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석헌 저작집 9권에는 1975년부터 1980년까지 '씨알의 소리'에 실렸던 선생의 글이 모여 있다. 그중에서 재미있었던 내용 중 하나는 예수쟁이를 선생 나름대로 분류한 것이다. 종파에 따라 기독교를 가톨릭, 개신교,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등으로 나누지만 실질상으로는 별 차이가 없고, 그들이 생각하는 것과 생활하는 것에 따라 분류한다면 다르게 나누어야 한다는 것이다. 선생의 분류는 다음과 같다.
1. 천당족
2. 성신족; 사실대로 말한다면 '무당족'이라고 해야 한다.
3. 은혜족; 은혜가 아니라 싸구려 안일주의다.
4. 향원족; 공자 이르시기를, 향원(鄕原)은 덕(德)을 어지럽히는 자들이라고 했다. 맹자는 향원을 풀이하기를, "비난하려고 해도 어디 꼬집을 데가 없고, 찌르려 해도 찌를 곳이 없어, 시속에 같이하고 더러운 세상에 맞추어가면서, 있을 때는 참되고 믿을 만한 듯하고, 행할 때는 깨끗하고 맑은 듯하여, 모든 사람이 다 좋아하고 제 스스로도 그렇다고 하는데, 요순(堯舜)의 길에는 들어가게 할 수 없는 자들이다" 했다. 예수쟁이 안에도 꼭 이런 종류의 족들이, 특히 지식인 지도층이 많이 있다. 아주 경건, 단정, 친절한 듯한데 예수의 길은 아니다. 말하자면 짐승 편에도 새 편에도 잘 어울려지내는 박쥐 같은 영리한 족속들이다.
5. 굴원(屈原)족; '세상이 다 흐렸는데 우리 홀로 맑고, 모든 사람이 취했는데 우리 홀로 정신이 똑똑하다'는 자들이다. 이들은 향원과 다르다. 참되려고 노력하지만 다만 갇혀 있다. 제가 내뱉은 분비물이 굳어져서 껍질이 되어 그것을 터트리고 나올 용기를 내지 못하는 자들이다. 트이지 못했다. 역사의 흐름을 무시했다가 해면 바윗등에 외롭게 남은 소라다.
왜 분명히 말을 못합니까? 이른바 지식인이 자기를 팔아먹기 때문이라고. 옛날 선비 그러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문명한 미국, 독일, 프랑스, 영국서 공부해서 그렇습니까? 해방 후 이 사회를 결딴낸 것이 그 선비들 아닙니까? 옛날 선비는 스스로 지키는 것이 있기 때문에 임금이 불러도 아니 가는 기개가 있었습니다. 선비라고 다 성인, 군자, 현인은 아닙니다. 그러나 선비는 지키는 제 것이 있습니다. 그 제 것이 무엇입니까? 제 것이 아니라 우주에 꿰뚫린 공도(公道)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러도 아니 가는 것은 스스로 제가 잘났노라 교만해서가 아니라 그 도(道)가 귀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내 얻어들은 것이 도인데 내가 어찌 감히 한때의 부귀나 이름 때문에 이 몸을 가지고 그렇게 비겁하게 할 수 있느냐 하는 생각에서였습니다. 옛날 선비에게는 학문은 그것을 위해 살고 그것을 위해 죽는 목적이었습니다. 오늘날 학자가 만일 제 학문에 대해 그만한 책임감이 있다면 그렇게 더럽게는 아니했을 것입니다. (1975/10)
공자는 '인적무적어천하'(仁者無敵於天下)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큰 말씀입니다. 이것은 영원히 설 말씀입니다. 인자(仁者)는 왜 천하에 대적이 없습니까? 강하므로 모든 대적을 정복해서 대적이 없다는 것 아닙니다. 인자는 누구를 대적으로 여기지 않기 때문에 대적이 없습니다. 인자는 때로 싸움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지배하기 위해 싸우는 것도 아니요 미워해서 싸우는 것도 아닙니다. 사랑하므로 형제를 악의 세력에서 해방시켜 자유롭게 하기 위해 사랑으로 싸우는 싸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적이 없습니다. (1976/2)
생명은 무한한 것이기 때문에 여러 가지를 좋아합니다. 하나님은 하나지만 그에게 나가는 길은 천천만만입니다. 겨울 추위가 왔을 때 가지가지 생명은 가지가지 길로 거기에 대했습니다. 소나무처럼 갑옷을 입고 비늘잎을 가지는 놈도 있었지만 두더지처럼 땅속으로 들어간 놈도 있었습니다. 강한 놈이 잘한 것도 아니요 약한 놈이 잘못한 것도 아닙니다. 그 모든 것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보며 기쁨을 느끼고 불쌍히 여김을 느껴, 위로 위로 올라가는 한 뜻이 있을 뿐입니다. 만물은 눈이요 귀요 손이요 발입니다. 나서는 죽고 죽고는 또 나는 동안에, 그것을 그렇게 하시는 그 뜻을 보자는 것, 듣자는 것입니다. 그것을 만져보고, 거기 나가 그 밑에 같이 앉아보자는 것입니다. (1976/3)
영원의 골고다 위 나무에 달려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십니까?" 했던 사람아! 너는 누구냐? 너는 쭈그렁이는 아니지. 너무나 알이 들지 않았나. 그런데 왜 쭈그렁밤송이처럼 가시를 쓰고 우느냐. 그래, 못 든 알의 무거운 짐에 눌려 허덕이는 쭈그렁송이들을 불러, 한번 걸핏 봐주심으로 그 역사적 카르마를 대번에 벗겨준 다음 허공에 날려, 장차 오는 나라를 첩보대로 삼으려고 그랬던가. 오, 나를 오늘 당신 곁에 둡소서! (1976/10)
이때는 무슨 때입니까? 고민하는 때, 앓을 때입니다. 관세음보살처럼 세상의 소리를 보십시오. 그 끙끙 앓는 소리, 몸부림하고 쥐어뜯는 소리를 한눈에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4, 500년 동안 아노라고, 자연 정복했노라고, 장생불사하노라고, 우주의 비밀을 파헤치노라고 자랑하던 문명이 외아들 죽게 된 과부 모양으로 허둥지둥, 사형선고 받은 강도 모양으로 창황망조(蒼黃罔措), 몸둘 곳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것을 모르는 놈은 돈에 미쳤거나, 권력에 미쳤거나, 그렇지 않으면 사람 잡아먹고 피에 미쳤거나 하는 놈뿐일 것입니다. (1977/6)
우리는 말하기를 세상이 이렇게 악하고, 역사가 이렇게 그릇된 길에 빠져들고 있는데 왜 하나님이 가만 계시냐 하지만, 모르는 말입니다. 벌함까지 사랑으로 할 수밖에 없으신 하나님은 잘못한 인간이 스스로 자기를 벌하게 하기 위해, 스스로 자기를 벌함으로써 다시 옳음에 스스로 돌아올 수 있게 하기 위해, 지금 자기를 벌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스스로를 벌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 세상에 의로운 사람이 고난을 당하고 애매한 자연이 해를 입는 것이 곧 그것입니다.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모든 악한 것들을 당장 벌하여 시원히 해결해주기를 기다리는 한 우리는 아직 우리 잘못을 채 모른 것이고 하나님의 뜻을 진정으로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1077/6)
씨알은 예수를 배워야 합니다. 스스로 살아야 합니다. 속을 살면서 우주를 살아야 합니다. 무한히 새로 나기 위해 일체를 버려야 합니다. 누가 시켜야 하는 것은 참일 수가 없습니다. 불의와 싸워야 합니다. 불의를 하는 자가 미워서가 아니라, 그를 내 몸같이 사랑하기 때문에 싸우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민족복음화의 첫걸음은 "고난의 짐은 내가 질 터이니 복은 네가 받아라"에서 내디뎌질 것입니다. (1977/8)
북괴(北傀)란 말의 뜻이 무엇입니까? 꼭두각시란 말 아닙니까? 인격 인정 아니 하는 것입니다. 인격을 인정해주지도 않으면서 어떻게 하나 되기를 바랄 수 있습니까? 말로 한다손, 어찌 그것을 저쪽이 믿겠습니까? 통일을 하자면서 꼭두각시 되기를 원한단 말입니까? 나는 이날까지 한 번도 북괴란 말 써본 일 없습니다. 이후도 절대 아니 쓸 것입니다. 북괴란 말은 정치적 말입니다. 정치적 말은 참이 아니고 어떤 정치적 목적을 위해서 하는 말입니다. 정치한다는 지배주의자들은 그러고 싶을지 모르나, 역사를 영원히 메고 나가는 씨알은 그럴 수 없습니다. 나는 정치인들처럼 무엇을 강요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확신을 여러분 앞에 내놓습니다. 북괴란 말이 우리 입 속에, 마음속에 있어서는 아니 됩니다. 단연 물리쳐야 합니다. (1978/6)
분명히 아십시오, 자연 아닌 것은 다 병입니다. 새삼 아는 듯, 새삼 친구인 듯, 새삼 애국인 듯, 새삼 역사 생각하는 듯 하는 것이 다 병의 씨요 약입니다. 자연보호라지만 자연이 뭔지 아십니까? 이것은 씨알 보고 하는 말 아닙니다. 새삼 씨알의 지도자라 학자라 봉사자라 하며 나서는 사람들 보고 하는 말입니다. 자연 중의 자연은 자유로운 인간 바탈입니다. 그것이 정말 자연, 스스로 그런, 첨부터 그런, 영원히 그럴 진리 자체입니다. 약이 사실은 (자연에 대하여는) 병입니다. 제도도 병입니다. 씨알 여러분, 속지 말고 속을 모으십시오! (1978/10)
현대국가는 예외없이 기업국가입니다. 기업의 목적은 다만 둘입니다. 하나는 사치고 하나는 전쟁입니다. 사치와 오락을 배격하여 간소한 생활 아니하고는 전쟁 없어질 수 없고, 전쟁이 있는 한 어떤 부류를 위해 노동력을 착취하는 일은 없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씨알 여러분, 남들이 하다 남은 부스러기의 사치품과 오락을 사려고 인격 노동력을 절대 팔지 마시오, 죽을 각오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씨알입니다. (1978/11)
80이 거의 다 된 오늘 와서야 "올해에는 복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의 의미를 알았습니다. 복을 줄 아무 능력도 없는 것들이 뭘 "복 많이 받으셔요" 합니까? 나는 받는 절을 감히 도로 드리지 않을 수는 없어 깍듯이 하기는 했습니다만 이때껏 한 번도 "복 많이 받으셔요" 소리는 감히 못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와서야 그 말을 알아들었습니다. "오늘부터는 서로 나쁜 마음 먹지 맙시다" 하는 뜻입니다. 나쁜 것이 무엇이야요? 닫는 것입니다. 본래 열린 하늘인데 제각기 마음을 닫고 보니 어둠뿐입니다. 그래서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면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본다"고 했습니다. 세계를 하나로 오고가는 큰 바닷물인데, 우리집 마당 도랑에 들어오면 더럽습니다. 본래 하나인 것을 갈라가지고 서로 닫고는 너 나 하기 때문에 고움 미움 슬픔 선 악이 생겼습니다. (1979/1)
씨알 여러분, 우리는 희망을 말하려 하지만 그전에 우선 현실에 눈을 뜨지 않으면 안 됩니다. 현실을 모르고서 그리는 희망은 하나의 꿈밖에 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툭하면 "꿈을 가져라!" 하지만 그 소리는 잘못 들었다가는 망하는 소리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잘살아보세, 잘살아보세!" 하지만 그것도 잘못된 말입니다. '잘'보다는 '바로'가 문제입니다. '잘'은 본능적으로 알지만 '바로'는 깊이 생각하고 힘써 배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 생각은 없이 잘살기만 하자는 말은 귀에 쏙 들어가긴 쉽지만, 사기 횡령 살인 강도하는 것들도 문제없이 동의할 줄 압니다. 덮어놓고 잘살아보자는 것은 마치 눈을 싸매주는 대로 내버려두고 북소리에 따라 빙글빙글 춤을 추며 신이 나서 돌아가는 어리석은 계집종과 마찬가지입니다. (1979/1)
눈이 어두운 것만이 장님이 아니요, 귀가 먹은 것만이 귀머거리가 아닙니다. 정치가 제도적으로 언론을 막아, 보고 들어야 할 것을 보고 듣지 못하게 하고, 보아선 안 되고 들어선 안 될 것만을 보고 듣게 하면 씨알 전체가 눈과 귀를 가진 채 장님, 귀머거리가 됩니다. 무엇이 보고 들을 것이고 무엇이 보고 들어선 안 되는 것일까요. 사실은 보고 들어야 하는 것이고, 조작은 보고 들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무엇이 사실이고 무엇이 조작인가요? 모든 사람이 스스로의 인격을 가지고 서로 협동하여 살자는 정신에서, 자연과 사회를 위해 마음껏 일하는 데서 나오는 결과가 사실입니다. 다스린다는 이름 아래 생산적인 일은 하지 않고 남이 일한 것을 뺏아다가 자기네의 안락한 생활 본위로 모든 것을 지배하려는 사람들이 자기네 하는 일을 합리화하기 위해 만들어내는 모든 제도의 선전과 설명과 보고가 조작입니다. (1979/1)
희망을 절망하는 사람만이 가집니다. 반석에 이르지 않고는 산 샘을 못 얻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희망이 있다 해서 웃고, 없다 해서 우는 사람, 한가한 사람입니다. 정말 살자는 마음이라면 현실을 보고 절망 아니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살려 애써보다가 팽개치고 종살이라도 하며 살아가보자 하는 놈, 산 놈이 아닙니다. 방항하다가 죽더라도 종살이는 못하겠다 하는 놈이 정말 산 놈이요, 산 놈이기 때문에 죽어도 삽니다. 산 생명에는 죽음이 없습니다. 희망은 그런 사람하고만 말할 수 있습니다. 생명 자체 안에 희망이 있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불멸의 생명을 믿어야만, 믿음 그 자체가 희망이요, 생명이란 말입니다. (1979/1)
씨알아, 너는 입이 있느냐? 있거든 주먹으로 네 가슴을 쳐보아라. 으악 소리가 나오느냐? 눈이 있느냐? 있거든 머리로 문지방을 받아보아라. 불꽃이 거기서 튀어나오느냐? 입은 먹기만 하잔 것 아니요, 눈은 보기만 하잔 것 아니다. 먹었거든 거기서 나오는 기운을 정의의 부르짖음으로 토해야 하는 것이요, 본 꼴이 마땅치 않거든 그 눈알을 분노의 불길로 내쏘아야 하는 것이다. (1979/3)
씨알 여러분, 누가 참 교육자입니까? 참 스승이 어디 있습니까? 씨알 내놓고 다른 데 있을 수 없습니다. 참 스승은 어디 있는 것이 아니고 각 사람의 혼 속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육은 절대 낙관입니다. 제 속에 있으니 찾아서 못 찾을 리 없습니다. 씨알은 맨사람입니다. 하늘에서 받은, 또 민족을 통해 받은 내 근본, 나를 가리울 만한 어떤 겉의 것도 가진 것 없는 것이 씨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좋은 교육자 찾으려거든 씨알에게로 가야 합니다. 도가 가깝다는 것은 이 뜻입니다. 제 속에 두었다 그 말입니다. (197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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