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살이의꿈

은행과 병원

샌. 2011. 6. 27. 11:51

가고 싶지 않은 곳이 은행과 병원이다. 은행 출입 하는 일이 거의 없지만 어쩌다 들르게 되면 낯선 분위기에 적응하기 힘들다. 기계 앞에서 버튼을 누르든, 대기 번호표를 뽑은 뒤 불려나가든 마찬가지다. 은행은 거대한 컴퓨터 같다. 창구 직원도 컴퓨터 단말기의 한 키로 보인다. 컴퓨터가 계산해주는 숫자에 의해 내 생활이 지탱되고 있다는 사실이 기분 나쁘다. 무언가에 의해 내 삶이 조종되는 것 같다. 그래서 은행에 있으면 그냥 초라해진다. 그런 감정을 느끼지 않으려고 가능하면 은행을 들락거리지 않으려 한다.

현대식 병원도 그렇다. 퇴직을 한 뒤 어쩔 수 없이 D 병원에서 장 내시경 검사를 받게 되었다. 최신 시설을 갖춘 전문병원이었는데 접수에서부터 검사까지 겉으로는 친절하고 완벽했다. 그러나 너무 쓸쓸하고 공허했다. 의사와 환자 사이에 아무런 인간적 교감 없이도 모든 절차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나는 기계 사이를 전전하는 물(物)이었다. 컨베이어 벨트에 얹혀 불량품 검사를 받는 제품과 다를 바 없었다. 회복실에서 깨어나면서, 이건 아니야, 라고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한 치 빈 틈 없는 차가움에 눈물이 날 만큼 슬펐다. 완벽한 인간 소외의 현장, 현대의 금융 시스템이나 의료 시스템 모두 그 속에서의 경험은 불쾌하다.

나이가 들수록 돈이 최고라고 하고, 병원 가까이 살아야 한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그러나 안락을 얻는 대신 삶은 자율성을 잃고 수동적이 된다.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문명과 시스템의 포로가 되어 간다. 슬픈 일이다. 가장 온전한 삶이란 은행과 병원 없이 사는 것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그러나 은행과 병원을 떼어놓고 현대인의 삶을 말할 수 없다. 그나마 독립된 인간으로서의 주체성을 잃지 않으려면 돈과 의료 기술에 대한 의존성을 최소한으로 줄여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자신이 삶의 주인이 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자본의 시대를 인간답게 살아가는 길이 무엇인지, 당연한 것을 당연히 고민하고 회의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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