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초망한 소원 / 이경학

샌. 2014. 8. 30. 12:27

울 엄니 한 번 업어봤으면....

출세해서 이층집 짓는 욕심은

예전에 부질없는 것인 줄 깨달았고

통일되어 아버지 모시고 고향가는 꿈은

엊그제 신문에서 미적미적 멀어졌으나

이 새벽 닥친 추위에 이불자락 끌어당기며

끝까지 놓치지 않은 하나 남은 소원은,

울 엄니

한 번 업어드려 봤으면....

휠체어 박차고 일어나 두 발로 떳떳이 서서

울 엄니 따스한 배를 내 등허리에 얹어봤으면....

 

저 작은 여인네

손주 안아보시겠다고 연세 많이 드셔서도

끝내 균형을 잃지 않고 계시니,

천성이 명랑한 아낙네

아들 사람 되는 꼴 보시겠다고 그 모진 세월에도

걸음걸이 빠르고 반듯하시니....

달랑 업고 동네 한 바퀴 돌아봤으면....

오래 사시겠다고 다짐하시는 뜻이

나 일어설 때까지 곁에서 지켜주시겠다는 것이니

그 의지를 믿고 이 벅찬 소원 질기게 품고 살다가

어느 날 울 엄니 업고 눈길 걸어

새벽기도 예배당에 모셔다 드려야지

 

- 초망한 소원 / 이경학

 

 

이경학 님은 걷지도 못하고 한 손도 쓰지 못하는 화가다. 미대 재학중에 독일로 유학을 갔다가 원인을 알 수 없는 뇌혈관 이상과 척수병변으로 뇌와 오른손을 제외한 모든 부분이 마비됐다. 그의 나이 스물다섯이었다. 왼손잡이 화가에게 왼손을 사용하지 못한다는 건 사형 선고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오른손으로 선긋기 연습부터 하며 그림 그리기를 다시 시작했다. 그리고 시인으로도 등단했다. 불운을 각고의 노력으로 이겨낸 것이다.

 

그 뒤에는 부모님의 헌신적인 보살핌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그래서 이 시는 눈물겹다. '초망하다'는 촌스럽고 뒤떨어져서 세상일에 어둡다는 뜻이다. 엄미를 한 번 업어보고 싶다는 소원을 '초망하다'고 붙였다. 보통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일이 누구에게는 초망한 소원이 되다니, 내가 너무 호사스럽게 살고 있는 것 같아 미안하고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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