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천명 3

봄의 서곡 / 노천명

누가 오는데 이처럼들 부산스러운가요 목수는 널판지를 재며 콧노래를 부르고 하나같이 가로수들은 초록빛 새옷들을 받아들었습니다 선량한 친구들이 거리로 거리로 쏟아집니다 여자들은 왜 이렇게 더 야단입니까 나는 포도鋪道에서 현기증이 납니다 삼월의 햇볕 아래 모든 이지러졌던 것들이 솟아오릅니다 보리는 그 윤나는 머리를 풀어헤쳤습니다 바람이 마음대로 붙잡고 속삭입니다 어디서 종다리 한 놈 포루루 떠오르지 않나요 꺼어먼 살구남기에 곧 올연한 분홍 베일이 씌워질까 봅니다 - 봄의 서곡 / 노천명 시절이 하 수상하니 봄이 와도 봄을 실감하지 못한다. 세월호는 3년만에 뭍으로 돌아왔고, 탄핵 당한 전직 대통령은 감방에 들어갔다. 묵직한 돌덩이가 짓누르는 것 같다. 곧 대통령 선거가 있지만 누가 되든 선거 후가 다시 걱정이..

시읽는기쁨 2017.04.01

산국(2)

빈 들판에 노란 산국(山菊)이 핀다. 너도나도 잎을 떨구거나 누렇게 시들 때 늦게서야 꽃을 피우는 게 산국이다. 인고의 꽃이고, 인내의 꽃이다. 어떤 효험이 있음을 믿어서일까, 사람들은 노란 꽃을 꺾어 말려서 국화차를 마시거나, 베갯속에 넣어 긴 밤의 동반자로 삼고자 한다. 가을이 짙어가면 산들에는 산국 향기 그윽해진다. 시인이 '외로운 계절을 홀로 지키는 빈들의 색시여!'라고 영탄한 바로 그 꽃이다. 들녘 비탈진 언덕에 네가 없었던들 가을은 얼마나 쓸쓸했으랴 아무도 너를 여왕이라 부르지 않건만 봄의 화려한 동산을 사양하고 이름도 모를 풀 틈에 섞여 외로운 계절을 홀로 지키는 빈들의 색시여 갈꽃보다 부드러운 네 마음 사랑스러워 거칠은 들녘에 함부로 두고 싶지 않았다 한아름 고이 안고 돌아와 화병에 너를 ..

꽃들의향기 2013.10.25

이름없는 여인이 되어 / 노천명

이름없는 여인이 되어 노천명 어느 조그만 산골로 들어가 나는 이름없는 여인이 되고 싶소 초가 지붕에 박넝쿨 올리고 삼밭엔 오이랑 호박을 놓고 들장미로 울타리를 엮어 마당엔 하늘을 욕심껏 들여놓고 밤이면 실컷 별을 안고 부엉이가 우는 밤도 내사 외롭지 않겠오 기차가 지나가 버리는 마을 놋양푼의 수수엿을 녹여 먹으며 내 좋은 사람과 밤이 늦도록 여우 나는 산골 얘기를 하면 삽살개는 달을 짖고 나는 여왕보다 더 행복하겠오 `어느 조그만 산골로 들어가, 나는 이름없는 여인이 되소 싶소....` 사람마다 바램이 다르겠지만 어느 날 읽은 이 시의 첫 구절이 종종 나의 독백 소리가 되었다. 이 시도 역시 현실 도피적, 자기 만족적경향이 강하지만 세상의 욕심 버리고 자연과 하나되어 살아보고픈 내적 충동은 어찌할 수가 ..

시읽는기쁨 2003.09.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