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살이의꿈

어느 바보의 삶

샌. 2011. 7. 21. 22:56

윤구병 선생이 감동을 받은 이야기라며 소개한 걸 보았다. 실화라고 한다.

충청북도 어느 시골에 농부 한 분이 살았는데, 아주 성실하고 총명하였다. 이분은 1920년대에 야학에서 한글을 깨우쳤다. 해방이 되기까지 스무 해 남짓 걸핏하면 주재소에 끌려가 치도곤을 당한 행적으로 보면, 한글과 함께 민족의식도 깨우쳤던 모양이다. 어떤 때는 하도 많이 맞아서 지게에 실려 오기도 했다고 한다. 그때마다 똥물을 마시면서 몸을 추슬렀는데, 동네 사람들은 부처님 가운데 토막 닮아서 법 없이도 살 이분이 왜 이런 고난을 당하는지 몰랐다. 다만 어쩌다 철없는 동네 아이들이 학교에서 배운 왜놈 말을 쓰는 걸 보면 몹시 야단을 친다든지, 대동아전쟁 말기 왜놈들이 쇠붙이란 쇠붙이는, 하다못해 부러진 숟가락 몽당이까지 빼앗아 갈 즈음에 제사에 쓰던 유기그릇들을 땅에 묻어놓고, 다른 사람들한테도 “그놈들이 유기그릇 가져다 어디 쓰는지 아세요? 독립군들 죽이는 총알 만드는 데 쓴답니다.” 하고 말했던 것으로 보아 미상불 왜놈들이 불령선인으로 몰아 닦달했음직하다는 짐작만 할 뿐이었다.

해방이 되고 나자 이분은 갑자기 바빠졌다. 동네 사람들은 평소에도 이분이 똑똑한 줄은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유식하고 지도력이 탁월한지는 모르고 있었다. 건국준비위원회, 농민조합, 소작쟁의, 등 매사에 뛰어난 일꾼이었다. 꼼꼼하면서도 너그러워서 인근에 이분을 믿고 따르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한국전쟁이 터지고 ‘빨갱이 세상’이 되었다. 이분은 빨갱이 세상에 적극적으로 부역했다. 그러나 천성이 모질지 못해서 우익 반동을 처단하는 데는 늘 뒷전이었다. 그 탓인지는 몰라도 온 나라에서 좌익이 밀 때는 우익 인사들이 줄초상이 나고, 우익이 밀 때는 좌익 인사들의 떼죽음이 나는 소동이 벌어질 때도 이분이 사는 곳에서는 서로 죽고 죽이는 드잡이질이 거의 없었다. ‘인공’이 끝나고 수복이 되자 전국 각지에서 빨갱이 소탕이 벌어졌다. 그동안 행적으로 보아 이분도 죽은 목숨이었다. 그런데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 모질게 닦달을 당하고 꽤 여러 해 징역을 살았지만, 아무튼 겉으로 보기에는 몸 성히 마을로 돌아왔다. 들리는 말로는 이분 덕에 목숨을 건진 우익 인사들이 많았는데, 그 사람들이 손을 써서 살아남았다고 한다.

머지않아 마을 사람들은 이분이 아예 바보가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초롱초롱하던 눈망울에 빛이 사라졌다. 사람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그리고 숫제 벙어리가 된 듯 말이 없었다. “쯧쯧, 그 똑똑하던 사람이 줄창 똥물을 마셔대더니 저렇게 얼간이가 되어버렸어.” 처음에는 이렇게 동정을 하던 사람들도 세월이 지나면서 모두 이분을 깔보고 천대하기 시작했다. 까닭이 있었다. 어느 집에 초상이 나면 이분이 염을 하겠다고 나섰다. 썩은 시체를 만지던 손을 씻지 않고 남이 먹다 남긴 음식 찌꺼기를 맨손으로 집어 게걸스럽게 먹었다. 동네 궂은일은 모두 도맡아, 싫은 내색 하지 않고 꾸역꾸역 하는 이분을 처음에는 고맙게 여겨 공치사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이란 게 묘해서, 고마운 일을 해주면서도 생색을 내지 않으면 고마운 줄을 모르는 법이다. 동네 사람들은 이분이 아무리 자기들을 도와주어도 ‘바보 저 좋아서 하는 짓’이려니 여겨 나중에는 종놈 부리듯이 부리면서 유세까지 부렸다.

황토물이 뻘겋게 밴 고의적삼 차림에 검정 고무신, 덥수룩한 머리와 수염, 가끔 동네 꼬마들을 만나 히죽 웃을 때를 빼면 열릴 줄 모르는 입, 욕을 해도, 흉을 보아도, 손가락질을 해도 바뀌지 않는 천연덕스러운 얼굴표정, 이 모든 것이 마을 사람들에게는 마음씨 좋은 바보의 상징이었지만, 가족에게는 지울 수 없는 인두 자국이었다. 바보 지아비와 아버지를 둔 아내와 자식들이 겪은 수모와 멸시도 엄청났다.

이분은 일흔 살 되던 해 봄에 죽었다. 죽기 얼마 전에 마치 자기가 언제 죽을 거라는 걸 아는 사람처럼, 맏아들에게는 가위로 머리와 수염을 손질해달라고 부탁하고, 아내에게는 깨끗이 빨아놓은 옷이 있느냐고 물었다. 부역죄로 감옥에 갔다가 나온 뒤로는 명절날에도 새 옷을 찾지 않던 남편이 생뚱맞게 새 옷을 찾은 것이다. 임종이 가까워서 이분이 자식들에게 남겼다는 말은 이랬다고 한다.

“그동안 못난 아비 지켜보느라 마음고생 많았을 것이다. 반동의 시대에 인민에게 봉사하려는 사람은 가끔 똥물도 먹어야 하고, 가끔 멍청이도 되어야 하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