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양 5

물 끓이기 / 정양

한밤중에 배가 고파서 국수나 삶으려고 물을 끓인다. 끓어오를 일 너무 많아서 끓어오르는 놈만 미친놈 되는 세상에 열받은 냄비 속 맹물은 끓어도 끓어도 넘치지 않는다. 혈식(血食)을 일삼는 작고 천한 모기가 호랑이보다 구렁이보다 더 기가 막히고 열받게 한다던 다산 선생 오물수거비 받으러 오는 말단에게 신경질부리며 부끄럽던 김수영 시인 그들이 남기고 간 세상은 아직도 끓어오르는 놈만 미쳐 보인다. 열받는 사람만 쑥스럽다. 흙탕물 튀기고 간 택시 때문에 문을 쾅쾅 여닫는 아내 때문에 '솔'을 팔지 않는 담뱃가게 때문에 모기나 미친개나 호랑이 때문에 저렇게 부글부글 끓어오를 수 있다면 끓어올라 넘치더라도 부끄럽지도 쑥스럽지도 않은 세상이라면 그런 세상은 참 얼마나 아름다우랴. 배고픈 한밤중을 한참이나 잊어 버리..

시읽는기쁨 2020.07.02

그거 안 먹으면 / 정양

아침저녁 한 웅큼씩 약을 먹는다 약 먹는 걸 더러 잊는다고 했더니 의사선생은 벌컥 화를 내면서 그게 목숨 걸린 일이란다 꼬박꼬박 챙기며 깜박 잊으며 약에 걸린 목숨이 하릴없이 늙는다 약 먹는 일 말고도 꾸역꾸역 마지못해 하고 사는 게 깜박 잊고 사는 게 어디 한두 가지랴 쭈글거리는 내 몰골이 안돼 보였던지 제자 하나가 날더러 제발 나이 좀 먹지 말라는데 그거 안 먹으면 깜박 죽는다는 걸 녀석도 깜박 잊었나보다 - 그거 안 먹으면 / 정양 요즘 들어 깜박하는 일이 잦다고 친구가 말했다. 시내에 나간 게 어제인지 그저께인지 헷갈린다고 쓴웃음을 지었다. 젊을 때 영민했던 친구도 나이를 먹으면서 이렇게 변해간다. 우리말에서 나이를 '먹는다'는 표현이 재미있다. 먹는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뜻이다. 먹지 않으면 죽는..

시읽는기쁨 2020.01.09

화학 선생님 / 정양

중간고사 화학 시험은 문항 50개가 전부 OX 문제였다 선생님은 답안지를 들고 와서 수업시간에 번호순으로 채점 결과를 발표하셨다 기다리지도 않은 내 차례가 됐을 때 "아니 이 녀석은 전부 X를 쳤네, 이 세상에는 옳은 일보다 그른 일이 많다는 걸 어떻게 알았지? 제대로 채점하면 60점인데 기분 좋아서 100점" 그러시고는 다음 차례 점수를 매기셨다 모두들 선생님의 장난말인 줄로만 여겼는데 며칠 뒤에 나온 내 성적표에는 화학 과목이 정말로 100점으로 적혀 그 점수가 영 믿기지 않았지만 백발 성성한 지금도 이 세상에는 그른 일들이 옳은 일보다 많다는 걸 나는 믿지 않을 수가 없다 - 화학 선생님 / 정양 큰 비극 가운데서도 중고등학교는 지금 중간고사를 치르고 있을 것이다. 이 시를 보니 중학생이었을 때 농..

시읽는기쁨 2014.04.25

판쇠의 쓸개 / 정양

천생원네 머슴 하판쇠 덫에 걸린 멧돼지 배를 가르다가 주인영감 잡수실 쓸개를 제 입에 꿀꺽 집어삼키고 경상도 상주 어디서 새경도 못 받고 쫓겨온 노총각 나락섬을 머리 위로 훌쩍훌쩍 내던질 만큼 진창에 빠진 구루마도 혼자 덜컥덜컥 들어올릴 만큼 힘은 세지만 씨름판에서는 마구잡이로 밀어만 붙이다가 번번이 제풀에 나뒹구는 바봅니다 멧돼지 쓸개를 따먹어서 판쇠는 쓸개 빠진 짓만 골라서 합니다 조무래기들과 어울려 팽이 치다가 남의 논밭에서 일해주다가 주막에서 남의 술값이나 물어주다가 천생원에게 멱살 잡혀 끌려가는 게 한두 번이 아닙니다 새경 받고 솜리 장에 가서 제일 먼저 까만 금테 라이방을 샀다는데 동네 아낙들이 멋쟁이라고 추켜준 뒤로는 밤에도 그걸 걸치고만 다닙니다 천생원이 만경 사는 형님에게 생일선물 보내려..

시읽는기쁨 2013.10.30

토막말 / 정양

가을 바닷가에 누가 써 놓고 간 말 썰물진 모래밭에 한 줄로 쓴 말 글자가 모두 대문짝만해서 하늘에서 읽기가 더 수월할 것 같다 정순아보고자파서죽껏다씨펄 씨펄 근처에 도장 찍힌 발자국이 어지럽다 하늘더러 읽어 달라고 이렇게 크게 썼는가 무슨 막말이 이렇게 대책도 없이 아름다운가 손등에 얼음 조각을 녹이며 견디던 시리디 시린 통증이 문득 몸에 감긴다 둘러보아도 아무도 없는 가을 바다 저만치서 무식한 밀물이 번득이며 온다 바다는 춥고 토막말이 몸에 저리다 얼음 조각처럼 사라질 토막말을 저녁놀이 진저리치며 새겨 읽는다 - 토막말 / 정양 바닷가의 저 막말 앞에서는 나 역시 가슴 저리며 서 있을 것 같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서 좋아하게 되는 불가해한 인연에 대하여, 죽도록 보고 싶어지는 갈망의 자력에 대하여 나..

시읽는기쁨 2008.03.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