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에버렛 루에스

샌. 2006. 1. 8. 18:56

에버렛 루에스(Everett Ruess)는 1914년 미국 오클랜드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릴 때부터 그림을 그리고 시를 쓰는 재주가 뛰어났는데, 아버지의 권유로 대학을 들어가지만 거짓으로 가득 찬 인간 세상에 환멸만을 느낍니다.

‘영원한 자유의 영혼이 되어 세상을 떠돌고 싶었던 내가 감옥에 갇힌 신세가 되었다. 철창이 없는 감옥, 나는 이곳에서 희망을 찾을 수 없다. 주위엔 온통 길들여진 사람들뿐이다. 거짓말이 지배하는 세상이다. 그러면서도 모두가 뻔뻔스런 얼굴이다. 어쩌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자체를 깨닫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도시가 싫다. 거짓말이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

그는 문명 세계 대신에 자연의 품을 택합니다. 자연 속에서의 여행을 통해 삶의 의미를 찾아가던 그는 결국 1934년 스무 살의 나이에 인적 드문 쓸쓸한 사막에서 사라져 버렸습니다. 또 하나의 아웃사이더였던 그가 남긴 일기가 ‘에버렛 루에스의 아름다운 날들’이라는 제목으로 우리나라에도 책으로 나와 있습니다.


에버렛으로 하여금 집을 떠나게 만든 것은 이미 우리들에게는 퇴화되어 없어진 어떤 감수성이 아닐까요? 굳이 이름 붙이자면 시적 감수성, 아니면 생태적 감수성이라고 해야 할까요, 우리들은 이미 거짓말쟁이인지도 위선자인지도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그런 감성의 안테나는 뽑혀져 버렸는지도 모릅니다. 현대인은 고향을 잃어버린 것보다도, 고향을 잃어버렸다는 사실 자체를 망각해 버린데 있다고 어느 분은 슬프게 탄식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에버렛을 사회부적응자라고 부를지 모릅니다. 요사이 젊은이들에게서는 에버렛 같은 낭만과 열정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들은 돈과 명예를 좇아 영악스럽게 몰려다닐 뿐입니다. 세상이 그렇게 만들고 있지만,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젊음에도 책임이 있습니다.

중고등학교는 이미 대입을 위한 학원이 되었고, 대학 또한 고시나 취업 학원에 다름없어 보입니다. 옛날 대학 시절의 꿈과 낭만은 요즘 대학생들에게서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취업 준비를 하고 있는 집의 큰 아이를 보면 안쓰럽기도 하고 어떨 때는 화도 납니다. 기업은 자신들이 인재를 키울 생각은 하지 않고 처음부터 완전히 준비된 학생을 뽑으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학생들은 자격증 따고 토익 점수 높이려 정신이 없습니다. 인문학적 소양이나 비판적 지성을 키우는 교양 교육은 이미 대학에서 사라졌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기업을 위한 요원 양성소 같습니다.


행복이란 단순한 현실 만족이 아닙니다. 비판이나 자기 부정 없는 현실 만족은 배부른 돼지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젊음이 아름다운 것은 기성의 가치관을 뒤집을 수 있는 신선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넓고 편한 길을 마다하고 세상이 가리키지 않는 길을 바라보는 젊음이야말로 아름답습니다. 요사이는 그런 젊은이를 만나는 것이 점점 어려워집니다. 도리어 어른보다 더 영악스러운 젊은이들이 세상에는 넘쳐 납니다.


에버렛 루에스는 스무 살 젊은 나이에 사막으로 들어간 뒤 행방불명되었습니다.

이 편지는 그가 세상으로 보낸 마지막 편지입니다.


‘며칠 동안 모르몬교도의 집에서 보냈어. 그들의 단란한 삶에 흠뻑 빠져서 그들과 같이 교회도 가고 춤도 추었지. 좀더 머물렀다면 아마 십중팔구 모르몬교도의 아가씨와 사랑에 빠졌을 거야. 하지만 나는 혀를 깨물면서 그 집을 떠났어. 아직은 사랑을 나눌 때가 아닌 것 같아서. 내가 세상 사람들과 너무도 다른 삶을 사는 것일까?

언제 문명의 땅으로 다시 들어갈는지..... 글쎄 가까운 시일 내는 아닐 거야. 아직 야생의 땅을 향한 사랑이 식지 않았으니까. 정처 없이 떠도는 삶, 아름다운 자연을 찾아다니는 삶이 아직은 즐거워. 도시의 자동차보다 당나귀의 안장이 좋고, 지붕보다 별들이 반짝이는 하늘이 좋고, 포장된 도로보다 미지의 땅으로 이어지는 흐릿한 길이 좋아. 도시에서는 이유 없이 짜증이 나고 모든 게 불안스러웠는데, 야생이 땅에서는 특별한 이유 없이 깊은 평화를 느껴.

형도 아버지처럼 이곳을 떠나지 않는 나를 사회적 책임감이 없다고 나무라지는 않겠지? 물론 형의 지적대로 지적인 공감대를 나눌 친구는 없을지도 몰라. 솔직히 그런 친구가 그립기도 하고. 하지만 이곳에는 나와 소중한 것들을 함께 공유할 친구들이 있어. 하긴 아름다운 자연에 둘러싸여 있는 것만으로도 나는 더 이상 바랄 게 없어. 나에게 끝없는 환희를 안겨주는 것들, 나바호 인디언이 정성스레 짜준 안장 담요와, 손목에서 반짝이는 팔찌, 이런 것만으로도 나는 행복해.

며칠 전 붉은 바위산과 모래 사막을 여행했어. 마치 내 집을 찾아 돌아가는 기분이었지. 그 여행길에 나처럼 사막을 방랑하는 나바호 인디언 부부를 만났어. 우리는 양고기를 구워먹고 블랙커피를 마시며 밤새 이야기를 나누었지. 그리고 같이 노래도 불렀어.

형, 나바호 인디언의 노래에는 이 세상의 어떤 종족도 흉내낼 수 없는 신비로움이 배어 있어. 나도 이제는 나바호 노래를 조금은 따라할 수 있고, 그들과 약간의 의사소통도 할 수 있어. 나에겐 프랑스어, 독일어, 스페인어를 하는 것보다 그들의 언어를 배운 것이 더욱 뜻깊은 일이야.

지난 이틀 동안은 사람을 만나지 못했어. 가끔씩 하늘을 가로지르는 새와 다람쥐를 제외하고는 야생 동물조차 만날 수 없었지. 게다가 어제 하루는 실패한 여행이었어. 협곡을 따라 걸었지만 막다른 길을 만나 결국 출발한 곳으로 되돌아 올 수밖에 없었거든.

형, 올해는 풍요로운 결실의 해인 것 같아. 내가 하고 싶었던 것을 충실히 해냈다는 기분이야. 참, 앞으로 한두 달 정도는 편지를 못할 것 같아. 콜로라도 강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갈 예정이니까. 한동안 아무도 살지 않는 곳에서 세월을 죽여볼 거야.


1934. 11. 11

형을 사랑하는 에버렛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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