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살이의꿈

샌. 2011. 5. 22. 15:37

어렸을 적에는, 넌 커서 뭐가 되고 싶니, 라는 질문이 제일 곤혹스러웠다. 되고 싶은 게 없었으니 대답할 말이 없었다. 사람들이 판검사를 좋아하는 걸 알고는 판사나 검사라고 답할 때도 있었지만 외교적 수사였을 뿐이다. 아버지는 이런 내 성격을 아셨는지 교사가 되기를 희망하셨다. 초등학교 때 통지표에 나오는 부모 희망란에는 항상 교사라고 적혀 있었다. 교수가 아니고 교사라는 것에 서운하기도 했지만 덩달아 내 희망도 교사가 되었다. 당시는 지금과 달리 교사가 인기가 없었다. 교사가 되길 바라는 건 창피한 일이었고 그건 청소년기에 가져야 할 야망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별다른 꿈이 없었던 건 그 이후로도 마찬가지였다. 청소년기에 가졌던 꿈에 대해서 자신 있게 얘기하는 사람들을 보면 지금도 부럽다. 나는 그런 경험이 없었기 때문이다. 전에 아이들과 면담할 때 자신의 적성이나 희망을 찾지 못하고 대답을 못해 망설이는 아이들을 보면 동정이 가고 이해가 되었다. 명확한 꿈을 가지고 있기보다는 그렇지 못한 경우가 더 많았다. 그러면 나는 속으로, 그래 그것도 괜찮은 거야, 라고 다독여주었다. 내 경험상, 청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 고 윽박지르지 않았으면 한다. 꿈이 없는 것이 허황된 꿈에 집착하는 것보다 낫다.

성인이 되어서도 돈이나 명예 등에 별다른 욕심이 없었다. 주제 파악을 제대로 한 셈이다. 그러다 보니 일이나 직장 생활에 아등바등하지 않았다. 교직이라는 특수성도 있었지만 동료들과 자리나 이권을 놓고 경쟁을 하지 않았다. 교장이 되려고 했다면 부딪쳐야 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을 것이다. 학교에서는 주로 변두리 업무를 맡으며 지냈지만 그게 내 체질에 맞았다. 그 흔한 초과근무 한 번 하지도 않았고 일에 열심을 내지도 않았다. 퇴직을 한 지금은 그 점이 도리어 도움이 되고 있다.

퇴직을 했지만 직장 생활 할 때와 별반 다를 게 없다. 일찍 퇴근하고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았기 때문에 퇴직 전이나 지금이나 별 차이가 없다. 일에 몰두했던 사람은 퇴직 후 일이 끊어지면 금단증상이 나타나는 것 같다. 또 바쁘게 산 사람은 퇴직 후에도 바쁘게 사는 경향이 있다. 얼마 전 퇴직한 사람들끼리의 모임에서 여행 약속을 잡는데 다들 평일은 어렵다는 것이다. 얘기를 들어보니 문화센터나 강의 등 여러 군데에 등록해서 다니며 직장 생활 할 때 못지않게 분주하다. 은퇴 과로사라는 말이 빈 말이 아니었다.

꿈이나 일에 대한 욕심이 별로 없는 내 성격에 지금은 감사한다. 일이 없어도 혼자 즐길 줄 아는 능력은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한다. 덕분에 퇴직후증후군도 아직은 걱정하지 않는다. 꿈이 크고 활동적이라고 늘 좋은 것은 아니다. 나이 들어서는 차라리 그 반대가 낫다. 일이 없으면 무엇이라도 만들어내고 움직여야 직성이 풀리는 피곤한 사람들이 있다. 꿈이 없는 인생을 오아시스 없는 사막이라고 말하지 마라. 바라는 바 없이 혼자서도 유유자적 지낼 수 있기, 퇴직 후에는 가장 필요한 능력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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