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타력

샌. 2013. 4. 2. 11:04

일본 불교 중 하나인 정토진종(淨土眞宗)을 처음 접한 건 10여 년 전 키요자와 만시가 쓴 <겨울부채>라는 소책자를 통해서였다. 불교지만 타력신앙을 강조하는 점에서 기독교 신앙과 닮은 데가 많아서 놀랐다. 예를 들면, 이런 구절 같은 것이다.


"사람은 무한자(無限者, The Infinite) 또는 절대자(絶對者, The Absolute)와 만남을 통해서만 든든한 토대 위에 설 수가 있다."


"인간을 초월하는 힘[他力]을 의존함으로써 얻게 되는 내적 평안이 신심(信心)이다."


"종교는 이 세상에서 착한 사람이 되기 위해 따라가야 하는 그런 길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 너머로 가서 닿는 길이다."


"나는 내 지력(知力)에 한계가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에 여래(如來)를 믿고 의지한다."


정토진종을 창시한 사람은 신란(親鸞, 1173~1262)이다. 그는 20년간 고행을 했으나 아무런 깨달음도 얻을 수 없었다. 그래서 얻은 결론이 '이행왕생(易行往生)' '타력본원(他力本願' 같은 사상이었다. 어려운 학문이나 힘든 수행은 필요 없다. 그저 한결같이 부처를 믿고 염불하라.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아미타불이 중생을 건지려 했으니 그분께 귀의해 염불하면 반드시 구원 받는다. 내가 의인이 아니라 오히려 죄인이기 때문에 구원이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다.

 

신란의 사상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기독교와 흡사하다. 몇몇 불교 용어를 기독교 용어로 대체하면 거의 같은 내용이다. 10여 년 전에 피정을 들어가서 <겨울부채>를 읽으며 기독교 신앙의 확신을 얻는데 도움을 받았던 경험이 있다. 진종은 일본색이 강한 편이지만 보편적 종교 원리가 담겨 있어 공감되는 바가 많다.


진종 신자인 이츠키 히로유키가 쓴 <타력>도 같은 내용의 책이다. 저자는 타력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타력(他力)이란 눈에 보이지 않는 나 이외의 뭔가 커다란 힘이 내 삶의 방식을 떠받치고 있다는 사고방식입니다. 나 이외의 타자가 나라는 존재를 떠받치고 있다고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바꿔 말하면 타력이란 눈에 보이지 않는 우주의 커다란 힘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커다란 에너지가 보이지 않는 바람처럼 흐르고 있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자기 혼자 힘으로 했다는 생각은 얕은 생각으로, 그 밖의 눈에 보이지 않는 커다란 힘이 내 운명과 관계되어 있습니다."


정토진종에서는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고 자력으로는 해탈이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어떤 면에서는 체념의 종교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남에게 의지하는 나약함은 아니다. 도리어 국가나 법, 관습, 제도, 고정관념 등에 의지하는 마음을 버릴 때 생겨나는 진정한 자력(自力)의 확신이 타력이다. 진종의 타력에는 그런 적극적인 의미가 들어 있다.


염불만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근저에는 염불을 통해서 나를 버리는 것, 자아를 초월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가톨릭이나 정교회에서도 짧은 기도문이나 명호를 반복함으로써 신과의 일치를 이룰 수 있다고 한다. 나무아미타불을 염송해서 무심(無心)의 경지에 이르는 것과 큰 차이가 없다. 기독교는 말할 나위도 없고 모든 종교는 타력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한다. 선불교도 예외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순전한 자력종교는 없다.


이 책은 100편의 짧은 에세이로 되어 있다. 나로서는 진종의 타력신앙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지만 삶에 지친 현대인을 위로하는 메시지도 들어 있다. 너무 아등바등하며 살 게 아니라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라고 한 발 물러선다면 마음이 훨씬 편안해질 것이다. "내 소관이 아니다!"라는 말 속에 인생의 지혜가 들어 있다. 나를 둘러싸고 흐르는 우주의 큰 힘을 인정할 때 인간은 겸허해지면서 세상 만물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사족으로 덧붙이자면, 이 책은 삼성 이건희 회장이 흥미롭게 읽었고 추천했던 도서이기도 하다. 작년 한국어판이 나오기 훨씬 전인 2000년에 한 잡지와 인터뷰하며 그분은 이렇게 말했다. "사람은 자기, 즉 자력(自力)을 버려야 삶이 더 풍요로워지고, 자신을 사랑하면서 남을 위해 봉사할 때 보람이 생긴다. 내가 기업을 경영하면서 늘 생각하는 상생(相生)의 철학과 같은 맥락이 아닐까 한다." 기업을 경영하면서 늘 생각한다는 상생의 철학, 제발 꼭 그렇게 실천해주셨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