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호 3

억새(3)

억새는 씨를 날려 보내기 위해 날개를 단다. 억새의 하얀 깃털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만큼 가을의 정취를 표상하는 것도 없다. 잎과 줄기가 부딪치며 서걱대는 음향효과가 더해진다. 억새, 참억새, 물억새, 금억새, 가는잎억새 등 종류도 여럿이다. 억새와 갈대를 구분 못하는 사람도 있는데, 너무 세세히 나누는 건 전문가에게 맡기고 그냥 억새라고 통칭해도 무방할 것 같다. 집 주위를 산책하다가 만난 억새를 좀 색다르게 표현해보려 했다. 똑딱이를 가지고 이 정도 찍은 것에 만족한다. 가을볕 따사로운 오후의 언덕에서 억새를 바라본다. 억새는 달빛보다 희고, 이름이 주는 느낌보다 수척하고, 하얀 망아지의 혼 같다. 가을 하늘이 아무런 울타리 없이 넓다. 쇄락한 무형(無形)의 놀이터라고 할까. 바람이 잠시 불더니 다시 ..

꽃들의향기 2013.11.14

시치미떼기 / 최승호

물끄러미 철쭉꽃을 보고 있는데 뚱뚱한 노파가 오더니 철쭉꽃을 뚝, 뚝, 꺾어간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리며 내뱉는 가래침 가래침이 보도블록과 지하철역 계단 심지어 육교 위에도 붙어 있을 때 나는 불행한 보행자가 된다 어떻게 이 분실된 가래침들을 주인에게 돌려줄 것인가 어제는 눈앞에서 똥누는 고양이가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끝까지 똥누는 걸 보고 이제는 고양이까지 나를 무시한다고 생각했다 위대한 수줍음은 사라졌다 뻔뻔스러움이 비닐과 가래침과 광고들과 더불어 도처에서 번들거린다 그러나 장엄한 모순덩어리 우주를 이루어놓고 수줍음으로 숨어 있는 이가 있으니 그 분마저 뻔뻔스러워지면 온 우주가 한 덩어리 가래침이다 - 시치미떼기 / 최승호 시치미란 사냥매의 꼬리에 매어두는 인식표였다. 사냥매가 귀하고 비싸기에 남의 매..

시읽는기쁨 2012.07.02

인식의 힘 / 최승호

도마뱀의 짧은 다리가 날개 돋힌 도마뱀을 태어나게 한다 - 인식의 힘 / 최승호 '절망한 자는 대담해지는 법이다'라는 니체의 말이 부제로 달린 짧은 경구 같은 시다. 그러나 시의 느낌이 매우 강렬하다. 날개 돋힌 도마뱀은 중생대의익룡을 가리키는 것 같다. 다리가 짧았던 도마뱀은 날쌔고 힘센 공룡에게 쫓기며 대책 없이 무수히 절벽을 뛰어내렸을 것이다. 그런 수천 만 년의 절망이 날개를 돋아나게 했다. 그리고 새의 시조가 되었다. 그런 점에서 절망이야말로 새로운 도약과 혁명의 출발점이다. 만족한 돼지는 우리 밖의 세계를 꿈꾸지 않는다. 친구여, 절망을 두려워 말자. 절망과 도전이 아니었다면이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절망은 희망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시읽는기쁨 2009.03.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