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눈먼 자들의 도시

샌. 2005. 12. 18. 12:15

한 남자가 신호를 기다리는 차 안에서 아무런 이유 없이 눈이 먼다. 병원에 찾아가지만 그를 진료한 의사도 눈이 멀고, 눈 앞이 하얗게 변하는 백색실명증은 이렇게 도미노처럼 전 도시로 퍼져 나간다. 정부 당국은눈먼 사람들을 모아 수용소에 격리시킨다. 장님들만으로 살아야 하는 수용소 안은 식량 약탈이나 강간 등 인간의 어두운 본성이 드러나는 지옥으로 변한다. 힘 센 깡패 무리까지 생겨나 식량을 미끼로 금품을 착취하고 여자들을 성적 노리개로 삼는다. 그 와중에 오직 한 사람, 눈이 멀지 않은 의사 아내가 있다. 남편을 돌보기 위해눈이 먼 것으로 위장하고들어와서 이 모든 현상들을 지켜보며 눈먼 사람들을 위해 희생을 아끼지 않는다. 결국 수용소를 탈출하게 되는데 바깥 세상 또한 마찬가지로 변해 있었다. 모든 사람들의 눈이 멀었고 거리는 시체들과 먹을거리를 찾아 배회하는 사람들, 오물로 썩은 냄새가 진동하는 지옥이었다. 의사의 아내는 수용소의 같은 방에 있었던 몇 명을 데리고 함께 생존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녀는 이기주의와 폭력이 난무하는 혼란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으며 다른 사람들을 위해 봉사를한다. 비록 작은 그룹이지만 그들은 따스한 인간미와 연대 의식을 느끼며 지내는데,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차례차례 눈이 떠지게 된다.

이번에 무척 재미있게 읽은 주제 사라마구가 쓴 '눈먼 자들의 도시'라는 소설의 줄거리다.

책을 손에 들면 놓기가 어려울 정도로 독자를 빨아들이는 힘이 있는 소설이다. 그렇다고 가벼운 소설은 아니고 인간 본성이 무엇이냐에 대한 의문을 내내가지게 하는 묵직한 책이다. 오랜만에 만난 좋은 소설이었다.

눈먼 자들이 수용된 수용소는 곧 우리가 사는 세상에 다름 아님을 눈치채게 된다. 책을 읽다 보면 지금의 우리 역시 눈먼 사람들이 아닌가 하는 자성에 이르게 된다. 돈에, 권력에, 명예에눈 멀어 정말 봐야 할 것은 못 보고 있는지 모른다.

단순한 시력의 상실이 이렇게 엄청난 재앙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사실이 또한 놀랍기만 하다. 보지 못한다는 것은 단순히 볼 수 없다는 뜻이 아니라 모든 것을 잃는다는 뜻이다. 내 것이라고 믿고 있는 모든 것이 한 순간에 우리 곁을 떠난다. 인간성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남는 것은 야만적인 폭력, 윤리의 마비, 상상할 수 없는 만행 등 인간 본성에 내재된 어두면 면의 등장이다.

그러나 이 소설이 단순하게 인간성의 부정적인 측면을 고발하는 것만은 아니다. 지옥 같은 수용소 안에서도 서로 고통을 나누고 도와주며 악을 미워하는 인간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다. 결국 그런 연대 의식과 용기가수용소를 탈출하게 되고 결국은 모두의 눈이 떠지는 결말로 진행되는 것이다.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이유는 검은 색안경을 썼던 여자가 한 다음과 말로분명해진다. "우리 내부에는 이름이 없는 뭔가가 있어요. 그 뭔가가 바로 우리예요."

이 소설에서 중심 인물은 아무래도실명하지 않은의사 아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녀의헌신적인 태도는 더러운 현실 가운데서 하나의 따스한 불빛이 된다. 소설은 사람들이 왜 실명하게 되었는지, 그녀만 왜그 병에 걸리지 않았는지, 또 어떻게 사람들이 시력을 회복하게 되는지에 대한 이유는 전혀 말하지 않는다.

의사 아내에게는 아메리카적 영웅주의는 없다. 병의 원인을 캐거나, 전세계를 구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신이 속한 열 명도 안되는 소수 멤버들을 돌보고 감싸안는것이다. 거기서 다시 싹 트는 따스한 인간애는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사라마구가 이 소설에서 말하려는 것은 마지막 부분에서 의사 아내의 입을 통해 한 이것일지 모른다.

"나는 우리가 눈이 멀었다가 다시 보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나는 우리가 처음부터 눈이 멀었고, 지금도 눈이 멀었다고 생각해요. 볼 수는 있지만 보지 않는 눈먼 사람들이라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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