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새 6

경안천 억새와 올해 첫 고니

이맘때 경안천은 하얀 억새밭으로 바뀐다. 매년 그 넓이가 확장되어 천을 따라 수 km에 걸쳐 뻗어 있다. 혼자 보기에는 아까운 풍경이다. 여기는 대부분이 억새이고 일부 갈대가 섞여 있다. 역광을 받아 하얗게 빛나는 억새를 보며 가을의 정취에 빠져든다. 억새는 살을 베이는 소리를 내며 가을바람에 흔들린다. 겉은 눈부시게 보일지라도 이면에는 어느 생명이나 속울음이 있는 것이다. 배낭을 맨 외국인 한 쌍이 옆을 지나간다. 여자가 짧게 뭐라고 말하니까 남자가 팔로 어깨를 감싸준다.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바람이 차다고 했을지 모른다. 사람의 온기가 자꾸 그리워질 계절이 다가오고 있다. 올해 첫 고니 가족을 만났다. 색깔로 보아 부모에 자식 넷으로 보인다. 이 가족을 뒤따라 많은 고니가 우리 땅에 찾아올 것이다. 내..

사진속일상 2023.11.11

억새(3)

억새는 씨를 날려 보내기 위해 날개를 단다. 억새의 하얀 깃털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만큼 가을의 정취를 표상하는 것도 없다. 잎과 줄기가 부딪치며 서걱대는 음향효과가 더해진다. 억새, 참억새, 물억새, 금억새, 가는잎억새 등 종류도 여럿이다. 억새와 갈대를 구분 못하는 사람도 있는데, 너무 세세히 나누는 건 전문가에게 맡기고 그냥 억새라고 통칭해도 무방할 것 같다. 집 주위를 산책하다가 만난 억새를 좀 색다르게 표현해보려 했다. 똑딱이를 가지고 이 정도 찍은 것에 만족한다. 가을볕 따사로운 오후의 언덕에서 억새를 바라본다. 억새는 달빛보다 희고, 이름이 주는 느낌보다 수척하고, 하얀 망아지의 혼 같다. 가을 하늘이 아무런 울타리 없이 넓다. 쇄락한 무형(無形)의 놀이터라고 할까. 바람이 잠시 불더니 다시 ..

꽃들의향기 2013.11.14

가을 억새 / 정일근

때로는 이별하면서 살고 싶은 것이다 가스등 켜진 추억의 플랫폼에서 마지막 상행선 열차로 그대를 떠나보내며 눈물 젖은 손수건을 흔들거나 어둠이 묻어나는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터벅터벅 긴 골목길 돌아가는 그대의 뒷모습을 다시 보고 싶은 것이다 사랑 없는 시대의 이별이란 코끝이 찡해오는 작별의 악수도 없이 작별의 축축한 별사도 없이 주머니에 손을 넣고 총총총 제 갈 길로 바쁘게 돌아서는 사람들 사랑 없는 수많은 만남과 이별 속에서 이제 누가 이별을 위해 눈물을 흘려주겠는가 이별 뒤의 뜨거운 재회를 기다리겠는가 하산길 돌아보면 별이 뜨는 가을 능선에 잘 가라 잘 가라 손 흔들고 섰는 억새 때로는 억새처럼 손 흔들며 살고 싶은 것이다 가을 저녁 그대가 흔드는 작별의 흰 손수건에 내 생애 가장 깨끗한 눈물 적시고 ..

시읽는기쁨 2008.10.30

억새(2)

어느 해 가을, 억새를 보러 명성산에 갔다. 맑고 청명한 가을날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산에 오르는 동안 등산객을 한 명도 만나지 못했다. 억새 사진을찍기 시작했을 때였다. 갑자기 천둥 소리가 나면서 포탄이 머리 위를 날아가서 터지기 시작했다. 탱크 수 십대가 포격을 하기 시작하고 비행기까지 날아와 폭탄을 터뜨렸다. 군인들이 기동 훈련하는 한 복판에 들어가 있었던 것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온 산이 출입 통제되었는데 그것도 모르고 혼자 산에 올랐던 것이다. 전투기 소리, 폭탄 터지는 소리, 온 천지를 뒤흔드는 굉음에 혼비백산하여 도망쳐 내려왔다. 꼭 오발탄이라도 날아와 내 옆에서 터질 것 같았다. 전쟁이 나면 아마도 먼저 소리에 질려 버릴 것이다. 이 사진을 보면 황망히 도망치던 그때 생각이 난다.

꽃들의향기 2003.1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