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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 / 심보선

나는 우연히 삶을 방문했다 죽으면 나는 개의 형제로 돌아갈 것이다 영혼도 양심도 없이 짖기를 멈추고 딱딱하게 굳은 네발짐승의 곁으로 그러나 나는 지금 여기 인간 형제들과 함께 있다 기분 좋은 일은 수천수만 개의 따뜻한 맨발들로 이루어진 삶이라는 두꺼운 책을 읽을 때에 나의 눈동자에 쿵쿵쿵 혈색 선명한 발자국들이 찍힌다는 사실 나는 왔다 태어나기 전부터 들려온 기침 소리와 기타 소리를 따라 환한 오후에 심장을 별처럼 달고 다닌다는 인간에게로, 그런데 여기서 잠깐 질문을 던져보자 두 개의 심장을 최단거리로 잇는 것은? 직선? 아니다! 인간과 인간은 도리 없이 도리 없이 끌어안는다 사랑의 수학은 아르키메데스의 점을 우주에서 배꼽으로 옮겨온다 한 가슴에 두 개의 심장을 잉태한다 두 개의 별로 광활한 별자리를 짓..

시읽는기쁨 2012.05.11

솔직히 말해서 나는 / 김남주

솔직히 말해서 나는 아무것도 아닌지 몰라 단 한방에 떨어지고 마는 모기인지도 몰라 파리인지도 몰라 뱅글뱅글 돌다 스러지고 마는 그 목숨인지도 몰라 누군가 말하듯 나는 가련한 놈 그 신세인지도 몰라 아 그러나 그러나 나는 꽃잎인지도 몰라라 꽃잎인지도 피기가 무섭게 싹둑 잘리고 바람에 맞아 갈라지고 터지고 피투성이로 문드러진 꽃잎인지도 몰라라 기어코 기다려 봄을 기다려 피어나고야 말 꽃인지도 몰라라 그래 솔직히 말해서 나는 별 것이 아닌지 몰라 열 개나 되는 발가락으로 열 개나 되는 손가락으로 날뛰고 허우적거리다 허구헌 날 술병과 함께 쓰러지고 마는 그 주정인지도 몰라 누군가 말하듯 병신 같은 놈 그 투정인지도 몰라 아 그러나 그러나 나는 강물인지도 몰라라 강물인지도 눈물로 눈물로 눈물로 출렁이는 강물인지도..

시읽는기쁨 2008.08.18

나의 나 / 이시영

여기에 앉아 있는 나를 나의 전부로 보지 마 나는 저녁이면 돌아가 단란한 밥상머리에 앉을 수 있는 나일 수도 있고 여름이면 타클라마칸 사막으로 날아가 몇 날 며칠을 광포한 모래바람과 싸울 수 있는 나일 수도 있고 비 내리면 가야산 해인사 뒤쪽 납작바위에 붙어앉아 밤새 사랑을 나누다가 새벽녘 솔바람 소리 속으로 나 아닌 내가 되어 허청허청 돌아올 수도 있어 여기에 이렇듯 얌전히 앉아 있는 나를 나의 전부로 보지 마 - 나의 나 / 이시영 내 안에는 셀 수 없이 많은 '나'가 들어있다. 하늘을 닮은 나, 땅을 닮은 나, 늑대 같은 나, 양 같은 나, 어느 날은 군자가 되고, 어느 날은 소인이 된다. 가정과 직장의 안온한 울타리에 만족하지만 때로는 일탈을 꿈꾼다. 내 속에는 성인도 들어있고, 창부도 들어있다...

시읽는기쁨 2006.09.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