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자가 말하기를, 우산(牛山)의 나무가 전에는 아름다웠다. 그런데 대국(大國)의 성 밖에 있어서 도끼에 찍혀 고이 자랄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밤낮이 양육시키고, 비와 이슬이 적셔 주어 그루터기에 싹이 돋아났지만, 소와 양을 놓아먹이니 저렇게 벌거숭이가 되어 버렸다. 사람들은 그 벌거숭이산을 보고 우산에는 큰 나무가 있던 적이 없는 줄로 알지만, 그게 어찌 산의 본성이랴.
사람으로 태어난 자, 어찌 본디 인의(仁義)의 마음이 없었으랴. 그 양심을 잃음이 또한 도끼로 나무를 찍음과 같은 것이다. 날마다 이를 찍어내면 양심이 밤낮으로 되살아나고, 새벽 공기에 소생하나, 인의를 좋아하고 불의를 미워함이 남과 같지 못함은 낮에 하는 행위가 또 이것을 어지럽혀 잃게 하기 때문이다. 이 양심 해치기를 되풀이하면 밤새 되살아나는 기운이 있으나마 하다. 밤새 되살아나는 기운이 있으나마나 하게 되면 짐승이나 다를 바 없게 된다. 사람들이 그 짐승 같음을 보고 본디 인의의 재질이 없는 줄로 알지만, 그게 어찌 인간의 본성이랴.’
<맹자>에 나오는 내용이다. 맹자는 인간의 본성을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인간은 원래 착하게 태어났는데 모진 환경이 인간의 마음을 황폐하게 만든다. 맹자는 ‘우산의 나무’ 비유로 이를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런 견해는 장자도 마찬가지인데 오히려 범위가 확장된다.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체의 본성은 자연스러우며 완전하다. 다만 인간만이 동물의 본성을 야만이라 부른다. 쥐가 도둑질을 하고, 모기가 물어뜯고, 사자는 먹이를 사냥해 죽인다. 나무늘보는 하루의 대부분을 잠으로 보낸다. 개는 공공연히 흘레를 붙는다. 이는 자연 생태계 안에서 본성의 자연스런 작용일 뿐이다. 쥐는 도둑놈이고, 나무늘보는 게으름뱅이, 개를 외설스럽다, 고 하는 것은 인간의 좁은 판단이며 가치관의 전도다.
여기서 맹자와 장자의 차이가 나는 것 같다. 아마 맹자라면 어떻게 해서든 도덕적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할지 모른다. 무지를 깨우치고 인의(仁義)를 알도록 가르쳐야 더 나은 세상이 된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장자는 그대로 두라고 한다. 모든 존재는 그대로 두면 저절로 조화롭고 평화롭게 살아가도록 되어 있다. 그것은 마치 우산(牛山)에서 도끼질을 멈추는 것과 같다. 그러면 저절로 산은 푸른 숲으로 변한다. 맹자의 우산 비유를 장자 식으로 해석하면 도끼는 온갖 인위적인 장치들이고 문명적 가치관이다. 맹자의 선한 의지조차 장자에게는 또 다른 도끼날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맹자나 장자나 인간의 본성을 끊임없이 되살아나는 선한 생명력으로 본 점은 비슷하다. 어떤 악인도 그 바탕은 선하다. 비록 지금은 민둥산이 되어 있을지라도 부정적 간섭을 멈추고 기다리면 본래 모습을 되찾게 된다. 그것이 본성의 힘이다. 장자학파의 표현으로는 무위(無爲)의 힘이다. ‘우산의 나무가 전에는 아름다웠다(牛山之木嘗美矣).’ 인간에 대한 믿음과 신뢰가 아름답게 표현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