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사랑방 / 함순례

샌. 2023. 6. 24. 21:27

울 아부지 서른, 울 엄니 스물 셋 꽃아씨, 아부지 투덕한 살집만 믿고 신접살림 차렸다는디, 기둥 세우고, 짚과 흙 찰박찰박 벽 다져, 오로지 두 양반 손으로 집칸 올렸다는디, 부쳐먹을 땅뙈기가 없는 기라

 

내사 남아도는 게 힘이여 붉은 동빛 박지르며 집을 나서면, 이윽이윽 해가 지고, 어둠별 묻히고야 삽작을 밀고 들어섰다는디, 한 해 두 해 불어나는 전답, 울 엄니 아부지 얼굴만 봐도 배가 불렀다는디....

 

늘어나는 것이 어디 그뿐이랴 울 엄니 이태가 멀다 실제 배가 불렀다는디, 갈이질에, 새끼들 가동질에, 하루 해가 지는지 가는지 하 정신 없었다는디, 울 아부지 저녁밥 안치는 엄니 그대로 부엌바닥에 자빠뜨린 거라

 

그 징헌 꽃이 셋째 딸년 나였더란다 첫국밥 수저질이 느슨할 밖에.... 임자 암 걱정 말어 울 아부지 구레나룻 쓰윽 훑었다는디, 스무 날을 넘기자 사랑방 올린다고 밤새 불을 써 놓고 퉁탕퉁탕 엄니 잠을 깨웠드란다 모름지기 사내 자슥 셋은 되야 혀 그때 되믄 계집애들이랑 분별하여 방을 줘야 않겄어!

 

그렇게 맨몸으로 생을 일궜던 울 아부지, 성 안 차는 아들 두 놈 부려놓고 이젠 여기 없네.

 

- 사랑방 / 함순례

 

 

며칠 전 월 스트리트 저널인가 하는 미국 신문에 요사이 우리나라의 청혼 이벤트 기사가 실렸다. 호텔에서 일박하며 여자에게 명품 핸드백을 선물하는 등 이벤트를 벌이는데 500만 원 정도 든다는 것이다. 한국의 결혼율이나 출산율이 세계 최저 수준인 것은 돈이 많이 드는 이런 과시형 문화 탓이라는 지적도 있었다.

 

이 시는 옛날 남녀의 투박한 사랑법을 보여준다. 기교가 섞이지 않은 원시 상태의 싱싱한 사랑법이다. 이에 비하면 요사이 남자와 여자는 너무 타산적이고 이기적인 것 같다. 문정희 시인은 '다시 남자를 위하여'라는 시에서 야성이 사라진 남성성에 대해 안타까워하고 있다. 시는 이렇게 시작한다.

 

요사이는 왜 사나이를 만나기 힘들지

싱싱하게 몸부림치는

가물치처럼 온 몸을 던져오는

거대한 파도를

 

몰래 숨어 해치우는

누우렇고 나약한 잡것들 뿐

눈에 띌까 어슬렁거리는 초라한 잡종들 뿐

눈부신 야생마는 만나기가 어렵지

 

사나이를 멸종시킨 것은 여자들 책임도 크지 않을까. 어차피 남자란 여자가 바라는 바대로 행동하게 되어 있으니까. 우리 사회를 휩쓸고 지나갔던 미투나 성희롱의 지나친 잣대는 숫컷을 아예 거세시킨 게 아닌지 모르겠다. 욕 먹을 소리인지 모르지만. "내사 남아도는 게 힘이여" - 아들 셋은 둬야 한다고 밤새워 사랑방을 짓던 시인의 아부지는 성 안 차는 아들 두 놈만 부려놓았으니 하늘에서 혀를 끌끌 차실까, 슬며시 웃음 짓게 하는 재미있는 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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