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살이의꿈

화백이라 불러다오

샌. 2011. 6. 22. 11:37

교직을 퇴직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계속 ‘선생’이라고 부른다. 그것이 아마 어느 누구에게나 써도 무난한 호칭이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내 입장에서는 선생이라는 호칭이 별로 달갑지 않다. 40년 가까이 들어왔으니 신물이 나기도 했지만 선생이라는 말에서 잊고 싶은 현장의 기억들이 되살아나 괴롭기 때문이다. 정말로 과거로 돌아가기는 싫다.

그래서 몇몇 친구들에게는 선생 대신 ‘화백’이라 불러달라고 부탁했다. 화백은 ‘화려한 백수’의 준말이다. 그랬더니 짓궂은 B는 화백이 당치않다며 ‘초백’이라 불러야 옳다고 대꾸했다. 초라한 백수라는 뜻이다. 별로 하는 일 없이 집에 있으니 그가 보기에는 화백이 아니라 초백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B는 ‘아무 하는 일이 없는 화려함’이 있는 줄은 모르는 것 같다. 세상에서 최고의 맛이 무미지미(無味之味)라고 하지 않던가.

얼마 전에 우연히 지하철에서 먼저 은퇴한 선배를 만났다. 선배는 테니스 가방을 어깨에 메고 반포로 운동을 나간다 했다. 두 군데 테니스 클럽을 나가고, 스포츠 댄스를 하고, 문화센터에서 교양강좌를 듣고, 내가 보기에도 일주일 일정이 빠듯했다. 결론은 무료하면 안 되고 바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내가 거기에 무슨 반론을 하겠는가.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하는 척 했다.

규칙적인 일을 마다하는 게 아니다. 좋아하는 일이 생기면 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굳이 만들고 찾아 나서지는 않겠다. 일 없는 무료함 역시 나의 친구다. 활동과 교제보다는 차라리 고독에서 즐거움을 누리고 싶다. 텅 비어서 오히려 충만한 삶을 살고 싶다. 그것이 화백 즉, 화려한 백수로서의 내 꿈이다.

‘나에게는 꿈이 하나 있지 / 논두렁 개울가에 / 진종일 쪼그리고 앉아 / 밥 먹으라는 고함 소리도 / 잊어먹고 / 개울 위로 떠가는 / 지푸라기만 바라보는 / 열다섯 살 / 소년이 되어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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