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아름다운 구멍 / 장정일

샌. 2017. 1. 19. 10:30

카파도키아에서 사흘을 보내고

이스탄불로 돌아가기 위해

새벽같이 일어났다.

 

공항은 밤새 내린 폭설로 마비되었다.

대합실 통유리 밖으로 제설차가 활주로를 새로 닦는 모습을 구경하며,

폭설로 지연된 비행기 운행이

내 인생에 선사하게 될 뜻밖의 구멍을 상상했다.

 

뚱뚱한 스페인 아주머니들은 단체 여행을 왔다.

가죽점퍼를 입은 흑인 청년은 껌을 씹고

피부색이 갖가지인 아이들은 어른들이 모르는 말로 동맹을 맺는다.

(카파도키아에서 여행 중에 몇 번이나 마주친 네 명의 한국 남자 대학생들,

이들은 영어로만 대화한다.)

 

몇 시간 만에 눈을 치우고

비행기가 날아올랐다.

폭설을 감안하면 정상 운행이었다.

창밖으로 흘낏 본 남겨진 비행기들.

비스킷과 오렌지 주스를 사양하고

그보다 더 달콤한 꿈이 생각나 얼른 눈을 감았다.

 

이스탄불이 보이는 바닷가에 이 비행기가 추락했으면!

모두 살아남고

나 혼자 죽었으면!

 

- 아름다운 구멍 / 장정일

 

 

아무도 모르는 블랙홀로 흔적없이 빨려들어가고 싶다. 세상이 너무 낯설다. 사람들도 멀다. 때 맞추어 먼 나라로 나가는 기회가 찾아왔다. 다행한 일이다. 그 길이 '아름다운 구멍'이 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