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파도키아에서 사흘을 보내고
이스탄불로 돌아가기 위해
새벽같이 일어났다.
공항은 밤새 내린 폭설로 마비되었다.
대합실 통유리 밖으로 제설차가 활주로를 새로 닦는 모습을 구경하며,
폭설로 지연된 비행기 운행이
내 인생에 선사하게 될 뜻밖의 구멍을 상상했다.
뚱뚱한 스페인 아주머니들은 단체 여행을 왔다.
가죽점퍼를 입은 흑인 청년은 껌을 씹고
피부색이 갖가지인 아이들은 어른들이 모르는 말로 동맹을 맺는다.
(카파도키아에서 여행 중에 몇 번이나 마주친 네 명의 한국 남자 대학생들,
이들은 영어로만 대화한다.)
몇 시간 만에 눈을 치우고
비행기가 날아올랐다.
폭설을 감안하면 정상 운행이었다.
창밖으로 흘낏 본 남겨진 비행기들.
비스킷과 오렌지 주스를 사양하고
그보다 더 달콤한 꿈이 생각나 얼른 눈을 감았다.
이스탄불이 보이는 바닷가에 이 비행기가 추락했으면!
모두 살아남고
나 혼자 죽었으면!
- 아름다운 구멍 / 장정일
아무도 모르는 블랙홀로 흔적없이 빨려들어가고 싶다. 세상이 너무 낯설다. 사람들도 멀다. 때 맞추어 먼 나라로 나가는 기회가 찾아왔다. 다행한 일이다. 그 길이 '아름다운 구멍'이 될 수 있기를....
'시읽는기쁨'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도 보험에 들었다 / 이상국 (0) | 2017.03.25 |
---|---|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것들의 목록 / 이정록 (0) | 2017.03.18 |
별 / 윤주상 (0) | 2017.01.06 |
나무 기도 / 정일근 (0) | 2017.01.01 |
왜 그럴까, 우리는 / 이해인 (0) | 2016.12.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