낌 2023.12.10

탑골공원과 익선동 모임

종로3가에서 모임이 있었다. 지하철에서 내렸을 때부터 밖의 거리까지 온통 노인 천지였다. 탑골공원과 종묘 앞 광장, 송해 거리 등 이곳은 노인 문화의 중심지라 할 수 있다. 홍대나 강남이 젊은이의 거리라면 종로3가 주변은 노인의 거리다. 전과 달리 이제는 나도 같은 노인 무리에 섞여 걷고 있다. 동류의 노인들을 바라보는 마음이 착잡했다. 약속 시간보다 20분 정도 일찍 도착하게 되어 탑골공원에 들어가 보았다. 원각사지 10층석탑을 보고 싶어서였다. 이곳은 원각사(圓覺寺)가 있던 곳으로, 조선 세조 13년(1467)에 이 석탑을 만들었다. 아마 왕실의 번영을 위한 염원이 들어갔으리라. 고등학생 때 처음 찾았던 탑골공원(그때는 파고다공원이었음)에서 제일 인상적인 것이 이 10층석탑이었다. 절에서 만나는 일반..

사진속일상 2023.12.09

어머니에게 다녀오다

어머니 표정이 어두웠다. 목소리에도 힘이 없었다. 방에 들어가 얘기를 나누다 보니 이틀 전에 꾼 꿈 때문이었다. 돌아가신 외할머니가 나타나서 어머니가 오기를 기다리더라는 것이었다. 꿈에서는 이심전심으로 느껴지니까. "나 금방 갈 께요" 하니 외할머니는 아무 대꾸 없이 등을 돌리고 걸어갔다고 했다. "아무래도 내가 곧 죽을 것 같다." 어머니는 수심이 가득하셨다. "그건 아직 갈 때가 안 됐다는 뜻이에요. 외할머니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어서 오라고 해야 데려가는 거지요. 외면하며 뒤돌아서 갔잖아요." 내 말에 어머니는 미심쩍어하면서도 다소 안도하셨다. "빨리 죽어야지" 하면서도 막상 죽음 앞에서는 누구나 망설이며 주춤한다. 생(生)에의 본능이 그만큼 질긴 것이리라. 나는 안다. 지금 같은 어머니 건강 상태라..

사진속일상 2023.12.07

전보가 사라진다

전보가 도입된 지 138년 만에 곧 서비스를 중단한다는 보도를 봤다. 옛 시대의 상징이 또 하나 사라지는 것이다. 전보는 1885년 서울과 인천 사이에 전신 시설이 개통되면서 우리나라에 처음 선을 보였다. 사실 '전보(電報)'라는 말은 오랜만에 들었다. 길거리에서 공중전화박스를 만나는 야릇한 느낌이랄까, "아직 전보가 있었나?"라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돌아보면 1970년대 중반까지는 전보를 자주 이용했다. 가정에 전화가 보급되기 전이었으니 연락 수단은 편지나 전보였다. 급한 연락을 하자면 전보밖에 없었다. 우체국에 가서 보낼 말을 적어주면 당일로 전달이 되었다. 글자 수에 따라 요금이 정해지니 문장은 가능한 한 짧게 압축해야 했다. 고등학생 때는 고향집에서 보낸 "어머니상경 5시청량리역" 같은 전보를 자..

길위의단상 2023.12.04

그래도 우리의 나날

일본 작가인 시바타 쇼의 장편소설이다. 이 소설은 1950년대 일본 젊은이들의 불안과 방황을 그렸다. 소설에는 공산주의 혁명에 투신하거나 간접적으로 관련된 젊은이들이 나오는데, 이들은 조직이 와해되어 이념의 공백 상태를 겪으면서 허무와 권태에 빠져든다. 이상과 현실의 갈등을 당시 일본의 시대 상황과 연결시킨 작품이다. 은 제51회 아쿠타가와상을 받았다. 그중 한 사람인 사노는 혁명가를 꿈꾸었으나 뻔뻔하지 못했다. 진압 경찰과 맞섰을 때 무서워서 도망한 사실을 자책하며 괴로워하는 여린 감성을 가진 젊은이였다. 공산당 무장 조직이 해체되면서 이상이 붕괴되는 현실을 사노는 감당하지 못하고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소설에 나오는 인물 중 가장 감정이입이 되면서 만났다. 상황은 딴판이지만 내 젊은 시절을 떠올리게 ..

읽고본느낌 2023.12.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