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슬로 라이프(4)

샌. 2005. 12. 28. 09:08

<친환경 주택> - 땅에서 나고 땅으로 돌아가는 인생을 닮은 집.


슬로 하우스(slow house) 개념으로 요사이 주목받는 것이 스트로베일 하우스(straw-bale house)다. 이 집은 짚으로 만든 블록을 쌓아서 짓는다. 스트로베일 하우스는 최근 몇 년 사이 북미나 호주 등지에서 궁극의 친환경 주택으로 불리며 크게 각광받고 있다. 가장 큰 특징은 발군의 단열성이다.


<잡곡> - 맛도 좋고, 영양도 좋고, 환경에도 좋다는데....


잡(雜)이야말로 21세기의 중요한 키워드라는 게 나의 생각이다. 잡초, 잡목림, 잡곡, 잡종.... 이 모든 것들은 앞으로의 1차산업에서 재인식되어야 할 말들이다. 특히 미래의 음식문화에서는 잡곡을 빼 놓고 이야기하기 어려울 것이다.


<육식> - 먹어야 한다면 줄이기라도 하자.


육식 예찬의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 전통적인 음식 문화를 되찾는 일은 식량 자급률을 상승시킬 뿐만 아니라 건강에도 좋다는 점에 대부분의 과학자들과 전문가들이 일치된 견해를 보이고 있다. 레스터 브라운은 불안정하게 변해 가는 세계를 안정화시키는 방법으로, 선진국의 잘 사는 사람들이 ‘먹이 사슬의 더 낮은 레벨로 내려갈 것’을 제안하면서, 그것이 바로 ‘자기 자신의 건강뿐 아니라 지구의 건강을 개선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슬로 비즈니스> - 바쁘지 않아도, 빠르지 않아도 잘 팔린다.


본래 비즈니스라는 말 자체가 busy-ness이니 ‘바쁨’은 태생적인 속성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러한 ‘상식’에 의문을 제기하는 기업이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으며, 그 저변 또한 차근차근 넓어지고 있다.


<뺄셈의 발상> - 덧셈은 시시하다. 뺄셈은 짜릿하다.


더글라스 러미스는 ‘덧셈의 진부’ 대신에 ‘뺄셈의 진보’를 제창하고 있다. 러미스는 물건을 조금씩 줄여가면서 그러한 물건이 없더라도 태연한 사람이 되어 보는 게 어떠냐고 묻는다. 텔레비전을 켜고 문화를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집에서 스스로 문화를 창조하자. 즉, 문화의 본래 뜻인 스스로 사는 것을 즐기는 능력을 되찾자는 것이다.


<컬쳐 크리에이티브> - 다른 삶을 원하는 사람들은 생각보다 많다.


다가올 시대의 모습을 시사하는 말이 있다. 컬쳐 크리에이티브(Cultural Creatives), 직역하면 문화를 창조하는 사람들, 나는 이들을 CC라 부르고 있다.

CC의 세계관에는 다음과 같은 특징들이 있다. 사회적인 지위보다 자기 실현, 외부로부터의 평가보다 내면적인 성장, 금전보다 시간, 물질적인 만족보다 창조적이고 정신적인 경험, 결과보다 과정의 중시, 그리고 환경문제나 커뮤니티에 대한 강한 관심과 관여.

반면 CC가 거부 반응을 보이는 것에는 기존 종교의 편협성, 상업적 쾌락주의, 경제성장 지상주의, 대기업의 탐욕이 불러오는 생태계 파괴 등이 있다. 즉, 이제까지의 ‘성장 중심’의 가치관에서 ‘성숙 중심’의 가치관으로 전환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지역 통화> - 보이는 돈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돈.


존 레논이 ‘이매진’에서 노래했던 것처럼, 그러한 경제를 상상하는 힘을 우리는 먼저 몸으로 익혀야 한다. 지역 통화나 보완 통화, 대체 통화라 일컬어지는 ‘또 하나의 돈’은 그러한 상상력을 우리 안에 키우기 위해 필요한 도구라 할 수 있다.


<에코 투어리즘> - 여행지의 시간을 나의 시간으로 파괴하지 말자.


짜맞춘 일정에 따라 여기저기 쫓아다니다가 결국 지쳐서 돌아가는 ‘패스트 투어리즘’에 질려버린 사람들이 늘고 있다. 나무 밑에 앉아서 멍하니 섬의 바람을 맞아보는 시간을 어떨까?


<페어 트레이드> - 남과 북이, 시골과 도시가, 자연과 인간의 공정한 무역.


생산자와 소비자, 남반구와 북반구, 가난한 나라와 부유한 나라, 시골과 도시, 자연과 인간 사이의 ‘공정함’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인간의 형편에 따라 생태계의 존속을 위협하는 교역은, 설령 그것이 생산자와의 합의 아래 행해진 것이라 해도 공정한 것이 아니다.


<슬로 카페> - 차 마시고 수다 떨며 세상에 느리게 딴지 걸기.


<대체 의학> - 내 안에 있는 생명의 텃밭은 내가 가꾸어야 한다.


대체 의학이란 현대 의학의 신체관을 대신하는 통합적인 신체관에 기초하여 폭 넓은 의료를 모색하는 움직임이다. ‘정원은 나, 나는 정원’이라는 말은 이러한 대체 의학의 관점을 잘 표현하는 말이다.


<슬로 섹스 - 슬로 보디> - 그 넓고도 깊은 몸의 쾌락을 어떻게 되찾을 수 있을까?


느슨함이나 흔들림, 틈새 같은 것을 회복하여 타인의 몸과 기분 좋은 소통과 접촉을 되찾게 된 몸을 ‘슬로 보디(slow body)’로 부르고 싶다. 그것은 우선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사랑이라는 것의 본질적인 ‘느림’을 생각하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지금 여기 - 친밀감> - 익숙한 오늘 속에서 무한한 즐거움을 찾자.


위대한 모험이란, 같은 얼굴 속에서 날마다 새로운 것을 발견해 내는 일이다.


<빈둥거리기> - 경쟁 바깥에 있는 참된 자신의 거처를 발견해 내자.


우리가 사는 사회는 지금 경쟁주의나 생산성주의, 우생 사상 등에 크게 경도된 듯이 보인다. ‘빈둥거림주의’란 바로 이런 치우침에 대한 일종의 경종이다. 그러나 게우름 피우기를 장려하자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경쟁의 바깥에 있는 참된 자신의 거처를 발견하는 일이다. 즉, 생산성의 가치로부터 벗어나 있는 자기 자신을 재발견하는 일인 것이다.


<쉰다> - 목적의 세계로부터 벗어나기.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것.


친환경과 생태는 기술 용어가 아니다. 그것은 영혼 회복을 위한 말이며, 자신의 인생에 신성을 회복하는 일, 그리고 영혼을 자유롭게 뛰놀게 하는 일이다. 안식일에 촛불을 밝히자. 우리의 혁명은 거기서부터 시작되지 않겠는가.


<촛불> - 가끔씩은 어둠을 아름답게 되찾아 보자.


전기를 끄고 달을 보고 별을 보자. 그저 어둠 속에서 잠자코 있는 사람, 서로 사랑하는 사람이 되자. 촛불의 불꽃은 어둠을 부정하는 대신 오히려 그것을 일으켜 세워 준다.


<나무늘보> - 우리가 나무늘보에게서 배워야 할 몇 가지 것들.


‘나무늘보다움’이란 대체 무엇일까? 움직임이 느린 것은 근육이 적기 때문인데, 그것은 저에너지로 살기 위한 지혜다. 나무늘보는 진화의 실패작이 아니라, 오히려 열대우림이라는 환경에서 훌륭하게 적응하고 번성한 좋은 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포유류들이 ‘더 빠르고 더 크고 더 강하게’를 외치며 세찬 생존 경쟁과 영고성쇠의 역사를 거듭하는 것을 곁눈으로 지켜보며, 나무늘보는 높다란 나무 위에서 유유자적한 모습으로 저에너지, 순환형, 공생, 비폭력, 평화의 라이프스타일을 고수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렇게 보면 나무늘보의 삶의 방식이야말로 21세기 인류 생존을 위해 도움이 될 만한 힌트들로 가득하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나무늘보는 영어로 sloth이다. 이 동물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느긋하고 여유 있는 사고방식, 삶이 방식을 우리는 ‘슬로소피(pslothophy)’라 부르기로 했다. 그것을 연구하고, 실천하려는 나와 여러분은 바로 ‘슬로소퍼(pslothopher)'인 셈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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