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살이의꿈

중용의 노래

샌. 2011. 7. 15. 08:54

세상일은 중용이 최고라고 믿고 살았네.

그러나 이상하군,

이 ‘중용’은 씹으면 씹을수록 맛이 나네.

중용의 기쁨보다 더 한 것이 없네.

재미있다, 모든 것이 절반.

당황치 않고, 서두르지 않으니, 마음도 편하다.

천지는 넓은 것

도시와 시골 사이에 살며

산과 강 사이에 농토를 갖네.

알맞게 지식을 얻고

알맞은 지주가 되어

적당히 일하고 적당히 노네.

아랫것들에게도 적당히 대한다네.

집은 좋지도 않지만, 너무 누추하지도 않고

가꾼 것도 절반, 가꾸지 않은 것도 절반

입은 옷은 헌 옷도 아니고, 새 옷도 아니네.

먹는 것도 적당하네.

하인은 바보와 똑똑이의 중간,

아내의 머리도 알맞은 중간이고

그러고 보니 나는 반은 부처이고 반은 노자일세.

이 몸의 절반은 하늘로 돌아가고

나머지는 자식들에게 남기네.

자식의 일도 잊지는 않되

죽어서 염라대왕께 올릴 말씀,

이럴까 저럴까 생각도 절반.

술도 알맞게 취함이 좋고

꽃도 반쯤 핀 것이 가장 아름답네.

돛을 반쯤 올린 돛단배가 제일 안전하고

말고삐는 반 늦추고 반 당김이 제격일세.

재물이 지나치면 근심이 있고

가난하면 둔해지는 것이 세상의 이치라네.

인생은 달고도 쓴 것임을 깨닫고 보면

절반 맛이야말로 제격이라네.

 

이밀암(李密庵)의 ‘중용(中庸)의 노래’다. 안타깝게도 원문은 찾지 못했다. 중용은 동양철학이 말하는 최고 덕목이다. 중용적 삶이야말로 동양의 가장 이상적인 삶의 모델이다. 나도 어릴 때부터 중용이라는 말을 수없이 들으며 자랐다. 그러나 어떻게 사는 것이 중용적 삶이라 할 수 있는지 분명하게 떠오르진 않는다. 아무리 들어도 중용이라는 개념은 안개 속을 헤매는 듯 애매모호하다.

 

중용을 사전에서 찾아보니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이 도리에 맞는 것이 중(中)이며, 평상적이고 불변적인 것이 용(庸)이다’로 설명되어 있다. <중용>에 ‘喜怒哀樂之未發謂之中 發而皆中節謂之和’라는 구절이 있는데 ‘희로애락이 생기지 않은 상태를 중(中)이라 하고, 생겨났더라도 절도에 맞으면 화(和)라고 한다’라는 뜻이다. 희로애락이 생기지 않도록 하는 게 가장 좋겠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도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사는 균형 잡힌 삶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화(和), 또는 용(庸)이란 과하지 않아 평상시와 다름없음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중용의 삶이 양 극단을 피한 중간지대는 아니다. 도시와 시골 중간에 사는 걸 중용이라 할 수 없다. 장소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자리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밀암의 ‘중용의 노래’는 좀 유머러스한 면이 있다. 또 하나 중용에서 오해하기 쉬운 건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식의 적당주의가 아니라는 것이다. 중용은 자칫 주류의 가치관으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현실 비판을 잠재우기 위해 국가는 중용의 미덕을 높이 살 필요를 느낄 것이다. 자신의 이익이 아니면 침묵 내지 방조하는 걸 중용이라 할 수 없다. 중용에 앞서 정견(正見)은 필수다.

 

중용의 근본정신을 나는 ‘포용’에서 찾고 싶다. 중용은 양 극단의 중간자리가 아니라 양 극단을 품어 안은 마음자리다. 어느 쪽과도 충돌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것이 화(和), 즉 용(庸)의 정신이다. 화이부동(和而不同)도 같은 뜻이다. 자기 자리와 분수를 지키지만 어느 쪽과도 불화하지 않는다. 그런 삶의 태도가 중용이 아닐까. 말은 이렇게 하지만 중용을 이해하기는 역시 어렵다. 중용의 삶을 산다는 건 더욱 어려운 일이다. 공자도 이렇게 말했다. “천하국가도 고르게 다스릴 수 있고, 높은 벼슬도 사양할 수 있고, 하얀 칼날도 밟을 수 있지만, 중용만큼은 만만치 않다.”[天下國家可均也 爵祿可辭也 白刃可踏也 中庸不可能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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