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슬로 라이프(2)

샌. 2005. 12. 21. 12:57

<GDP> - 선과 악을 구별하지 못하는 지출 총액일 뿐.


현재와 같은 국민경제 계산법으로는 국가의 광물 자원이 고갈되고 산림이 소멸되며, 토양이 유실되고 수질이 오염된다. 또한 야생 생물과 물고기가 멸종에 처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자원이 소멸되더라도 소득 통계에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하니 소득은 결국 겉보기의 이익에 불과한 것으로, 진정한 국가의 부는 잃게 되는 것이다.


<슬로 머니> - 왜곡된 경제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또 하나의 돈’이 필요하다.


본래 지역 공동체에서는 화폐 경제와는 전혀 다른 이론이 기반이 된 경제활동이 활발했는데, 그 대부분은 이미 화폐 경제 안에서 와해되거나 공동화되고 말았다. 지금 세계의 여러 다양한 지역에서 나타나고 있는 지역 통화는 바로 이러한 영역의 재활성화를 꾀한 시도라 할 수 있다.


<개발> - 봉오리를 억지로 꽃피우고 아이를 빨리 어른으로 만드는 것이 개발이라면?


‘개발’이라는 이름의 돌이킬 수 없는 파괴로 인해 생명의 존속 그 자체가 위기에 이르러, 우리는 근본적인 재검토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은 단순히 환경 파괴형 프로젝트를 재검토한다는 의미에 머물지 않고, 이러한 프로젝트를 낳아온 ‘개발’이라는 개념과 사고의 틀 자체를 재검토하는 일이다.


<새로운 빈곤> - 오늘날의 빈곤은 풍요로움의 환상이 빚어낸 병.


우리는 물질의 풍요를 누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희소성을 둘러싼 정신없이 빠른 경쟁 세계의 아득한 심연 속에서 허덕이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리고 그 삶의 방식이 전 세계의 빈곤을 한층 더 폭력적인 것으로 이어나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가 바라는 풍요로움이 과연 이런 것이었을까? 다시 한번 풍요로움이라는 말에 대해 정의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아마도 풍요로움은 안정된 생태계와 자족적인 공동체를 토대로 한, 느리고 성숙한 삶 속에 있을 것이다.


<지구 온난화 - 멸종> - 경제 시간이 생태계의 시간을 앞질러가다가 생긴 이상 현상.


3천만 종으로 추정되는 지구에 사는 다양한 종의 생물들은 40억 년에 걸쳐 서서히 만들어져 온 것이다. 오늘날 인류가 만들어 낸 이 융성한 문화는 모두 이 위대한 선물 덕분이다. 그것들을 지금 우리들은 눈 뜨고 잃어버리려 한다.

‘느림’이라는 화두는 바로 이러한 어두운 전망 속에서 태어난 작은 희망이라는 사실을 기억해 두어야 하지 않을까?


<생명 지역> - 내 발밑의 땅이 살아있음을 느껴 본 적이 있는가?


생명 지역주의는 ‘다시 거주하기’(reinhabitation)를 제창하고 있다. 즉, 다시 한번 인간과 지역 간의 유기적이고도 온기 넘치는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 그곳에서 ‘사는 일’을 재학습하자는 것이다. 그 어떤 것도 같은 게 없는 독특한 지형, 토양, 물의 흐름, 햇빛, 바람, 습도와 미생물에서부터 동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생명체가 공존하는 공동체 안에서, 다시 한번 따뜻한 피가 흐르는 몸과 마음을 지닌 하나의 생명으로서의 멤버십을 요구받고 있는 것이다. ‘다시 거주하기’란, 그렇게 유구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자라나온 앎(slow knowledge)과 기술(slow art)의 프로세스다. 그것은 더불어서 우리가 잃어버린 먼 과거의 문화적 기억들에 대한 환기를 의미하는 일이기도 하다.


<슬로 워터> - 우리는 지구의 물을 빌려 쓰고 있을 뿐.


우리들은 지금 중요한 기로에 서 있다. 지구를 둘러싼 거대한 물 순환의 고리와 그 유장한 시간에 제대로 순응하는 삶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경제, 군사, 과학기술의 힘으로 확보되어 수송되는 페트병 속의 시간에 자신들의 생명을 맡길 것인가. ‘슬로 워터’와 ‘패스트 워터’, 그것은 단순히 물리적인 차이의 문제는 아니다. 바로 우리들의 정체성을 결정짓는 정신적이고도 문화적이며 영적인 구별인 것이다.


<흙> - 흙과 오랜 세월 사귀어 온 작물들로부터 그 태평스러운 사귐을 배우자.


우리는 지구상의 생명체들이 각각의 고유한 시간을 살고 있다는 생각으로 돌아가야 한다. 작물을 기르기 위해서는 그 작물의 시간을 이해해야 한다. 흙과 오랜 세월에 걸쳐 사귀어 온 작물들로부터 우리는 그 유장하고도 온화한 사귐을 겸허히 배워야만 한다.


<스몰> - 적당하고 적합한 것이 아름답다.


‘더 빠르게, 더 많이’만을 외치며 대량 생산에 봉사하는 거대 기술이 아니라 마하트마 간디가 말하는 대중에 의한 생산에 봉사할 수 있는 민주적인 기술이 필요하다.

“나는 기술 발전에 새로운 방향을 부여하여 그 기술이 이제 인간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그것은 자그마한 존재의 키 높이에 맞춘 방향이기도 하다. 작은 것이야말로 멋진 것이다.”


<슬로 타운> - 속도를 늦추면 눈앞의 풍경이 달라 보인다.


능률주의, 효율주의, 합리주의, 경제성이라는 관점에서는 진정한 정신 활동이 생겨나지 못한다. 우리 사회는 속도를 늦추어야 할 필요가 있다. 달리고 있는 사람은 걷도록 한다. 걷고 있는 사람은 잠시 멈춰 선다. 멈춰 서 있는 사람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보자. 그러면 먼 발치에 핀 꽃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눈에 들어온다.


<있는 것 찾기> - 없는 것 애달파하는 대신 있는 것을 찾자.


‘아루케차노(아아, 여기 있었구나!)’라는 말은 멀리 있는 것만을 바라보던 사람이 문득 자신의 발밑에서 가치 있는 것을 재발견했을 때의 놀라움과 기쁨을 표현하고 있는 말이다. 그것은 또한 지금 도호쿠 지방의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가치관의 전환을 표현한 말이기도 하다.


<원주민 달력> - 자연의 시간에 인간의 삶을 순응시키자.


벵골 만 동부의 안다만 제도의 숲속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향기의 달력’이란 것이 있어서 꽃들이나 나무들의 냄새를 통해 시간을 나타낸다고 한다.


<유전자 조작 - 딥 에콜로지> - 인간만을 위해 존재하는 생물은 지구 어디에도 없다.


딥 에콜로지(deep ecology)는 노르웨이의 철학자 아르네 네스가 자신의 환경 철학에 붙인 이름이다. 딥 에콜로지는 인류는 특별하지도 않고 유달리 빼어난 종도 아니며, 다양한 종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는 점을 자각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제까지와 같이 자연계에 대해 특별 대우만을 요구해 온 오만한 태도를 버리고, 지구에게 지워온 막대한 부담을 조금씩이라도 줄여나가야 한다. 어떤 생물이든 이 세계에서 살아나갈 권리가 있다. 그들이 서로 얽히고 서로 의지함으로써 서로를 지탱하고 있다.

사람 또한 그 전체로부터 따로 떼어낼 수 없는 일부다. 사람과 다른 종 사이에는 유대 관계가 있고, 밀접한 커뮤니케이션이 성립되어 있다. 이러한 생각을 전통적인 인도 철학에서는 ‘나는 바로 당신입니다’라고 표현한다.


<빠빠라기> - 우리는 쓰고 남을 만큼의 충분한 시간을 이미 가지고 있는데....


우리는 저 불쌍하고 정신이 혼란스러운 빠빠라기들이 광란에서 벗어나 시간을 되찾을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그들이 갖고 있는 둥근 시간 기계를 깨부수고, 인간이 필요로 하는 시간보다 훨씬 많은 시간이 해가 뜰 때부터 질 때까지 있다는 것을 알려 주어야 한다.


<움직인다 - 머문다> -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함께 사는 일은 점점 더 멀어진다.


우리들의 시대는 ‘움직이는 일’에 매혹되어 있다. 그리고 더 빨리 움직이는 것만을 생각한다. 고도의 기동성이 마치 성공의 징표라도 되는 듯하다. 더 빨리 도착하고, 더 빨리 떠나는 일에 노력을 집중하고 있는 사이, 우리는 ‘머무는 일’의 가치를 잃어 버렸다. 우리들이 지금 느끼고 있는 삶의 어려움들은 아마도 이러한 문제들과 깊은 연관이 있을 것이다.


<인디언 타임> - 중요한 건 시계가 아니라 상황과 형편에 따른 배려다.


유럽인들이 들어온 이후로 우리들은 언제나 재촉당해 왔다. 무엇을 위해 서둘러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우리들을 향해 그들은 ‘그렇게만 하면 너희들은 모두 풍요로워질 수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나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자아, 보라. 그토록 풍요로웠던 바다는 백인들이 바닥까지 훑어가 버린 결과 저렇게 황폐해지고 말았다. 그리고 우리들 자신마저도.


<신체 시간> - 왜 그렇게들 서두르지? 그래 봐야 빨리 죽는 것밖에 더 없는데...


신체 자체는 고대로부터 변하지 않은 시간을 살고 있지만, 사회적 존재로서의 생활 속도는 이토록 빨라져 있다. 이러한 간극 속에 현대사회의 위기가 집약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우리의 점점 더 빨라지는 사회생활은 물과 공기를 더욱 오염시키고, 오존층에 구멍을 내고, 지구 온난화 현상을 가속시키고, 생태계를 파괴하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외적인 자연 환경의 악화는 말할 것도 없고, 예전의 느린 시간을 살고자 하는 자신 또한, 질주하는 사회적 시간에 짓눌려 질식해 가고 있는 것이다. 느림의 회복, 그것은 우리들 자신의 생존과도 직결된 문제다.


<엘리펀티즘> - 멋지다, 코끼리! 자기도 살고 생태계도 살린다.


동물 생태학은 온대 우림의 곰, 열대 우림의 나무늘보도 코끼리들처럼 자신들이 살아가야 하는 생태계를 지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음을 밝혀냈다. 엘리펀티즘이란 오랜 진화의 역사 속에서 길러져 온 코끼리의 지혜를 빌리면서, 생태계라는 생명 커뮤니케이션의 한 구성원으로 후세에 온 우리 호모 사피엔스가 여기에 어울리는 느긋하고 온화한 삶의 방식을 다시 배워 나가자고 하는 호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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