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바라기노리코 2

자기 감수성 정도는 / 이바라기 노리코

바삭바삭 말라가는 마음을 남 탓하지 마라 스스로 물주기를 게을리해놓고 서먹해진 사이를 친구 탓하지 마라 나긋한 마음을 잃은 건 누구인가 일이 안 풀리는 걸 친척 탓하지 마라 이도 저도 서툴렀던 건 나인데 초심 잃어가는 걸 생계 탓하지 마라 어차피 미약한 뜻에 지나지 않았다 틀어진 모든 것을 시대 탓하지 마라 그나마 빛나는 존엄을 포기할 텐가 자기 감수성 정도는 스스로 지켜라 이 바보야 - 자기 감수성 정도는 / 이바라기 노리코 늙어가면서 모든 걸 순리로 받아들이려 한다. 몸 여기저기가 고장 나는 것도 적응할 수 있다. 누구 탓을 할 수 없고, 도리가 없는 일이다. 자연의 법칙을 어찌 거역할 수 있겠는가. 하나 감성이 매말라가는 걸 느낄 때는 한숨이 나온다. 삶이 마른 풀잎처럼 드라이해지는 것은 견디기 어..

시읽는기쁨 2019.05.01

내가 가장 예뻤을 때 / 이바라기 노리코

내가 가장 예뻤을 때 거리는 와르르 무너져 내리고 생각지 못한 곳에서 파란 하늘 같은 게 보이기도 했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주위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 공장에서 바다에서 이름도 없는 섬에서 나는 멋을 부릴 기회를 잃어버렸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아무도 다정한 눈길을 주지 않았다 남자들은 거수경례밖에 몰랐고 청결한 눈짓만 남기고 모두 떠나버렸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내 머리는 텅 비어 있었고 내 마음은 무디었으며 손발만이 밤색으로 빛났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우리나라는 전쟁에서 졌다 그런 어이없는 일이 있을까 블라우스 소매를 걷어붙이고 비굴한 거리를 쏘다녔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라디오에선 재즈가 넘쳤다 담배연기를 처음 마셨을 때처럼 현기증이 났다 나는 이국의 음악을 마음껏 즐겼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나..

시읽는기쁨 2018.1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